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하세요.

모든 것은 자신을 위한 일입니다.

by 조부딱




“당신을 용서하길 바랍니다.”



7살 때인가로 기억한다. 나는 어린이집은 다니지 않고 작은 미술 학원을 다녔었다. 나는 사회성이 굉장히 떨어지는 아이였고, 옆에는 항상 쌍둥이 동생이 있었기에 딱히 친구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쌍둥이라는 이유만으로 친구들에게 관심을 받았고 주목받는 그림을 자주 그렸기에 선생님의 관심을 자주 받았다. 그래서였을까? 유난히도 괴롭히는 친구가 많았던 것 같다. 하루는 어떤 친구가 나의 가방을 계속 발로 찼었다. 기억상으로 그 친구는 평소에도 나를 괴롭히는 무리 중 한 명이었다. 참지 못한 나의 주먹은 어느샌가 그 친구의 얼굴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그 친구는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 코피와 함께 눈물을 쏟아냈다. 학원의 원장은 나를 끌어내어 모두가 보는 앞에서 벌을 주었다. 용서할 수 없었던 내가 저지른 결과물은 용서받지 못하는 결과물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아마 내 기억에 남아있는 첫 번째 수치스러움이라 추측한다. 수업이 모두 끝난 후에도 나는 벌을 서야만 했고 모두가 돌아간 뒤에 집에 돌아갈 기회가 주어졌다. 죄책감과 분노가 뒤섞인 채 “어떻게 해야 하지?” 나약한 마음이 나를 쪼아댔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다음날부터는 그 친구는 나하고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나는 우월감과 미묘한 기류를 동시에 느꼈다.


미묘한 기류는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잘못한 것 같은 기분. 아직도 나는 잊혀지지 않는 그날을 때때로 떠올리곤 한다. 때려서 미안하다고 사과 한마디 전하지 못했던 지난날들은 어떤 의미도 가지지 못한 채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못한다. 그 친구의 이름도, 얼굴도, 그 어떤 것도 기억나지 않지만 그날의 수치심만이 내 안에 남아 유유히 떠오른다. 잊히지 않은 채 영원히 찾지 못할 의미를 내 안에서 찾아 헤맨다.


누군가를 용서해야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다름 아닌 내가 고통받지 않기 위해서다. 눈을 부릅 뜨고 복수할 때까지 잊지 않겠다고 칼자루를 움켜지는 행위는 온몸이 긁히고 멍들고 상처 입는 과정이 포함된 동의 계약서를 읽지 않고 서명하는 것과 같다. 계속해서 남아 있는 기억들은 언제고 불현듯 나타나 내가 나로서 살아가는 것을,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필사적으로 막아선다. 죄책감과 수치심으로 흉진 상처의 기억은 계속해서 나를 괴롭힌다.


아직도 작은 기억 파편에 고통받는 나를 위해서라도 지금부터 우리가 용서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기술해볼까 한다.





용서는 주관적이다.


“지은 죄나 잘못한 일에 대하여 꾸짖거나 벌하지 아니하고 덮어 줌.” 네이버에 검색하면 나오는 용서의 뜻이다. 용서란 무엇일까? 누구나 살아가면서 누군가에게 상처 하나쯤은 주고, 받는다. 대부분의 사소한 다툼은 서로 간 합의하에 좋게 끝나지만 작은 균열들이 모여 와르르 무너지기라도 하는 경우에는 돌아갈 수 없는 관계가 되기도 한다. 이 뿐일까? 사소한 다툼 정도가 아니라 일방적인 폭행은 그 사람, 그 가족에겐 지울 수 없는 상흔을 남긴다. 감정은 격앙되고 누군가를 죽일 수 있을 정도의 증오를 만들어낸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받는 것은 일상에서 벌어지는 당연한 현상이지만, 당연하지 않은 일이기도 하다. 얼마 전 조두순이 출소했다. 차마 입 밖으로 꺼내기도 힘든 죄를 지은 가해자는 영원히 피해자들의 가슴에 남아 있다. 지워지지 않는다. 용서될 수 없다. 용서를 구하는 자도, 용서를 해줄 자도 없기에. 가슴을 후벼파, 파인 구멍 속까지 갉아먹고 안쪽으로 파고들어 뼛속 깊이까지 느껴지는 죽을 것 같은 고통은 영원히 피해자들을 괴롭힌다.


