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주 12장 - 자동화 엔진

- 라이브러리에서 타임라인을 추출하는 기계

by 김동은WhtDrgon

통념 : AI는 작품을 대신 써준다

본강 : 엔진이 만드는 것은 타임라인이고, 작품은 그 뒤에 사람이 낸다


통념 : 자동화는 생산량을 늘리는 도구다

본강 : 자동화의 진짜 가치는 같은 자산을 여러 번 다르게 수확하는 다중 추출이다


통념 : 좋은 프롬프트가 좋은 결과를 만든다

본강 : 좋은 결과는 라이브러리·렌즈·SKILL 3층의 결합에서 나온다


라이브러리와 렌즈를 결합하는 기계

10장에서 라이브러리를 지었고, 11장에서 인접 세계관이라는 렌즈를 설계했다. 두 가지를 따로 두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라이브러리만 있으면 설정집이다. 옵시디안 볼트에 키워드가 수백 개 쌓여 있고 메카닉 매트릭스가 정교하게 갖춰져 있어도, 거기서 한 줄의 이야기도 자동으로 나오지 않는다. 사실의 더미일 뿐이다.

렌즈만 있으면 허공에 뜬 관점이다. 부모-자식 관점으로 이야기를 추출하라는 지시는 그 자체로는 어떤 작품도 만들지 않는다. 추출의 대상이 되는 라이브러리가 없으면 명령어가 빈 곳을 향해 발사된다.


두 가지를 동시에 읽어 실제로 타임라인을 추출하고, 그 타임라인을 품질 기준에 맞춰 다듬는 실행기가 있어야 비로소 절차적 서사 엔진이 된다. 그 실행기가 12장의 주제이다.


엔진은 단순한 자동화 도구가 아니다. 엔진의 핵심 정체는 세 층의 결합이다. 라이브러리(데이터), 렌즈(추출 규칙), SKILL(품질 기준). 이 세 층이 매 작업마다 동시에 입력되어야 한 편이 합격선의 작품이 된다. 어느 한 층이 빠지면 다른 종류의 실패가 발생한다.


이번 장은 그 엔진의 해부도이다. 먼저 3층 구조를 본다. 그 다음 번역 프로세스라는 엔진의 가장 명료한 작동 사례를 본다. 같은 원리가 단편 집필이든 콘텐츠 변환이든 동일하게 작동하는데, 번역이 가장 단계가 잘 보이는 사례이기 때문이다. 이어서 그 엔진을 코드 없이 짓는 바이브코딩의 실제와 자주 겪는 함정을 본다. 그리고 AI 시각 변환의 진화와 멀티 유즈라는 새 시대의 산출물 양식을 다룬다. 마지막으로 그 엔진이 산업으로 출력되는 첫 사례인 서연각 프로젝트를 보고, 4주차 전체를 닫는 8개의 통찰로 마무리한다.


라이브러리는 이야기가 아니라 이야기 발생 조건이다

엔진을 다루기 전에 한 명제를 다시 못 박는다. 4주차 인사이트의 첫 번째 통찰이자 이번 장 전체의 전제이다.

라이브러리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야기가 발생할 조건이다.


이 차이를 한 번 더 분명히 하자. 라이브러리를 완성하면 이야기가 생길 것이라는 기대는 흔하다. 그렇지 않다. 라이브러리가 완성도를 높일수록 늘어나는 것은 이야기의 완성도가 아니라 추출 가능한 이야기의 수이다. 설정집과 작품이 다른 것처럼, 라이브러리와 타임라인은 다른 차원에 있다. 라이브러리를 완성했다고 작품이 완성된 것이 아니다. 거꾸로 말하면, 작품이 없다고 라이브러리가 부족한 것도 아니다.


타임라인과 스토리의 정의

여기서 한 가지 어휘를 명확히 해두자. 라이브러리·타임라인·스토리. 세 단어의 관계는 다음과 같다.

라이브러리는 세계관이다. 공간 전체를 상정하는 정적 자산이다.

타임라인은 그 세계관 안의 한 궤적이다. 시간 축 위에 놓이는 사건의 흐름이다.

스토리는 한 인물에게 벌어진 타임라인이다. 사건의 결합체가 한 인물의 시점에서 해석된 것이다.

세 단어가 뒤섞이면 강의가 흐려진다. 라이브러리가 두꺼워졌다는 말과, 타임라인이 추출되었다는 말과, 스토리가 완성되었다는 말은 서로 다른 차원의 사실이다. 엔진은 라이브러리에서 타임라인을 추출하는 기계이고, 작가는 타임라인을 스토리로 마감하는 사람이다.


