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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ery Dec 23. 2021

공명하는 밑바닥의 소리를 듣는다는 것

연극 <밑바닥에서>

(사진: 매일 경제)


 막심 고리끼의 「밑바닥에서」를 무대화한 작업들은 연극과 뮤지컬을 오가며 다양하게 이뤄졌다. 이전의 공연들과 다르게 ‘지금, 여기서’ 할 수 있는 <밑바닥에서>는 무엇이 달라져야 할까. 또 지금을 사는 우리는 긴 시간과 공간을 넘어온 작품과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 탄생으로부터 100년도 더 지난 작품과 만나 교감하기 위해서는 시간을 아우르는 무엇인가가 필요하다. 하지만 고전이 전달하는 특정한 이미지나 분위기에 고립되지 않고, 새로우면서 현대적인 방식으로 보편성을 끌고 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현재 우리가 <밑바닥에서>를 봐야하는 이유를 공연이 잘 설명할 수 있을지 궁금해 하며 극장에 들어섰다.  

 코로나19로 인해 우리 사회 뒤편에 숨어있던 빈부 격차가 여실히 드러나고, 온갖 인간 군상의 밑바닥을 보고 있는 지금, 극단 백수광부는 진짜 ‘밑바닥 인생’을 무대 위에 올려 신음하는 인간들의 모습을 그려냈다. 고통스럽고 구질구질하지만 그래도 삶을 이어가는 이들의 신음소리는 무대를 넘어 그들을 지켜보는 관객들에게 닿는다. 


위태로운 사람들이 살아가는 터전

 <밑바닥에서>에서는 삶을 이어가는 것조차 위태로운 사람들이 등장한다. 한 곳에 정착할 수 없어 떠돌아다니는 이들은 지저분한 합숙 여관에 모여 몸을 부대끼며 살아간다. 숨이 꺼져가는 아내를 돌보는 남자, 도둑, 도박꾼, 몰락한 남작 등 아득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평소와 같이 비틀대는 삶을 살던 이들에게 ‘루까’라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노인이 나타난다. 그는 죽어가는 안나에게 현재의 고통이 결국에는 끝이 날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내일은 오늘보다 나아질 수 있음을 일깨운다. 하지만 그는 꿈의 나라를 찾아 떠났지만 결국에는 그것을 찾지 못한 사람의 이야기를 한 후 홀연히 사라진다. 남겨진 여관 사람들은 원래의 삶으로 돌아가려 애쓴다.

 보기만 해도 힘든 삶의 모습을 묘사하는 공연은 인물들이 생활하는 공간을 통해 그들 인생에 드리운 그늘과 위태로움을 드러내고자 시도했다. 특히 이들이 부대끼고 마찰을 일으키는 여관 공간을 구축하는 데 많은 신경을 쏟았다. 무대를 사선으로 가로지르는 철골 구조는 무대 위 설치된 경사진 계단과 맞물려 그들이 서있는 곳의 불안정함을 드러낸다. 또한 그들 삶의 공간을 둘러싸고 있는 회색빛의 높은 벽과 낡아 골조가 다 드러난 침대는 이들이 사는 열악한 여관의 공간의 분위기를 만드는 데 일조했다. 

 대극장을 활용한 공연이다 보니 공간을 넓게 사용하고 여백을 통해 공간의 크기 밸런스를 맞추려는 시도가 이뤄진 듯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좁고 다 무너져가는 여관 방 안에서 서로의 얼굴을 매일 마주하며 충돌하는 인물들의 모습을 구축하는데 적절한 무대였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생겼다. 여관 공간이 주는 답답함과 인물들 사이의 엉켜있는 관계를 피부로 느끼고 싶다는 기대를 했기에 더욱 그러한 생각을 했을 수도 있다. 

