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트라월드>와 <사슬에 묶인 프로메테우스>
최근 가상현실을 다루는 디지털 테크놀로지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특히 VR 기술과 메타버스를 중심으로 실제 현실을 가상의 현실로 대체하는 기술이 우리 일상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VR은 말그대로 가상현실을 뜻하는 영어 단어 ‘Virtual Reality’의 줄임말이다. VR 기술은 컴퓨터나 디지털 기기를 통해 가상 세계에서 실제와 같은 경험을 할 수 있도록 돕는다. 메타버스란 가공과 추상을 의미하는 ‘Meta’와 현실 세계를 의미하는 ‘Universe’가 합쳐져 만들어진 신조어이다. 이는 주로 현실세계와 같은 활동을 직접 해낼 수 있는 가상세계 그 자체를 뜻한다.
가상현실을 다루는 기술은 코로나 19의 영향으로 인해 게임업계에 국한되었던 기존의 환경에서 벗어나 웹툰, 영화, 콘서트 등 문화 영역에까지 그 영향력을 뻗치고 있다. 연극계 또한 이러한 호응에 힘입어 가상 현실을 소재와 형식에 접목시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을 반영하는 연극 작품에 익숙해진 우리는 연극과 가상 현실을 통해 어떤 새로운 감각을 경험할 수 있을까. 또 가상 현실을 통해 연극을 접하기 전과 그 후의 모습은 어떻게 달라질까. 가상현실로의 전환이 현실과 영영 멀어지는 결과를 낳게 되지는 않을까. 복잡한 질문을 안은 채 연극 <울트라월드>와 <사슬에 묶인 프로메테우스>를 접하게 되었다.
연극 안에서의 가상현실
연극계는 질병의 확산이라는 특수한 상황의 영향을 받아 비대면 접촉 공연 형식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녹화된 공연을 상연하거나 실시간 스트리밍 서비스를 실시하자는 의견이 가장 먼저 등장했다. 이를 이어 가상의 공간에서 공연의 현실감을 구연하는 VR과 메타버스 공연이 부상하기 시작했다. 이렇듯 연극계에서도 테크놀로지 발전과 대중의 호응에 힘입어 가상현실을 소재로 다루거나 관련된 기술을 접목시키는 시도를 계속하고 있다.
2021년 11월, 가상현실을 소재로 한 연극 <울트라월드>와 VR 기술을 접목시킨 체험형 연극 <사슬에 묶인 프로메테우스>가 각기 다른 공간에서 관객들과 만났다. <울트라월드>는 국립극장 해외 초청작으로, 독일의 폴크스뷔네 극단이 해오름극장에서 한국 관객과 만났다. 공연은 가상현실을 소재로 그 안의 게임인 ‘울트라월드’에 참여한 ‘프랑크’가 계속 반복되는 게임 속 루프에 빠져 겪는 이야기를 담아냈다. <사슬에 묶인 프로메테우스>는 극장이 아닌 문화역 서울 284에서 이루어졌고, 관객이 VR 기기를 쓰고 가상현실 속 이야기에 직접 접속한다. 공연에서는 루게릭병을 앓고 있는 환자가 자신의 몸을 자유로이 통제할 수 없는 상태를 사슬에 묶인 프로메테우스에 비유하며 표현하는 퍼포먼스를 담고 있다.
두 작품은 코로나 상황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는 2021년 하반기, 가상현실이라는 테마를 각자 다른 방식으로 접목시켜 선보였다. <울트라월드>는 이를 소재로 삼아 가상현실이 점령하는 세계를 보여주었고, <사슬에 묶인 프로메테우스>는 관련 테크놀로지를 활용해 관객이 공간을 직접 탐방할 수 있게 돕는 이머시브 형식의 이루어졌다. 비대면 소통에 익숙해지고 극장의 생동감이 가상의 현실로 옮겨져 가고 있는 지금, 이 공연들과 관객들 사이에는 어떠한 만남이 성사되었을까.
연극과 기술, 환상을 통해 현실을 보다.
연극과 VR, 메타버스 기술 모두 환상과 가상의 세계를 통해 현실을 바라보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진다. 두 공연 또한 이러한 점을 적극적으로 수용, 활용하여 연극 안의 가상 세계를 만들어내었고 이를 통해 다시 현실을 반추한다.