자동화 엔진의 산출물은 작품이 아니라 타임라인이다

이 사실에서 두 번째 명제가 따라온다. 자동화 엔진의 산출물은 작품이 아니라 타임라인이다.


엔진이 생성하는 것은 완성된 이야기가 아니다. 라이브러리에서 뽑혀 나온 한 궤적의 기록, 즉 타임라인이다. 타임라인은 아직 작품이 아니다. 타임라인이 작품이 되려면 끝을 내고 마감을 치고 패키징을 거치는 또 다른 과정이 필요하다. 그 과정을 수행하는 것은 여전히 사람, 정확히 말하면 작가이다.


이 경계는 엔지니어링 관점에서도 윤리적 관점에서도 중요하다. 엔진이 아무리 정교해져도 작가의 자리를 없애지는 못한다. 3주차 7장에서 다룬 참조 작가 시스템조차 작품을 만드는 도구가 아니다. 그것은 타임라인에 톤앤매너라는 렌즈를 더하는 장치일 뿐이다. 엔진은 타임라인을 생성하는 기계이고, 작품은 그 기계 바깥에서 시작된다. 이 경계를 혼동하지 않아야 엔진과 작가 양쪽을 모두 제 자리에 둘 수 있다.


라이브러리는 IP의 위키화·자료화 작업

강연자가 라이브러리를 정의하는 방식은 단순하다. 지금까지 다룬 모든 작업을 위키화·자료화하는 일이 곧 라이브러리이다. 이 정의는 추상적이지 않다. 강연자는 자기 작품인 FEWK뿐 아니라 LG전자·LG생활건강 같은 외부 IP에서도 이 일을 했고, 하이브에서는 세계관 라이브러리 파트장이라는 직책으로 이 일을 했다. 라이브러리는 그 작업을 부르는 이름이다.


이 정의가 중요한 이유가 있다. 창작자가 만든 작품도 라이브러리화의 대상이고, 기업이 만든 제품·브랜드·역사도 라이브러리화의 대상이다. 둘 다 같은 도구로 처리된다. 옵시디안 볼트, 메카닉 매트릭스, 인접 세계관 렌즈, 그리고 12장의 자동화 엔진. 같은 인프라가 창작 IP와 기업 브랜드 양쪽에 적용된다.


빈 곳을 의도적으로 남긴다

3주차 9장에서 우리는 빈 곳은 팬덤이 채운다는 원칙을 다뤘다. 원피스의 공백의 100년이 작가가 의도적으로 비워둔 역사이고, 팬덤은 그 빈 곳에 20년 동안 이론을 세우고 토론을 한다. 빈 곳이 결함이 아니라 엔진이라고 했다.


이 원칙이 4주차에서 한 층 더 깊어진다. 라이브러리도 의도적인 빈 곳을 가진다. 모든 키워드가 빠짐없이 채워진 라이브러리는 닫힌계가 된다. 추출할 것이 다 펼쳐진 라이브러리는 해석의 여지가 사라진다. 일정 비율의 빈 곳이 남아 있어야 추출 단계에서 그 빈 곳을 향한 새 해석이 가능하다. 라이브러리의 비편집 영역은 그래서 결함이 아니라 추출의 산소실이다.


이 발상이 자동화 엔진의 설계 원칙과도 직결된다. 엔진은 라이브러리의 모든 칸을 채우려 들지 않는다. 추출에 필요한 만큼만 채우고, 나머지는 비워둔다. 그 비움이 다음 추출의 자유를 만든다. 완성된 라이브러리가 아니라 의도적으로 미완성인 라이브러리가 살아있는 라이브러리이다.


이 장에서 다룰 모든 도구·구조·자동화는 이 경계 안에서 작동한다. 우리가 만드는 것은 작품이 될 수 있는 타임라인이지 작품 그 자체가 아니다. 마지막 결정, 곧 끝을 내고 패키징을 결정하는 일은 사람이 한다. 엔진이 인간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진짜 결정에 집중할 수 있도록 그 앞 단계를 자동화하는 것이다.


[소결]

라이브러리는 세계관(공간 전체), 타임라인은 그 안의 한 궤적, 스토리는 한 인물에게 벌어진 타임라인이다. 세 단어를 섞지 않는다.

라이브러리는 이야기가 아니라 이야기가 발생할 조건이다. 완성도가 높아질수록 늘어나는 것은 추출 가능한 이야기의 수이다.

