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대 포차끝판왕’, 2021년 2월 4일 현재 네이버 실시간 검색어 1위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잘 통제되는듯했던 사람들은 정신줄을 놓고 엉덩이를 흔들어 재끼기 시작한다. 지켜보는 사람들은 불쾌함을 표하며 혀를 찬다. 불과 1달 전만 해도 학교를 다니고 있던 나는 문득 기억을 돌이켜본다. 보편적인 대학생들은 비대면 강의를 지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실습 위주의 강의를 실시하는 디자인학과의 학생인 나는 전면 대면 강의를 들었었는데 같이 작업을 진행하는 동생이 이런 말을 했다. “아 미쳐버릴 거 같습니다. 행님" 그냥 피식하고 웃었다. 뒤에 돌아올 말은 들어보지 않아도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미쳐버릴 것만 같은 기분을 억누르고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을 것이다. ‘모두를 위해서 조금만 참자..!’ 비슷한 생각을 하며 이 팬데믹 상황을 극복해보자고 희망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예외는 언제나 존재하는 법. 대놓고 길거리를 활보하며 놀고 즐기는 것을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버젓이 올리는 사람도 있고 대중교통에서는 마스크를 벗고 나의 자유를 침범하지 말라는 사람도 보인다. 여전히 자유종교인들은 모여서 기도문을 올리는 중이시다. 이들을 보며 보편적 대중인 우리는 분노한다. 우리 모두가 참고 있는데 왜 당신들만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느냐고 묻는다. 나는 안타깝지만 흥미로운(?) 가설 하나를 제시해볼까 한다. 그들과 당신들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보잘것없는 문장을 읽으며 화를 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그들과 당신의 공통점은 ‘화를 내고 있다.’ 와 ‘참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들의 경우에는 ‘참고 있었다.’는 쪽이 좀 더 정확한 듯하다. 요점은 참고 있다가 화를 내는 것에 있다. 참는다는 행위 자체가 ‘하고 싶지 않다.’를 뜻한다. 참다못한 감정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갔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그들을 보고 화를 내는 당신이나 참지 못하고 길거리로 튀어나간 그들이나 별반 차이가 없다고 생각한다. 두 가지의 일의 원인은 모든 이야기의 중심에 자신이 없다는 것에 있다. 나에게 미쳐버릴 것 같다던 그 동생도 그러하지 않았을까? 이야기의 중심에 자신이 없기 때문에 지금 상황이 미쳐버릴 것만 같은 것이다.
이제부터는 그 이야기를 자세히 해볼까 한다.
많은 한국인들에게 밤 문화란 뭐랄까.. 즐기는 것을 넘어서서 당연한 일들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코로나로 인해 술집들은 연이어서 영업이 중지되고 다양한 거리 두기를 통해 사람 간의 교류는 굉장히 적어졌다. 많은 사람들이 답답해하지만 내가 답답함을 느끼는 부분은 전혀 다르다는 것을 미리 밝힌다. 나는 외출을 못 하는 것에도, 사람을 만나지 못하는 것도, 술을 마시지 못하는 것도, 그 어떤 것에도 딱히 답답함을 느끼지 않는다. 서론에서 말했다시피 대다수의 사람들은 현 상태에 굉장히 불안해한다. 명확한 통계는 없지만 그동안 다양한 장소에서의 경험과 꾸준한 사람들의 관찰을 통해 깨닫게 된 것은 ‘사람 사는 곳은 어디든 똑같다’라는 것이다.
나의 뇌피셜에 의하면 대다수의 사람들이 불안해하는 원인은 외출을 자주 하던 삶이 중단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나도 놀고 싶은데 모두가 참고 있는 이 시국에 니네들이 감히 놀아? ㅂㄷㅂㄷ...” 자유롭지 못한 자신들과 자유로운 타인을 비교하며 억제당하고 있는 것에 대해 분노를 표한다. 누군가가 자유롭게 행동하는 것에 열등감을 느끼는 것이다. 남의 의사를 멋대로 판단하고 이야기하는 건 역겨운 일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생각해 보자. 열등감 때문이 아니라면 부들댈 것도 없다. 그들이 만약 당장 즐겁고 좋기만 한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면, 책상에 지긋이 앉아서 자신이 바라는 꾸준한 행복을 위해 무엇을 해야만 하는지 생각해 본 적이 있다면, 즐거움과 진정성을 얻을 수 있는 일을 찾아내어 꾸준히 지속하고 있을 것이다.