법은 피해자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 존재하지 않는다. 법정은 피해자와 가해자, 각자의 진술을 듣고 흑과 백을 가려낸다. 법정에서 이루어지는 일련의 과정은 용서와 화합의 장이 아니다. 그저 중개인이 한 명 끼어들어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과실이 큰 자에게 합당한 책임을 부여하는 그런 과정일 뿐이다. 법은 상처받은 이의 마음을 달래주지 않는다. 이해하지 않는다. 책임지지 않는다.


상처는 누구도 이해해 주지 않으며, 누구도 알 수 없다. 상처받은 자신만이, 오직 자신만이 알고 있을 뿐이다. 그렇기에 용서란 항목이 더더욱 주관적 판단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용서의 여부는 치밀한 이해관계 끝에 정해진다.


사람들은 진짜 별것도 아닌 것으로 다투곤 한다. 내가 어렸을 때는 ‘메이플스토리’라는 게임을 즐겨 했는데 당시에 ‘몬스터 카니발’이라는 콘텐츠를 하게 되면 경쟁 중에 몬스터가 코인을 드랍하곤 했다. 이 코인을 아이템으로 맞바꾸어 돈도 벌고 하는 그런 보상 시스템이 있었다. 그때 나는 쌍둥이 동생과 함께 이 콘텐츠를 즐겼었는데 우리는 우리 나름의 룰을 정해놨었다. 바로 돌아가면서 하나씩 먹자는 것이었는데, 웃긴 게 이 녀석이 나 몰래 코인을 먹는 것을 보고 말았던 것이다.


너무 화가 나서 온갖 욕설을 내지르며 키보드를 내리치고 모니터를 날려버린 뒤, 주먹다짐을 했다. 사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심증만 있었기에, 잘 됐다 싶어 싸움을 걸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런 허무맹랑한 이유로 우리는 정말 많이 싸웠었다. 아무리 사소한 거라도 우리는 우리에게 득이 되지 않는다면 가족에게도 칼날을 겨누곤 한다. 오히려 나와 가까운 사이인 사람들에게 기대를 많이 하기 때문에 더 많은 실망을 하게 되는 것이다.


말로는 “아니야 괜찮아.”라며 내면의 자신을 속이고 강한척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이 정도는 괜찮지” 또는 “뭔가 사정이 있나 보다.” 하고 쿨한 척 사건을 덮어버리지만 비슷한 일이 두세 번 더 발생하게 되면 쌓였던 응어리가 한 번에 터지곤 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갑의 입장인 본인이 모든 것을 수용해 주고 있다가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의 한계점에 이르렀기 때문에 터지는 것이다. 이는 갑인 자신에게 이 관계가 득이 되지 않음을 인지하고 갑을 관계의 끈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다는 냉정한 판단에 의해 이루어진다.

나는 다툼이란, 사소한 것부터 큰 것까지 모두 빠짐없이 치밀한 손익계산의 여부에 의해 발생한다고 생각한다. 나아가서 용서한다는 것은 나에게 득이 될 때, 관계를 지속해야 할 이유가 있을 때, 관계를 회복시켜야 할 명분이 있을 때 이루어진다고 보고 있다.





우리는 그 어떤것도 통제할 수 없다.


세상에는 가역과 비가역이란 개념이 존재한다. 사람마다 차이를 보일 순 있어도 ‘선을 넘는다.’라는 개념을 누구나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다툼에는 다양한 양상이 있다. 다양한 다툼의 양상을 사람들은 용서 가능한 상태인지 아닌지를 구분한다. 사소한 다툼이라 정의 된 다툼은 책임을 논하며 합의를 한다면 관계를 되돌리는 것은 딱히 어렵지는 않다. 하지만 문제는 선을 넘어버린 다툼, 누군가의 또는 어떤 가족의 삶을 망쳐버릴 정도의 영향을 지닌 다툼에서 발생한다.