라이브러리는 IP의 위키화·자료화 작업이며, 창작 IP와 기업 브랜드 양쪽에 같은 인프라로 적용된다.

자동화 엔진의 산출물은 작품이 아니라 타임라인이다. 작가의 자리는 그 뒤에 남는다.

라이브러리는 의도적인 빈 곳을 갖는다. 비편집 영역이 다음 추출의 자유를 만드는 추출의 산소실이다.


엔진의 3층 프롬프트 구조


층의 정체

엔진의 핵심은 에이전트에게 전달되는 프롬프트¹이다. 이 프롬프트가 어떻게 구성되는지가 엔진의 작동 방식을 결정한다. 원칙은 간단하다. 프롬프트는 세 층으로 구성된다.


1층: 라이브러리(내부 키워드). 이 세계의 사실들이다. 메카닉 매트릭스, 주요 키워드의 정의, 등장 캐릭터의 설정, 장소의 지리, 사건의 역사. 옵시디안 볼트에서 관련 키워드 페이지들을 추출하여 프롬프트의 첫 부분에 붙여 넣는다.

2층: 추출 관점(타임라인의 렌즈). 이 편을 어떤 관점으로 추출할지의 지시이다. 11장에서 만든 가족 관점(추출 렌즈) 같은 페이지가 2층에 들어간다. 이 편은 부모-자식이라는 관점으로 타임라인을 추출한다. 주인공과 딸의 관계가 서사의 중심축이어야 한다. 위기 상황에서 두 사람의 관계가 시험받는 장면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 이런 식의 지시가 2층이다.

3층: SKILL 규칙(품질 기준). 이야기가 지켜야 할 형식적·질적 규칙들이다. 신체 앵커가 첫 15줄 안에 등장해야 한다, 판돈이 최소 두 층위로 쌓여야 한다, 엔딩이 감각적 이미지로 닫혀야 한다, 펀 엔진이 최소 두 개 탑재되어야 한다. 3주차 7장에서 다룬 FEWK SKILL 문서가 이 층의 내용이다.


결합의 뼈대

이 세 층이 결합된 프롬프트의 뼈대는 대략 이렇게 생겼다.


[시스템] 당신은 세계관 IP 집필 에이전트이다. 아래 세 층의 데이터를

모두 준수하여 단편을 작성하라.

## 1층: 세계관 라이브러리

[여기에 볼트에서 추출한 관련 키워드 페이지들이 들어간다]

- 메카닉 제약 매트릭스 (복제기, 뇌네 보정 등)

- 주요 캐릭터 페이지 (이 편에 등장할 캐릭터들)

- 장소 페이지 (이 편의 배경)

## 2층: 추출 관점(Extraction Lens)

[여기에 적용할 관점 렌즈 페이지가 들어간다]

- 중심 관점: 부모-자식 관계

- 이 관점이 강조되는 장면: 주인공이 딸을 구하는 위기 상황

- 라이브러리에서 선택적으로 가져올 키워드: [[펀드매니저]], [[딸의생일]]

## 3층: SKILL 규칙

[여기에 SKILL 문서의 해당 섹션이 들어간다]

- 신체 앵커는 첫 15줄 이내에 반드시 등장

- 판돈은 물리적+관계적 최소 2층위

- 엔딩은 감각적 이미지로 착지

- 참조 작가: 코맥 매카시 풍 + 한국 산문 작가 풍

## 과제

위 세 층을 준수하며 단편 1편을 작성하라. 분량은 5,000자 내외.

이 프롬프트를 받은 에이전트는 세 층을 동시에 고려하며 생성한다. 1층의 사실을 위반하지 않고, 2층의 렌즈로 타임라인을 추출하며, 3층의 규칙을 지킨다. 세 가지가 모두 성립할 때만 합격된다.


(* 실제 스킬.md는 이것보다 100배 정도 더 많은 분량이다.)


스토리보드의 자리, 시각 자산도 같은 3층에 묶인다

3층 구조는 글에만 적용되지 않는다. 시각 자산에도 같은 3층이 작동한다.


영화·드라마·웹툰의 사전 단계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스토리보드이다. 영화감독이 콘티 없이 현장에 나가면 배우들이 대사를 알아도 어디를 봐야 할지 모른다. 카메라맨은 화각을 잡지 못하고, 조명팀은 어디를 비춰야 할지 모른다. 스토리보드가 그 콘티이며, 라이브러리·렌즈·SKILL의 시각판이다.