매 순간을 의미 있게 보내는 사람들에게 술을 마시지 못하는 현실 때문에 혈압이 오를 일은 없다. 가끔씩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며 슬픈 일, 기쁜 일에 대해 공유하는 것은 이들에게는 그저 삶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코로나 시국이란 언제나처럼 주어진 현실을 직시하고 하던 공부를 지속하며 나아가는 방향을 조금씩 틀기만 하면 될 뿐인 일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저 술, 친구, 게임, 옷... 소비가 주축을 이루는 ‘문화’에 취해있다. 한 방향으로만 흘러가고 소비할 줄 밖에 모르기 때문에 이 시국이 ‘참아야만 하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따라서 이들이 누군가의 인스타그램 스토리를 보며 분노하는 이유는 타인에 대한 열등감 때문이라 추측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사람들과의 연결에 의존한다. 그것이 의미 없는 유대라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그것을 제외하면 자신에게 남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같은 맥락으로 사람들이 미쳐가는 이유는 이야기의 중심에 자신이 빠져있기 때문이다. 이야기 속 중심에 자신이 있다는 것은 자신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지를 의미한다. 자신을 위해 살아간다는 것은 자신을 위해 시간을 쓰는 것이고, 쓰여진 시간의 의미를 결정하는 것은 결과이다. 결과란 눈에 띄거나 누구나가 인정할만한 무언가를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타인의 인정이 존재하는 결과물이라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자신이 걸어온 길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이기 때문이다.
누구나가 인정할만한 결과가 아니더라도, 특정 결과는 다른 결과로 이어지기 위한 초석이 된다. 결과를 남기기 위해 무수히 많은 과정을 거치는 것은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되고 이는 역설적으로 많은 사람들 속에서 빛나기 위한 토대가 된다. 어느 날 의미를 잃게 될 순간의 즐거움과는 다르게 자신이 걸어온 길은 나만의 이정표가 되고 코로나와 같은 재앙이 닥쳐도 굳세게 앞으로 나아갈 원동력이 되어준다. 지금 삶의 중심에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은 어떤 일이든, 어떤 것이든 모두 자신을 위한 것이 된다는 것이다. 나는 물어보고 싶다. 지금 진짜로 자신을 위해 시간을 쓰고 있는가?
자신을 위해서 어떤 고통을 감수하고 있는지, 무엇을 구체적으로 하고 있는지. 지금 행복한지, 앞으로 행복할지 생각해 본다면 답이 나올 것이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힘든 것, 하기 싫은 것은 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저 놀고먹고 마시며, 싸고 하는 그런 1차원적인 고통이 없는 유토피아 같은 삶이 이어지리라 믿는다. 하지만 이젠 알 것이다. 소비 중심적인 삶은 불안을 야기하고 자신의 삶에서 자신을 멀어지게 만드는 행동이라는 것을. 코로나라는 각성제를 마시고 꿈에서 깨어나 이제까지의 행동들이 모두 잘못된 방식이었음을 깨닫고 하루라도 빨리 자신을 위한 삶을 살아갔으면 하는 바램을 전달한다.
위에서 그들이 인스타그램 스토리를 보며 분노하는 이유는, 열등감 때문이라고 이야기했다. “아니 내가 그들한테 열등감을 느낄 이유가 있냐?"라고 물을 수 있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생각 없이 행동하는 자들에게 열등감을 느낄 이유는 전혀 없다. 하지만 당신들이 열등감을 느끼는 핀트는 그들의 행동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상황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아까 말했던 ‘억제 당한다고’했던 상황이다. 경거망동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누구도 자신을 막을 수 없다는 듯 그야말로 자유롭게 행동한다. 그 부분이 당신들이 열등감을 느끼는 포인트이다. 왜냐하면 지금 이 상황은 자신에겐 족쇄이고 자유롭게 방생된 그들이 부럽기 때문이다.
