제1장. 충분히 호흡하는 존재: 캐릭터를 한 인간으로,

by 김동은WhtDrgon

여러분이 한참 좋아한 캐릭터 한 명을 잠깐 떠올려 보십시오. 어떤 책의 주인공일 수도 있고, 영화나 드라마의 인물일 수도 있고, 오래 즐긴 게임의 NPC일 수도 있고, 가끔 본 만화의 단편 등장인물일 수도 있습니다. 한 명만 골라 보세요.


골랐다면 한 가지 더 떠올려 봅시다. 그 인물이 작중 어떤 한 장면에서 한 작은 행동. 잠깐 멈춰 사진 찍히듯 손을 들어 머리카락을 정리하던 동작이라든가, 누가 슬쩍 말을 건넸을 때 답하기 전에 두 박자 침묵하던 자리라든가, 어느 비 오는 거리에서 아주 익숙하게 우산을 펼치던 모양 같은 것. 작가가 그 인물을 만들면서 그렇게 오래 고민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작은 버릇 하나면 됩니다.


저는 가끔 그런 자리를 들여다보다가 묘한 기분에 잠깁니다. 저 인물은 분명 누군가가 만든 인물입니다. 종이 위에 적혀 있거나 화면 안에 그려져 있거나 모니터 너머에 데이터로 존재하는, 명백히 허구의 존재입니다. 그런데 그 작은 버릇 하나가, 그가 진짜로 어딘가에 살고 있는 것 같다는 감각을 줍니다. 그가 책장을 덮고 화면을 끈 뒤에도 어딘가에서 똑같이 손을 들어 머리카락을 정리하고, 똑같이 두 박자 침묵하다가 답하고, 똑같이 우산을 펼치고 있을 것 같은 감각.


그 감각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에 관한 글입니다. 14회에 걸쳐 한 캐릭터가 0에서부터 충분히 호흡하기까지의 작업을 한 단계씩 풀어 가겠습니다. 첫 회인 오늘은 이 작업에 들어설 때 저희가 가지고 들어가는 자세, 그리고 그 자세를 지닌 사람이 누구이며 누구와 함께 일하는가를 정리해 두려고 합니다.


캐릭터는 데이터가 아닙니다

이 일을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이 종종 들고 오는 양식이 있습니다. 캐릭터 시트라는 이름이 붙어 있고, 이름·나이·성별·키·몸무게·외모·취미·특기·트라우마 같은 칸이 있는 표 한 장입니다. 그 표를 채우면 캐릭터가 만들어진 것 같은 인상을 줍니다. 칸이 모두 까매지면 한 사람이 완성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저희가 그 양식을 쓰지 않는다는 말은 아닙니다. 저희도 비슷한 양식을 사용합니다. 다만 저희는 그 표가 캐릭터를 만든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표는 캐릭터가 만들어진 뒤에 그를 정리해 두는 공간입니다. 만드는 작업은 표를 채우는 일과 다른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같은 표를 두 사람이 똑같이 채워도 한 쪽은 살아 있는 인물이 나오고 다른 쪽은 종이 인형이 나오는 일이 자주 있습니다. 표가 같으니 정보의 양은 같습니다. 칸을 메운 단어의 개수도 비슷합니다. 그런데 한 쪽은 호흡하고 있고 다른 쪽은 호흡하지 않습니다. 그 차이가 어디서 오는지를 묻기 시작하면, 표 양식이 캐릭터를 만드는 게 아니라는 사실에 도달합니다.


저희는 캐릭터를 한 명의 사람으로 다룹니다. 데이터의 묶음이 아니라 충분히 호흡하는 존재로 두고 작업합니다. 그 자세가 표를 어떻게 채울지를 결정합니다. 같은 칸 옆에 같은 단어가 들어가도, 그 단어를 두는 손길이 한 사람의 무게를 의식하고 있는가 아닌가에 따라 결과가 갈립니다.


이 무게를 의식하는 자세: 캐릭터를 한 인간으로 다룬다는 자세 가 본 강연의 첫째 기둥입니다.


분노가 아닌 애정으로

저는 캐릭터를 만들 때 한 가지를 미리 정해 둡니다. 이 작업의 동력으로 무엇을 사용할 것인가. 분노로 쓸 것인가, 애정으로 쓸 것인가.


분노는 빠릅니다. 누군가에 대한 분노, 사회에 대한 분노,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는 짧은 시간에 강한 문장을 토해 냅니다. 그런 문장은 처음 읽을 때 읽는 이의 가슴을 단숨에 칩니다. 그러나 분노는 휘발성이 강합니다. 며칠 지나면 식고, 식은 분노로는 캐릭터를 끝까지 끌고 가기가 어렵습니다. 한 인물의 한 장면을 분노로 쓸 수는 있지만, 그 인물의 한 인생을 분노만으로 빚어 두면 그 인물은 며칠짜리 인물이 됩니다. 다음 책으로 넘어가면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가 잘 떠오르지 않습니다.


애정은 느립니다. 한 인물에 대한 애정을 키우려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진지하게 살펴야 합니다. 그의 작은 버릇과 사소한 모순과 흠집까지 들여다봐야 합니다. 그 시간이 듭니다. 그러나 그렇게 키운 애정은 오래갑니다. 그 인물을 다음 책 다음 화 다음 시즌까지 끌고 갈 수 있고, 작가가 자기 책상을 떠난 한참 뒤에도 그가 어디선가 호흡하고 있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저희는 처음부터 애정으로 시작하기를 권합니다. 분노로 시작해도 어느 시점에는 애정으로 옮겨 가야 인물이 살아남습니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애정의 자리에 서서 작업하는 편이 효율적입니다. 자신이 가족·연인·친구를 들여다보던 그 자세 그대로, 캐릭터를 들여다봅니다. 그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 앞에서 작아지는지, 어떤 자리에서 편안한지를 진지하게 묻습니다.


이 자세는 작업 도중에 생기는 자잘한 갈등들 이 캐릭터의 어떤 면을 살리고 어떤 면을 깎을 것인가, 어떤 결정을 내리게 할 것인가 — 의 답을 결정합니다. 애정의 자리에서는 깎이는 부분도 깎이는 이유가 있습니다. 분노의 자리에서는 깎이는 일이 응징처럼 됩니다. 두 작업의 결과물이 미세하게 다릅니다. 14회 강연 내내 저희는 애정의 자리에 서서 캐릭터를 들여다봅니다.


납작하게 시작해서 부풀립니다

이 자세를 가진 사람도 처음에는 곤혹스러워합니다. 한 인물을 입체적으로 만들고 싶은데, 처음부터 입체적인 인물을 그리려면 머리가 멈춰 버립니다.


지금 바로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가 되어
멤버십 특별 연재 콘텐츠를 모두 만나 보세요.

brunch membership
김동은WhtDrgo···작가님의 멤버십을 시작해 보세요!

(주)메제웍스 CEO. 배니월드,BTS월드, 세계관제작자. '현명한NFT투자자' 저자. 본질은 환상문학-RPG-PC-모바일-쇼엔터-시네마틱-게임-문화를 바라보는 기획자.

538 구독자

오직 멤버십 구독자만 볼 수 있는,
이 작가의 특별 연재 콘텐츠

  • 최근 30일간 35개의 멤버십 콘텐츠 발행
  • 총 89개의 혜택 콘텐츠
최신 발행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