스토리보드의 1층은 라이브러리이다. 곧 이 세계의 시각 사실. 캐릭터의 외형, 장소의 구조, 의상의 결, 도구의 디자인.

스토리보드의 2층은 렌즈이다. 곧 이 장면을 어떤 관점으로 보여줄 것인가. 카메라 앵글, 화각, 인물 배치, 시점 인물.

스토리보드의 3층은 SKILL이다. 곧 시각 품질 기준. 톤앤매너, 색채 팔레트, 조명 방향, 화면 비율, 장르 관습의 시각 신호.

같은 3층이다. 글의 자동화와 시각의 자동화가 같은 구조 위에서 작동한다. 그래서 미래의 자동화 엔진은 한 라이브러리에서 글과 그림과 영상이 동시에 추출될 수 있다. 멀티 유즈라는 새 시대의 산출물 양식이 가능해지는 자리이다(이 장 후반에 다시 다룬다).


어느 층이 빠지면 어떻게 실패하는가

이 구조의 진짜 가치는 어느 층이 빠질 때 어떤 종류의 실패가 발생하는지가 분명하다는 점이다.


1층이 빠지면 세계관 고유의 사실이 없는 일반적 서사가 나온다. 이것은 FEWK 세계의 단편이 아니라 그냥 사이버펑크 단편이다. 독자는 이 세계만의 것이 없다고 느낀다. 차별성이 사라진다.

2층이 빠지면 라이브러리의 사실은 정확하지만 어느 관점으로 뽑혔는지가 불분명한 단편이 나온다. 세계관 팬은 좋아할 수 있지만 그 바깥의 독자는 왜 이걸 읽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느낀다. 같은 라이브러리에서 나올 수 있는 열 개의 이야기 중 하나가 관점 선택 없이 무작위로 추출된 셈이다. 도달 범위가 좁아진다.

3층이 빠지면 내용은 좋은데 형식이 거친 단편이 나온다. 앵커가 없고, 엔딩이 선언문이고, 펀 엔진이 부족하다. 품질의 일관성이 사라져서 독자가 중간에 포기한다.


세 층이 모두 있을 때만 단편은 합격선에 도달한다. 자동화 엔진의 설계란 곧 이 세 층을 매 집필마다 자동으로 결합하는 시스템을 세우는 일이다. 그래서 엔진을 짓는다는 것은 거창한 알고리즘을 짠다는 뜻이 아니다. 세 층이 빠짐없이 결합되도록 하는 절차적 인프라를 갖추는 일이다. 이 인프라가 없으면 매번 작가가 세 층을 머리로 결합해야 하고, 그 결합이 흔들리면 작품 품질이 흔들린다.


[소결]

엔진의 프롬프트는 라이브러리(1층) + 추출 렌즈(2층) + SKILL(3층)의 결합이며, 세 층이 동시에 입력될 때만 합격선의 결과물이 나온다.

같은 3층이 시각 자산(스토리보드)에도 적용되어, 글과 그림이 같은 라이브러리에서 동시에 추출되는 멀티 유즈의 토대가 된다.

어느 층이 빠지든 다른 종류의 실패가 발생한다. 차별성 상실, 도달 범위 협소, 일관성 붕괴.

자동화 엔진을 짓는다는 것은 세 층의 결합을 매 작업마다 자동으로 보장하는 절차적 인프라를 갖추는 일이다.


번역 프로세스, 엔진이 작동하는 가장 명료한 사례

이 3층 구조가 실제로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가장 명료하게 보여주는 사례가 번역이다. 단편 집필이든 콘텐츠 변환이든 같은 원리로 작동하지만, 번역에서는 단계가 한층 또렷이 보인다. 원작이라는 라이브러리가 있고, 시대 이해라는 렌즈가 있고, 번역가의 SKILL이 있다. 세 층이 모두 명시적으로 작동하는 작업이다. 그래서 엔진의 작동 원리를 처음 학습하는 데 번역만 한 사례가 없다. (MEJE 서연각 번역 프로세스 참조)


청크 단위 분해, 18청크의 의미 단위

오만과 편견(Pride and Prejudice)을 한 번 보자. 이 작품을 번역하는 엔진을 우리가 만든다면 어떤 단계로 작동시킬 것인가.