조두순처럼 극악무도의 범죄를 저지른 자는 누구라도 용서할 수 없을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선을 넘어 버렸다는 것을 각자의 기준으로 판단하여 명확하게 경계 짓는다. 경계선 밖으로 밀려난 대상은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가능성이 굉장히 크다. 이는 자신 또한 누군가에게 용서받지 못하게 될 가능성도 존재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선을 넘는다라는 기준은 개인마다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때론 사소한 것이 그 기준선이 되기도 하고 때론 어처구니없는 것이 그 기준선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추상적 형태를 띤 각자의 기준선을 알 수 없다. 자신의 기준조차도 모르는데, 남의 기준을 알 수 있을 리가 없다. 나는 그런 의도로 말한 것이 아닌데, 나는 그런 의도로 행동한 것이 아닌데, 하지만 어떤 말과 행동도 선을 넘어버린 자가 되어버렸다면 변명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이런 일련의 가치나 결과들을 통제할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










타인에 대한 용서는

자신을 용서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간단한 이야기를 통해 용서를 아우르는 일련의 과정들은 주관적이며 이해관계가 상충하고 무엇보다도 통제할 수 없는 영역에 있음을 이야기했다. 나는 종종 끔찍한 사건들을 보거나 들으면서 피해자들은 도대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해 보곤 한다. 나는 이에 대해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는 것’ 이 유일한 해답이라고 결론지었다.


나 또한 그렇다. 지난 26년 중 19년 가까이를 학대받고 스스로 학대하며 모든 것은 변할 수 없다며 끊임없이 자책하고 포기해왔다.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 지난 내 인생의 모든 선택은 나를 위한 것이고 다름 아닌 내가 짊어져야 하는 책임이자 현실이라는 것.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다른 무엇보다도 이 세상의 모든 고통을 온몸으로 받아낼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지난 일에 대한 압도적인 용서와 무한한 감사에 대한 마음-수용이 필요하다는 것. 받아들일 수 없더라도 받아들이고 인정하기 싫더라도 인정하며 앞으로의 일만을 생각하고 그저 오늘을 살아갈 것.


증오했던 그 사람들을 오늘은 용서해보려고 노력하는 것.


용서라는 것은 그 누구를 위해서도 아닌 바로 자신을 위해서 해야만 하는 것이다. 용서할 수 없다는 기준을 만드는 것은 자신이다. 용서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감정의 통제 또한 자신만이 가능하다. 이해관계의 상충 속에서 자신이 손해 보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하고 시기를 놓쳐버린다면 평생 동안 그 짐을 안게 되고 죄책감은 자책감으로 발전하여 평생 자신을 놓아주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은 앞을 향해 나아간다. 하지만 우린 때때로 뒤를 돌아본다. 그럴 때마다 나를 붙잡는 기억들은 갑자기 숨통을 조여온다. 인간은 미래의 생각을 할 때는 저절로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작더라도 성취감에는 한없이 기뻐한다. 하지만 의식의 뒤에 지워지지 못한 기억들은 언제나 발목을 붙잡는다. 거머리처럼 물고 늘어지며 늪에 빠진 것처럼 끌려 들어가 흐리멍텅해진 의식의 의사 판단 기관은 망가져 자신을 영원히 이 자리에 묶어버리는 족쇄가 된다.


적절한 시기를 놓쳐버린 용서의 기회는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극단적인 피해를 입은 자신도, 자신의 가족도, 이외의 피해자들 모두 다, 피해에 대한 보상을 받아야 마땅하지만 적절한 시기에 이것들을 놓아주지 못하면 받지 못한 피해에 대한 보상보다 더 큰 고통을 영원히 안고 살아가야 한다. 용서는 누구보다도 자신과 자신을 위해 힘내고 있는 가족, 친구들을 위해 해야 하는 일인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사소한 것부터 큰 것까지 누군가에게 용서하지 못할 경험, 기억을 가진 사람들 모두에게 꼭 전달하고 싶다.


부디


“당신을 용서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