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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ery Dec 23. 2021

비극 너머의 소외를 마주하다

연극 <달콤한 노래>

(사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평범하고 행복해 보이는 가정의 두 아이가 죽었다. 범인은 아이들을 돌봐주던 보모였다. 연극 <달콤한 노래>가 다루고 있는 사건을 간단히 요약하면 이런 것이다. 한 가정의 비극적인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듯 보이는 연극은 모로코 출신 프랑스 작가 레일라 슬리마니의 동명의 소설을 무대화했다. 이 작품은 뉴욕에서 보모가 자신이 돌보던 두 아이를 살해한 사건을 가져와 살을 덧붙였다. 소설은 넉넉한 급여를 받고 가족들과 함께 휴가를 떠나기도 하며 충분한 대우를 받았다고 알려진 이민자 출신 보모가 아이들을 살해한 사건, 그리하여 행복한 가족의 일상이 깨졌다고만 알려진 사건을 가져와 명백한 가해자로 보이는 보모의 일상을 보여준다. 이 보모는 왜 아이를 죽였을까, 왜 죽여야만 했을까. 

 공연은 이러한 질문을 가지고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한 채 소외되어야 했던 사람의 일상을 재구성한다. 그리하여 피해자와 가해자라는 구도에서 보이지 않았던 내밀한 이야기를 풀어가기 시작한다. 공연을 보기 전 원작을 읽지 않았던 상태였다. 그래서 너무 끔찍해 들여다보기 힘든 소재를 다룬 소설을 무대화하기로 결정한 이유에 대해 의문을 가졌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소재의 자극성에 중심을 두기 보다 눈에 보이지 않았던 사람들의 일상에 초점을 맞춘 공연의 의도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작품은 평소 우리 삶 안에서 중요한 일을 수행하지만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사람의 삶을 들여다보는 기회를 전달한다. 


좁혀지지 않는 거리

 <달콤한 노래>의 공간은 구체적이라기보다 간소하다. 가정에서 쓰이는 간단한 가구와 소품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세로로 길게 이어진 무대 위 양 끝으로 폴, 미리암 부부의 집과 루이즈의 방을 대비해 놓은 것이 눈에 띈다. 부부의 집에는 안락한 소파가 있고, 거대한 화분 주변으로는 단란한 가정의 사진이 담긴 액자들과 가정 용품이 배치되어 있다. 엄마와 아빠, 두 명의 아이들. 행복해 보이는 가족들이 사는 이 집은 경제적으로 넉넉하고 사회적으로 여유로운 사람들이 꾸린 공간이다. 이에 반해 어두운 벽을 마주하고 검은색 박스 몇 개와 작은 의자 하나, 낡은 신발 몇 켤레로만 구성된 루이즈의 공간은 어떤 온기나 활기를 찾아볼 수 없다. 루이즈의 방은 부부를 위해 일하는 보모라는 것 이외의 어떤 특별한 정체성도 부여되지 못한 그녀의 상황을 그대로 반영하는 듯 칙칙하고 특색 없다.  

 섞일 수 없을 것 같아 보이던 가족과 루이즈는 두 아이를 낳은 미리암이 변호사 일을 다시 시작하게 되면서 한 공간을 공유하게 된다. 루이즈는 부부의 요구를 충족시키고 그 이상의 일까지 해내며 완벽한 보모로 그들의 일상에 들어가게 된다. 루이즈는 부부보다 아이들에 대해 더 잘 알기도 하고, 시키지 않은 집안일까지 말끔하게 해내며 신뢰를 얻는다. 부부는 자신들의 휴가에 루이즈와 그 딸을 데리고 가거나 친구들을 소개해 함께 파티를 하기도 하는 등 자신의 일상에 루이즈를 받아들이려고 한다. 하지만 부부는 점점 고용주와 고용인의 선을 넘고 자신들이 소유하는 공간인 집 안의 질서를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는 루이즈에게 거리를 두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그들 가정에 소속될 수 있을 것 같았던 루이즈는 그 간극을 좁히지 못한 채 또다시 소외된다.  

 폴과 미리암 부부가 루이즈에게 거리를 두려고 했던 이유 중 하나는 루이즈가 그들 공간의 질서를 손에 쥐고 부부 고유의 공간을 침범하려고 했다는 것이었다. 가족이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 해야 하는 일들을 모두 수행한 루이즈는 자신이 지키기 위해 노력했던 고용주 부부의 말끔하고 행복한 일상에는 결국 소속되지 못한다. 이렇듯 어둡고 좁은 방이라는 자신의 공간에서 벗어나 따뜻하고 행복해 보이는 가족들에게 속하려 했던 루이즈는 두 공간 사이의 간극을 좁히지 못하고 점점 멀어진다. 가족들이 길거리의 루이즈를 보게 되는 장면에서, 가족들은 차에 앉아 자신들에게만 비치는 조명을 받은 채 어둠 속의 루이즈를 발견한다. 이들은 그녀가 어디로 가는지, 자신들의 집 밖에서는 어떻게 살아가는지 가늠하지 못한 채 무심하게 지나쳐 간다.    