첫 단계는 청크 단위 분해이다. 원작 전체를 한 번에 처리하지 않는다. 메제웍스의 서연각 SKILL(v3.2)² 검증 사례에서 오만과 편견은 18청크로 분할되었다. 1청크가 약 3~5챕터에 해당하며, 한 청크 안에서 서사적 단절점까지가 한 묶음이 된다. AI에게 한 권 분량을 한 번에 던지면 어느 부분도 정밀하게 다루지 못한다. 청크 단위로 자르면 각 단위에 대해 깊이 있는 처리가 가능해지고, 동시에 청크 수가 너무 많아지면 통합 인덱스 관리가 깨진다. 18청크는 그 균형점이다.


이 단계는 단순 분할이 아니다. 어디서 자를 것인가가 의미를 결정한다. 한 장면의 중간에서 자르면 컨텍스트가 끊긴다. 한 챕터 단위로 자르면 단위가 너무 작아 통합 시야가 사라진다. 적정선은 한 서사 묶음이다. 한 인물군이 한 국면을 통과하는 묶음. 18청크라는 수는 오만과 편견 한 권에 대한 검증된 경험치이며, 작품마다 청크 수는 달라진다. 청크 분할 자체가 작품 프로파일링의 첫 산출물이다.


첫 청크의 추출, 실물 사례

추상적 설명만으로는 감이 안 잡힌다. 실물 한 컷을 보자. 오만과 편견 1챕터의 첫 청크는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It is a truth universally acknowledged, that a single man in possession of a good fortune, must be in want of a wife.”
그 다음 베넷 부인이 미스터 빙리가 네더필드 파크를 임대했다는 소식을 미스터 베넷에게 전한다.

이 한 청크에서 엔진이 추출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인물 : 베넷 부인, 미스터 베넷, 미스터 빙리 (간접 등장)

사건 : 네더필드 파크 임대 소식의 전달, 베넷 부인의 결혼 의도 시사

사물 : 네더필드 파크(부동산), 4천 파운드(연 수입)

장소 : 베넷 가의 거실(추정), 네더필드 파크(언급된 곳)


이게 한 청크의 CSV 한 줄이다. 18청크가 누적되면 오만과 편견의 경우 49건의 사건(EVT) 인덱스, 34명의 인물 캐릭터시트, 35종의 설정시트가 산출된다. 작업 시간은 한 권 기준 약 10~23시간이며, 그중 많은 부분이 Phase 5의 설정시트 작성에 들어간다(설정시트는 8종 코어와 장르·시대·모티프별 가변 확장으로 구성). 같은 인물이 여러 청크에 등장할수록 그 인물의 서사적 비중이 자동으로 측정된다. 엘리자베스 베넷은 거의 모든 청크에 등장하므로 비중 1위가 되고, 콜린스 씨는 일부 청크에만 등장하므로 비중이 그보다 낮게 매겨진다. 라이브러리의 객관적 윤곽이 18청크의 누적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사건 리스트에서 시퀀스로, 인물의 변화

추출된 사건 리스트는 시간 순으로 재정렬된다. 그러면 이 작품의 시퀀스가 보인다. 시퀀스는 내부 스토리의 단위이다. 한 시퀀스 안에서 한 인물이 한 변화를 겪는다.


엘리자베스의 시퀀스를 따라가면 이렇게 된다. 첫 무도회에서 다아시에게 거절당함, 다아시에 대한 편견 형성, 위컴의 거짓말 청취, 펨벌리 방문에서 다아시의 진짜 모습 발견, 편견의 해체, 다아시 청혼 수락. 이것이 이 작품의 메인 시퀀스이다.


여기서 한 가지가 두드러진다. 인물은 사건에 따라 변한다. 엘리자베스가 다아시에 대한 편견을 가진 사람에서 그 편견을 풀어낸 사람으로 바뀌는 것은, 그 사이에 일어난 사건들의 결과이다. 사건이 인물을 바꾼다. 이것이 모든 서사의 기본 구조이다. 사건 리스트를 시간 순으로 정리하면 인물의 변화 곡선이 자동으로 드러난다.

이 곡선이 시퀀스이고, 시퀀스가 모이면 내부 스토리가 된다. 시퀀스 위에 인물 리스트가 얹히고, 시퀀스의 무대가 되는 장소가 따라오고, 시퀀스에서 의미를 가진 사물(편지·반지·재산 명세서)이 따라온다. 사건 리스트를 기둥으로 인물·사물·장소가 자동으로 포섭되는 구조가 만들어진다.


시대 이해라는 렌즈

여기까지가 1층 작업이다. 라이브러리가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한국어 오만과 편견이 안 나온다. 한 가지가 더 필요하다. 시대 이해이다.