<울트라월드> 속 세계는 게임 속 세계, 즉 만들어진 가상의 세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안의 설정과 환경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그리고 머지 않아 올 미래의 모습과 아주 흡사하다. 캐릭터이자 게임 속 주인공 ‘프랑크’의 아내와 딸로 등장하는 ‘에이프릴 1’과 ‘에이프릴 2’는 계속해서 죽음을 맞이한다. 이들은 심화된 사막화로 인해 마실 물이 부족해진 근미래적 배경의 영향 아래 반복적인 죽음을 겪는다. 게임을 조종하는 연극 밖의 인물이자 게임 속 인물인 프랑크는 물을 구하지 못한 상황, 물을 구해도 그들을 살리지 못하는 상황을 겪으며 가족의 죽음을 지켜볼 수 밖에 없다. 프랑크는 게임이 진행되며 다양한 지식을 얻어 자의식을 가지고 행동하게 된다. 그는 반복되는 상황 속에서 스스로 선택을 내릴 수 있는 의지를 가지게 되지만, 전체적인 결과를 바꿀 수 없다는 무력감에 빠지기도 한다.
<사슬에 묶인 프로메테우스> 속 주인공은 루게릭병을 앓는 자신의 상황과 제우스라는 절대 권력에 의해 사슬에 묶이게 된 프로메테우스의 처지를 비교하며 내레이터로서 연극을 이끌어간다. 그는 전동 휠체어에 앉아 자신의 삶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낸다. 그는 기술과 나, 신화 속 인물과 나 사이의 연결점에 대해 상기하며 이에 대한 감상을 관객들에게 전달한다. 이때 관객들은 따로 설치된 스피커를 통해 AI의 목소리로 발화되는 그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이와 동시에 주인공이 전개하는 이야기와 관련된 영상 이미지가 VR 기기를 통해 상연된다.
이 작품은 VR 체험과 스크리닝이라는 두 파트로 나누어져 진행되었다. VR 기기를 통해 영상 이미지를 보며 서울역이라는 공간을 탐방했던 관객들은 이제 기기를 벗고 파트 2로 넘어가게 된다. 관객은 사방이 막힌 조그마한 극장 공간에서 실제 주인공이 등장해 스스로의 목소리로 발화하는 장면을 담은 영상을 보게 된다. 관객은 이렇게 두 개로 나뉜 파트를 체험하며, AI 기계음으로 들었던 이야기와 실제 주인공의 발화를 비교하고 가상의 시각 이미지와 주인공 남성의 이미지를 비교하게 된다. 이러한 구성은 과거와 현재, 가상과 현실, 부재와 현존을 연결하며, 가상의 세계를 현실 안으로 끌어오는 경험을 전달한다.
두 작품은 모두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세계와 존재를 만들어 냈다. 그리고 관객을 그 안으로 초대하여 로그인하게 만들었다. 가상과 환상의 세계를 무대 위에 올려냈던 연극은 기술을 통해 현실과 더욱 흡사한 가상의 세계를 구현해낸다. 이 가상 세계는 말 그대로 ‘가상’이지만 기술을 통해 현실처럼 정교하게 구성되었다. 현실을 반영한 가상을 무대 위에 올리는 연극과, 현실과 똑 닮은 가상 세계를 구현해내는 기술이 만난 것이다. 연극과 가상현실 테크놀로지의 만남은 현실을 가상으로 만들어내며 이 가상을 통해 또 다시 현실을 돌아본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이를 통해 관객들이 살아가고 있는 현실의 모습을 다시 한번 되돌아 볼 수 있도록 이끈다.
실제와 가상의 경계
이렇듯 다른 듯 닮은 연극과 가상현실 테크놀로지는 현실과 가상을 횡단하며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 이렇게 예술을 통해 현실과 가상을 넘나드는 경험은 관객들에게 ‘실제’와 ‘가상’의 정의에 대해 질문한다. 우리가 사는 실제와 우리가 보고 있는 가상 사이의 경계는 어떻게 지어진 것인지, 우리는 이것을 완전히 구분해낼 수 있는지 질문을 던진다. 현실과 너무나 닮은 가상의 세계, 그리고 가상의 세계에 몰입하고 영향을 받는 현실이라는 지점에서 관객들은 점점 그 구분에 대한 명확한 정의를 내릴 수 없게 될 것이다. 또한 현재 시청각적인 이미지로 제한되어 있는 가상현실 테크놀로지가 발전하여 눈과 귀 뿐만 아니라 다른 감각 기관에도 그 장치가 연결된다고 상상해보자. 그렇게 된다면 미래의 우리는 그 경계에 대해 더더욱 명확히 구분 지을 수 없게 될 것이다.
