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이 한참 좋아한 캐릭터 한 명을 잠깐 떠올려 보십시오. 어떤 책의 주인공일 수도 있고, 영화나 드라마의 인물일 수도 있고, 오래 즐긴 게임의 NPC일 수도 있고, 가끔 본 만화의 단편 등장인물일 수도 있습니다. 한 명만 골라 보세요.
골랐다면 한 가지 더 떠올려 봅시다. 그 인물이 작중 어떤 한 장면에서 한 작은 행동. 잠깐 멈춰 사진 찍히듯 손을 들어 머리카락을 정리하던 동작이라든가, 누가 슬쩍 말을 건넸을 때 답하기 전에 두 박자 침묵하던 자리라든가, 어느 비 오는 거리에서 아주 익숙하게 우산을 펼치던 모양 같은 것. 작가가 그 인물을 만들면서 그렇게 오래 고민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작은 버릇 하나면 됩니다.
저는 가끔 그런 자리를 들여다보다가 묘한 기분에 잠깁니다. 저 인물은 분명 누군가가 만든 인물입니다. 종이 위에 적혀 있거나 화면 안에 그려져 있거나 모니터 너머에 데이터로 존재하는, 명백히 허구의 존재입니다. 그런데 그 작은 버릇 하나가, 그가 진짜로 어딘가에 살고 있는 것 같다는 감각을 줍니다. 그가 책장을 덮고 화면을 끈 뒤에도 어딘가에서 똑같이 손을 들어 머리카락을 정리하고, 똑같이 두 박자 침묵하다가 답하고, 똑같이 우산을 펼치고 있을 것 같은 감각.
그 감각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에 관한 글입니다. 14회에 걸쳐 한 캐릭터가 0에서부터 충분히 호흡하기까지의 작업을 한 단계씩 풀어 가겠습니다. 첫 회인 오늘은 이 작업에 들어설 때 저희가 가지고 들어가는 자세, 그리고 그 자세를 지닌 사람이 누구이며 누구와 함께 일하는가를 정리해 두려고 합니다.
이 일을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이 종종 들고 오는 양식이 있습니다. 캐릭터 시트라는 이름이 붙어 있고, 이름·나이·성별·키·몸무게·외모·취미·특기·트라우마 같은 칸이 있는 표 한 장입니다. 그 표를 채우면 캐릭터가 만들어진 것 같은 인상을 줍니다. 칸이 모두 까매지면 한 사람이 완성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저희가 그 양식을 쓰지 않는다는 말은 아닙니다. 저희도 비슷한 양식을 사용합니다. 다만 저희는 그 표가 캐릭터를 만든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표는 캐릭터가 만들어진 뒤에 그를 정리해 두는 공간입니다. 만드는 작업은 표를 채우는 일과 다른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같은 표를 두 사람이 똑같이 채워도 한 쪽은 살아 있는 인물이 나오고 다른 쪽은 종이 인형이 나오는 일이 자주 있습니다. 표가 같으니 정보의 양은 같습니다. 칸을 메운 단어의 개수도 비슷합니다. 그런데 한 쪽은 호흡하고 있고 다른 쪽은 호흡하지 않습니다. 그 차이가 어디서 오는지를 묻기 시작하면, 표 양식이 캐릭터를 만드는 게 아니라는 사실에 도달합니다.
저희는 캐릭터를 한 명의 사람으로 다룹니다. 데이터의 묶음이 아니라 충분히 호흡하는 존재로 두고 작업합니다. 그 자세가 표를 어떻게 채울지를 결정합니다. 같은 칸 옆에 같은 단어가 들어가도, 그 단어를 두는 손길이 한 사람의 무게를 의식하고 있는가 아닌가에 따라 결과가 갈립니다.
이 무게를 의식하는 자세: 캐릭터를 한 인간으로 다룬다는 자세 가 본 강연의 첫째 기둥입니다.
저는 캐릭터를 만들 때 한 가지를 미리 정해 둡니다. 이 작업의 동력으로 무엇을 사용할 것인가. 분노로 쓸 것인가, 애정으로 쓸 것인가.
분노는 빠릅니다. 누군가에 대한 분노, 사회에 대한 분노,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는 짧은 시간에 강한 문장을 토해 냅니다. 그런 문장은 처음 읽을 때 읽는 이의 가슴을 단숨에 칩니다. 그러나 분노는 휘발성이 강합니다. 며칠 지나면 식고, 식은 분노로는 캐릭터를 끝까지 끌고 가기가 어렵습니다. 한 인물의 한 장면을 분노로 쓸 수는 있지만, 그 인물의 한 인생을 분노만으로 빚어 두면 그 인물은 며칠짜리 인물이 됩니다. 다음 책으로 넘어가면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가 잘 떠오르지 않습니다.
애정은 느립니다. 한 인물에 대한 애정을 키우려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진지하게 살펴야 합니다. 그의 작은 버릇과 사소한 모순과 흠집까지 들여다봐야 합니다. 그 시간이 듭니다. 그러나 그렇게 키운 애정은 오래갑니다. 그 인물을 다음 책 다음 화 다음 시즌까지 끌고 갈 수 있고, 작가가 자기 책상을 떠난 한참 뒤에도 그가 어디선가 호흡하고 있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저희는 처음부터 애정으로 시작하기를 권합니다. 분노로 시작해도 어느 시점에는 애정으로 옮겨 가야 인물이 살아남습니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애정의 자리에 서서 작업하는 편이 효율적입니다. 자신이 가족·연인·친구를 들여다보던 그 자세 그대로, 캐릭터를 들여다봅니다. 그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 앞에서 작아지는지, 어떤 자리에서 편안한지를 진지하게 묻습니다.
이 자세는 작업 도중에 생기는 자잘한 갈등들 이 캐릭터의 어떤 면을 살리고 어떤 면을 깎을 것인가, 어떤 결정을 내리게 할 것인가 — 의 답을 결정합니다. 애정의 자리에서는 깎이는 부분도 깎이는 이유가 있습니다. 분노의 자리에서는 깎이는 일이 응징처럼 됩니다. 두 작업의 결과물이 미세하게 다릅니다. 14회 강연 내내 저희는 애정의 자리에 서서 캐릭터를 들여다봅니다.
이 자세를 가진 사람도 처음에는 곤혹스러워합니다. 한 인물을 입체적으로 만들고 싶은데, 처음부터 입체적인 인물을 그리려면 머리가 멈춰 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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