1810년대 영국의 마차와 2020년대 한국의 지하철은 같은 단어가 아니다. 베넷가의 다섯 딸이 결혼해야 하는 압박은 가부장 사회의 한사상속(限嗣相續)³이라는 법적 제약 위에 서 있다. 이 법은 한국 독자에게 자동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왜 굳이 다섯 딸이 부유한 남자와 결혼해야 하는가라는 의문이 풀리지 않으면 작품 전체의 긴장이 흐물거린다.


그래서 번역 엔진의 2층은 시대 이해 렌즈이다. 이 렌즈는 라이브러리의 모든 항목을 1810년대 영국이라는 맥락 안에서 해석할 수 있게 하는 지침서이다. 의상, 식문화, 계급 구조, 법제, 종교, 결혼 관습, 여성의 사회적 지위. 이 모든 것이 렌즈에 정리되어 있어야 번역이 어휘 교체가 아닌 시대 변환이 된다.


이 렌즈는 라이브러리에 들어가지 않는다. 라이브러리는 오만과 편견 자체에서 추출된 사실의 집합이고, 시대 이해 렌즈는 그 사실을 어떻게 읽을지를 정의하는 외부 문서이다. 라이브러리는 그대로 두고, 다른 시대 이해 렌즈를 갈아 끼우면 같은 작품에서 다른 번역본이 나온다. 예를 들어 오만과 편견을 동시대 한국 30대 여성의 결혼 압박이라는 렌즈로 다시 추출하면, 1810년대 영국이라는 외피만 유지되고 정서적 무게는 한국 독자의 현재로 옮겨진 변환본이 가능하다. 이것이 영국 여성 작가들의 작품을 그대로 번역하는 것과 한국 시대 렌즈로 재추출하는 것의 차이이다.


De Facto Standard, 모호 문장의 단일 해석 확정

라이브러리와 렌즈 사이에 한 단계가 더 있다. SKILL v3.2에서 신설된 Phase 1-E, De Facto Standard⁴라 부르는 단계이다. 자연어 처리 분야의 표준 표기인 Penn Treebank 괄호 표기로 원문 모든 문장의 통사 구조를 한 번 확정해 두는 절차다. 같은 문장이 여러 해석을 가질 수 있을 때(예: “I saw the man with the telescope”) 후행 단계마다 그 모호성을 다시 풀면 작품 전체의 일관성이 깨진다. 1-E에서 한 번 확정된 트리가 Phase 2 키워드 추출, Phase 3 사건 인과, Phase 5 장별 번역 가이드에 모두 같은 해석을 공급한다. 오만과 편견의 첫 문장 It is a truth universally acknowledged… 의 통사 트리가 한 줄의 괄호 표기로 보존되고, 모든 후행 작업자(또는 에이전트)가 그 트리를 참조한다.


점차적 구조 변화, 변환을 자동화하는 마지막 한 발

라이브러리(인물·사건·사물·장소 CSV)와 렌즈(시대 이해 지침서), 그리고 1-E의 통사 트리가 갖춰지면 마지막 한 단계가 남는다. 변환의 자동화이다.


이 단계에서 엔진은 시대 변환된 라이브러리를 새로 만든다. 1810년대 영국의 네더필드 파크는 한국 시대 렌즈로 변환되면 강남의 신축 고급 아파트 단지가 될 수 있다. 마차는 고급 세단이 된다. 한사상속은 상속세 회피용 가족 신탁으로 번역된다. 사건은 그대로다. 거절당하고, 편견을 가지고, 진실을 발견하고, 편견을 풀고, 결합한다. 무대만 바뀐다. 인물의 이름과 직업과 옷차림이 한국화되지만, 인물이 사건에 따라 변하는 곡선은 동일하게 보존된다.


이 변환이 청크 단위로 일어난다. 18청크가 차례로 변환되면서 라이브러리 전체가 점차적으로 새 시대로 옮겨진다. 그리고 결과물은 오만과 편견의 한국형 자유 번역이 된다. 원작의 줄거리·인물 곡선·서사 구조는 보존하면서, 외피와 디테일은 한국 독자의 인접 세계관에 맞춘 변환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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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메제웍스 CEO. 배니월드,BTS월드, 세계관제작자. '현명한NFT투자자' 저자. 본질은 환상문학-RPG-PC-모바일-쇼엔터-시네마틱-게임-문화를 바라보는 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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