두 공연은 모두 실제와 가상의 경계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이에 대한 고찰을 공통 주제로 삼고 있다. <울트라월드>의 프랑크는 연극 밖에서 게임을 조종하는 프랑크이기도 하며, 연극 안 게임 캐릭터인 프랑크인 동시에, 그 인물을 연기하는 배우 ‘프랑크 빌렌스(Frank Willens)’를 지칭한다. 그는 전지적인 신과 같은 존재이자 이 게임 세계를 만들어낸 ‘M’의 지시를 받아 게임의 유일한 주인공으로서 퀘스트를 수행해간다. 주어진 역할만을 수행하는 다른 캐릭터와는 달리 프랑크는 시간이 지나며 자의식을 가지게 된다. 현실 속 의지를 가진 게임 플레이어와 배우 프랑크와 유사한 모습을 보이며 자신의 선택을 통해 게임의 이야기를 개척해 나간다. 그의 자의식은 반복되는 게임 속 상황과 퀘스트를 겪으며 더욱 견고해진다. 이러한 모습은 캐릭터로서의 프랑크 뿐만 아니라 이를 연기하는 배우 프랑크의 의지로까지 확장되는 듯 보인다. 이러한 구분 없음은 현실과 가상을 연결하며 그 사이의 명확한 경계를 흐리는 역할을 해냈다.
게임 캐릭터 중 하나인 카산드라는 계속해서 “프랑크가 이 고리를 끊어야 해”라는 대사를 내뱉는다. 이 대사에서 어렴풋이 알 수 있듯, 가상에 침투해 그 지루한 고리를 끊어낼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은 가상과 현실 사이에 놓여 그 경계를 흐리는 현실-가상의 프랑크이다. 공연은 극 속 현실과 극 속 가상, 그리고 극장 안에 현실로 존재하는 프랑크를 하나로 연결해 관객에게 현실과 가상의 구분이 모호해지는 경험을 전달한다. 이로써 현실과 가상을 나누는 기준은 무엇인지, 그 안의 경계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인지 질문을 던진다. 이를 통해 현실의 자유가 정말로 존재하는 것인지, 현실과 가상을 모두 통제하려는 욕망이 유의미한 것인지 등 인간 존재에 대한 철학적 질문으로까지 사유의 영역을 확장시킨다.
<사슬에 묶인 프로메테우스> 또한 실제와 가상의 구분에 대해 질문한다. 하지만 작품은 나아가 부재와 현존이라는 지점에서 가상의 신체와 실제 몸 사이의 차이점을 명확히 보여준다. 작품은 이를 통해 장애를 가진 몸이 현실의 구조와 시스템 안에서 얼마나 억압되고 있는지 드러낸다.
앞서 말했듯 이 작품의 관객은 VR과 스크리닝으로 이루어진 두 개의 파트를 동시에 경험한다. 관객은 AI 내레이터와 실제 주인공의 발화, 가상의 이미지와 현실의 이미지를 연이어 경험하며 현실과 가상을 잇는 연결 지점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동시에 둘 사이를 가르는 경계에 대해 궁금증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사슬에 묶인 프로메테우스>는 우리 신체의 현존이라는 관점에서 <울트라월드>와는 조금은 다른 시각을 보인다.
파트 1인 VR 체험의 마지막 장면은 휠체어를 벗어던지고 일어나는 상상을 하는 주인공이 자신의 생각을 인공지능의 목소리를 빌려 설명하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관객은 이러한 상상을 들으며 우주를 자유롭게 유영하는 행성의 이미지를 동시에 보게 된다. 이를 통해 휠체어라는 보조 기계이자 구속 기계를 벗어던진 채 자유롭게 행동하는 인물의 모습을 떠올리며 체험을 마무리 짓는다. 하지만 뒤이어 이어진 스크리닝에서는 똑같은 이야기가 발화되고 있지만 화면 속 주인공이 여전히 휠체어에 앉아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이 경험을 통해 가상과 현실, 우리의 상상과 실제 주인공의 신체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작품은 같은 인물과 똑같은 이야기를 통해 가상과 실제를 연결한다. 하지만 주인공의 신체를 통해 둘 사이의 간격을 드러내며 현실 속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신체와 현존이 어떻게 억압되고 있는지 깨닫게 한다.
기술과 연극의 만남
두 공연은 모두 VR, 메타버스 등의 최신 기술을 연극이라는 분야에 적용하고 있다. 극장이라는 공간과 극장 아닌 공간에서 어떤 기술을 활용해 연극을 만들어 냈는지, 우리가 실제 살고 있는 삶을 가상 현실에 어떠한 방식으로 녹여내고 확장시켰는지 상상하며 공연을 보는 것은 기존의 관객들에게 색다른 경험을 선사했을 것이다.