 여관 공간뿐만 아니라 그 바깥의 공간도 뒤쪽이 철문으로 막혀있도록 배치했다. 이 철문은 나중에 나스쨔가 울부짖으며 두드리기도 하고, 마지막에 자살한 배우의 모습을 가로막는 기능을 수행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또한 폐쇄적인 이미지를 조성하거나 안과 밖의 경계로서 작용했는지에 대해서는 확신이 생기지 않는다. 이렇듯 좁고 지저분한 여관 안과, ‘밑바닥 인생’들의 삶의 터전으로서의 야외 공간에 대한 이미지가 생생하게 전달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입체성을 잃은 캐릭터

 공연에는 알코올 중독자, 도박꾼, 도둑, 창녀, 숨을 잃어가는 여자와 그 남편 등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그들 모두가 생생히 무대 위에 살아있어야 ‘밑바닥에서’ 사는 여러 인간 군상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죽어가고 있지만 조금만 더 살고 싶다고 외치는 안나와 그 고통을 가까이서 지켜보며 생기를 잃어가는 끌레쉬, 뻬펠을 사랑해 동생에게 질투를 느끼고 욕망을 드러내는 바실리사 등이 전달하는 고통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안나의 반복되는 대사나 떨리는 목소리, 끌레쉬가 열쇠를 깎는 소리, 바실리사의 거침 없는 행동들은 이를 더욱 생생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손에 꼽을 수 없이 많은 인물을 등장하다 보니 모든 캐릭터의 입체성을 느끼지는 못했다. 특히 창녀 캐릭터의 나스쨔와 아직 소년의 경계에 서 있는 듯한 알료슈까 등은 충분히 그 매력을 전달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입체적 면모가 돋보이지 않았다. 안나를 조롱하는 남성 인물들의 대사가 수위 조절없이 등장하는 상황에서, 안나는 철문을 두드리며 자신을 조롱하는 남성들에게 분노하다 퇴장한다. 무대 위에는 안나를 조롱하던 남성 인물들이 남아 먹고 마시며 춤을 춘다. 젊은 알료슈까 또한 젠더의 경계를 넘나드는 것 같은 모습을 보이며 독특한 캐릭터성을 드러낼 것처럼 행동하지만 그러한 면모는 결국 부각되지 않는다. 이들 캐릭터의 설정과 입체성이 살아 있었다면 충분히 관객들에게 시의성과 동시대성을 전달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공연에서 나스쨔와 알료슈까는 중요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입체적 인물이 아닌 ‘철문을 치며 소리치는 창녀’, ‘유쾌한 젊은이’로 이미지화 되어 전달된 것 같은 인상을 전달했다. 이들 캐릭터의 입체적 면모가 구축되어 무대 위에서 존재감을 얻을 수 있었다면, 다양한 차별이 존재하는 우리 사회 관객들과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밑바닥에서>

 여러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밑바닥에서>는 코로나19로 인해 인간성에 대한 희망을 잃어가는 관객들에게 함께 고통을 공유해 보자고 말을 거는 작품이다. 서로 부딪히고 충돌하는 일상을 살아가는 ‘밑바닥 인생’들의 모습을 통해 고통스럽고 구질구질한 삶 안의 절규를 같이 들어보자고 말한다. 모두가 내려다 보는 밑바닥의 생일지라도 이를 계속해 지속해 나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일깨운다. 또 그들과 맞먹는 고통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 또한 우리 사회 어딘가에 존재함을 상기시킨다. 

 더러운 여관방 이라는 공간에 모인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우리가 외면했던 삶의 어두운 이면과 맞닿아 있다. 그 삶은 그들의 것일 뿐만 아니라 항상 진창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는 그들과 우리의 모습’은 기대하지 않았던 위로를 전달해준다.       


 <밑바닥에서>가 100년의 시간을 넘어 지금의 관객들과 만나는 과정에서 무대 이미지나 공간의 활용, 평면적인 캐릭터 구축 등에 있어 아쉬움을 남긴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질병의 창궐을 포함한 여러 사회적 문제들로 인해 존엄성과 인간다움의 파괴를 경험하고 있는 현재의 관객들에게 ‘살아간다는 것’ 자체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는 공연임에는 틀림 없다. 또한 공연은 위태로운 상황에서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의 신음을 함께 들어보자고 말을 걸며 예상하지 못한 위로와 힘을 전달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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