일상의 목격자가 되다  

 이번 공연에서는 배우들의 연기와 관련된 요소들이 눈에 띄었다. 성인 남성 배우가 아이를 연기하고, 부부를 맡은 배우들이 루이즈의 지인이나 주변 인물을 연기하는 등 루이즈를 제외한 배역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았다는 것이 특징적이었다. 부부의 자녀 역할을 맡은 남성 배우들은 루이즈의 내면과 그녀에 영향을 미치는 억압적인 에너지를 드러내기 충분했다. 어린 아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루이즈가 압박과 버거움을 느끼는 존재라는 점에서, 성인 남성 배우가 루이즈의 손을 잡고 이끌거나 소리를 지르는 장면은 그것을 가까이에서 보고 있는 것조차도 버거울 정도로 큰 에너지를 발산하였다.

 또한 루이즈를 제외한 나머지 네 명의 배우가 여러 가지 역할을 맡아 연기했다. 그들은 바로 다음 장면에 완전히 다른 옷을 입고 다른 인물로 등장하고 퇴장한다. 배우들은 바로 앞의 장면이 끝나자마자 관객석 바로 앞에 있는 의자에 앉아 다른 인물로서 무대 위에 설 채비를 한다. 무대를 가운데 두고 관객석이 양쪽에 배치되어 있는 덕에, 관객들은 이들이 등퇴장하고 준비하는 과정을 여과 없이 지켜볼 수 있었다. <달콤한 노래>의 관객은 배우들의 등퇴장 사이에 벌어지는 일을 알지 못한 채 이야기에만 몰입하는 것이 아니다. 공연은 무대와 맞은편의 관객석, 준비를 하는 배우까지 한 시야에서 볼 수 있도록 하여 관객들을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비극적인 일상의 목격자로 소환했다. 

 또한 대부분의 공연에서는 발화하지 않는 인물의 속마음이나 행동도 배우들의 입을 통해 전달된다. 배우들은 정해진 대사, 독백이나 대화뿐만 아니라 머릿속 생각이나 속내를 관객들에게 고스란히 전달한다. 이로써 관객들은 이들의 삶과 그 안의 내밀한 것을 연극적인 요소로 받아들이게 된다. 또한 이들과 거리를 둔 채 그 일상을 속속들이 목격할 수 있게 된다. 이렇듯 <달콤한 노래>는 무대 바깥과 관객석까지 시야를 확장함과 동시에, 정제되고 제한된 대사가 아닌 마구잡이로 떠오르는 생각까지 배우들을 통해 발화하여 전달한다. 이러한 특징은 관객이 연극의 서사에 몰입하고 그 안의 인물에 이입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일상 자체를 관찰할 수 있도록 이끈다. 이를 통해 관객들을 가시화되지 않고 소외된 인물의 삶이 빚어내는 사건 속 목격자로 불러내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사회와 일상에 분명히 존재하지만 조명 받지 못했고, 비극적 사건이라는 이면에 숨겨져 있었던 어떤 삶의 모습을 마주할 수 있게 된다. 


 평범하고 행복해 보이는 가정의 두 아이가 죽었다. 범인은 아이들을 돌봐주던 보모였다. 앞서 언급했던 <달콤한 노래> 속 사건의 요약이다. 공연은 모티브 사건을 가져와 보모가 아이를 죽이게 되는 과정을 덤덤히 나열하고 축적해 나간다. 하지만 연극은 루이즈가 아이들을 죽이는 장면을 묘사하거나 특정한 계기를 언급하지 않는다.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시간 순서조차 뒤죽박죽인 그들 일상의 스케치이다. 공연이 끝난 후 머릿속에 남는 것은 끔찍하고 비극적인 사건의 이미지가 아니다. 우리에게 남는 것은 루이즈가 겪은 일상의 파편과 평범한 일상에서 소외되고 혼자 남겨진 사람이 비극적인 결정을 하기까지의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루이즈가 왜, 어떻게 아이들을 죽였는지는 중요한 질문이 아니게 된다. 

 쉽게 따라잡을 수 없는 거리감으로 인해 외로움을 느끼는 인물을 그저 지켜보는 것만이 관객석에 앉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공연을 보고 난 후에도 루이즈가 왜 아이들을 죽이는 결정을 내렸는지 이해나 공감이 되지 않을 수 있다. 우리는 한 사람의 모든 것을 본 것이 아니라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일상들을 목격한 것이기 때문이다. 공연은 이로써 어떤 가치 판단이나 어떤 인물로의 몰입을 유도하기보다 어떤 사건에서 알려진 특정한 구도를 없애고 그들에게 벌어지는 일상의 조각을 지켜볼 수 있도록 한다. 그리하여 평범하고 안전한 일상에 소속하고 싶었지만 그것에 실패하고 소외되는 한 사람의 일상을 거리를 두고 목격하게 만든다. 공연이 어떤 특정한 메시지나 당부를 전하는 것이 아니기에 이 일상을 보고 드는 생각은 각각이 다를 것이다. 자동차를 타고 가다 루이즈를 목격하고 그를 지나쳐가는 가족들처럼 그에 대해 모든 것을 알지 못한 우리들에게 남는 것은 그녀 일상의 잔상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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