<울트라월드>는 무한하게 반복되는 게임의 세계를 영상 시뮬레이션으로 연출했다. 울트라월드의 무대 전체를 감싸고 있는 LED 화면에서는 계속해서 게임 배경과 같은 형형색색의 그래픽이 영사된다. 무대 3면을 꽉 채운 LED 화면과 이를 통해 영사되는 가상 현실 그래픽은 관객들이 게임 ‘울트라 월드’에 로그인할 수 있도록 견인하는 역할을 맡는다. 이러한 LED에 둘러싸인 무대 위에는 게임의 콘솔과 같은 형태로 큰 사각형의 액자틀이 놓여져 있다. 액자틀에도 게임 영상이 영사되며, 이 틀은 그 안에서 행동하는 인물들이 게임 속 인물들임을 계속해서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무대 구조는 마치 관객이 게임을 직접 조종하는 컨트롤러가 된 것 같은 인상을 느끼게 하며 연극 속 세계에 관객을 초대한다. 방호복과 온몸을 가리는 근미래적 의상을 입고 몸짓이나 대화의 발화에 있어 기계적이고 딱딱한 모습을 보이는 배우들의 모습 또한 가상 게임 속 경험을 생생하게 만든다.
<사슬에 묶인 프로메테우스>는 한 타임에 12명이라는 소규모의 관객 집단을 모집하여 극장이 아닌 옛 서울역사 공간에서 공연되었다. 관객은 역사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나오는 인공지능의 목소리를 통해 주인공의 이야기를 듣고, 동시에 VR 기기를 통해 그 이야기를 시각 그래픽으로 풀어낸 이미지들을 보게 된다. 이러한 이미지들은 관객의 움직임이나 터치에 따라 계속해서 변화하며 이머시브적인 효과를 만들어낸다. 관객은 극장 아닌 공간에서 몸을 움직이고 직접 손을 뻗으며 공연에 직접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 같은 감각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지점에서 작품은 테크놀로지를 통해 관객과 소통하는 연극이자 관객의 직접적인 신체 표현으로부터 의미를 얻게 되는 창발적인 공연의 목표를 이룬다.
다시, 대면으로의 가능성
두 공연 모두 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비대면 상황에서 관객과 공연이 어떻게 만날 수 있을지 모색하는 작품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둘 모두 ‘대면으로의 가능성’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 또 다른 공통점이라고 할 수 있다. 가상 현실의 편리성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지금 여기서 이루어지는 관객들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공연이 완성되는 지점을 가지기 때문이다.
<울트라월드> 속 프랑크는 게임 캐릭터이지만 주변 인물들의 죽음을 계속해서 겪으며 인간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깨닫는다. 인간이 가진 유한성에 대해 인식하게 된 그는 게임 안의 자신도 언젠가는 소멸할 수밖에 없음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프랑크는 ‘지금 여기’, ‘현재’에 존재하는 순간에 대해 긍정하게 된다. 작품의 마지막 장면에서 모든 무대 구조와 LED 장치가 제거된다. 이와 맞춰 옷을 벗어 던진 프랑크는 무대 뒤를 향해 걸어가며 지금 여기 존재하는 것의 중요함을 역설한다. 무대 뒤로 걸어가는 원초적 몸의 프랑크는 가상의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길을 선택한 인간처럼 묘사된다. 이러한 프랑크의 성격은 게임 속 사람들과 접촉하며 얻게 된 것이며, 그가 자의식을 가지게 된 계기에는 주변 사람들의 죽음과 그들과의 교류가 큰 영향을 미쳤다. 지금 여기를 긍정하며 공동의 메시지를 전하는 작품의 궁극적 주제는 역설적으로 대면의 가능성을 말하고 있는 듯 하다.
<사슬에 묶인 프로메테우스>에서 또한 대면으로의 가능성이 계속해서 상기된다. 주인공의 발화에서 아내와의 접촉과 맞닿음이 대사와 묘사로 반복되어 등장한다. 이러한 묘사는 피부와 피부를 통해 맞닿는 온기와 감촉, 둘 사이의 호흡 등 여러 방식으로 자세히 드러난다. 관객은 스크리닝의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의 얼굴이 클로즈업 되는 영상을 보게 된다. 이러한 클로즈업과 함께 발화되는 접촉과 대면에 관한 이야기는 관객들에게 맞닿는 것의 중요함과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접촉을 통한 위로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울트라월드>와 <사슬에 묶인 프로메테우스>는 현재 각광받고 있는 가상 현실과 이와 관련한 디지털 테크놀로지를 접목시켜 만들어진 공연이다. 이들은 비대면 소통과 예술이 개발되고 있는 지금 이 시점, 관객에게 가상의 현실에 대한 감각을 전달해준다. 하지만 이들은 또한 그 가상의 세계를 다시 현실로 이끌어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되돌아보게 만든다. 그리고 대면하는 예술인 연극에서 나올 수 있는 가능성과 잠재력에 대해 긍정하며 기술의 시대에 다시, 대면으로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