부러움을 느끼는 원인은 정말 간단한 곳에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의지로 행동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차이이다. 계속 이야기하는 것이지만 당신들의 현 상황은 ‘참아야만 하는 것’이다. 자신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모두가 그래야 하니까’, ‘이게 도의적에 맞는 거니까’라는 명분 때문이다. 결국 자신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눈치를 보며 참고 있는 것이다. 현 상황을 참고 이겨내는 것이 자신의 의사와 같다면 그들의 인스타그램을 보며 화낼 이유가 전혀 없다. 잘못된 정책의 방향성의 개선과 올바른 법의 제정으로 그들의 처우가 개선되길 바라면 된다. 더욱이 세상 흐름에 눈과 귀를 기울이고 관심을 가지며 무엇이든 참여를 하면 되는 것이다.
대학의 커뮤니티, 다양한 플랫폼, 뉴스의 댓글, 거리의 사람들, 심지어 주변 친구들 사이에서도 분노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화를 내고 싶을 뿐이지, 화를 낼 이유는 없다. 평소에도 열심히 살아가던 당신이라면 이 위기를 활용해 기회로서 자신에게 조금 더 집중하면 되고, 노는데 바빴던 당신이라면 안타깝지만 힘들더라도 이젠 현실로 돌아와 자신과 직면하자. 딱히 코로나라는 비정상적인 상황 때문이 아니다. 이런 일들은 앞으로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다. 조금 늦어버렸지만 지금이라도 평소에 준비하지 않았던 자신을 돌이켜보고 화를 낼 대상을 다시 생각해 보는 것은 어떨까?
누군가에게, 상황에게 휘둘리기만 하는 자신이 아닌 모든 선택에 자신이 포함되어 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은 어떨까? ‘억제 당하는’ 상황이 아닌 스스로가 ‘선택하는’ 상황을 만드는 것, 생각보다 어렵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전달하고 싶다.
친구를 만나고 싶을 땐 술집을 가고, 노래를 부르고 싶을 땐 노래방을 가고, 게임을 하고 싶을 땐 pc방을 가고, 춤을 추고 싶을 땐 클럽을 갔었던 일상들. 매번 아무렇지 않게 당연하게 했던 것들. 이제는 당연하지 않게 되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쌓여만 가는 답답함과 불안함.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에 생겨나는 감정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해야만 한다. 이 상황을 납득하고, 참는 것이 나를 위한 것인 것. 머리로는 받아들여도 가슴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든 이 말을 받아들이려면, 그동안 미뤄뒀던 삶 속에 고여있는 썩은 물을 게워내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마냥 분노하고 미쳐가는 흐름에서 벗어나 이야기의 중심에 자신을 덮어써야 한다.
어떤 것이든 좋다. 요리, 그림, 운동, 자수, 글, 청소, 심지어 친구와 대화를 해도 좋으니깐 ‘성장’이라는 초점에 맞춘 일련의 과정에 부딪혀야 한다.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닌 현실 기반의 능력 위주 공부를 꾸준히 이어나가야 한다. 성장의 기미가 보이지 않아 자괴감이 들기도 할 것이고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도 생길 것이다. 당신이 실패라고 생각하는 분기점은 안타깝지만 실패의 축에 속하지도 못한다. 세상은 원래 실패투성이다. 완전해지기 위해 노력하는 우리들이 있을 뿐이지, 완전한 우리는 없기 때문이다. 쉬운 일, 지금만을 행복하게 만들어줬던 다양한 행위를 그만둠으로써 세상이 원래부터 골치 아프고 짜증 나고 때려 부수고 싶을 정도로 부조리하지만 때때로 찾아오는 성취와 행복이 소중하다는 것을 이제는 알아야 할 때다.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주변 인물들에게 꾸민 모습을 보이며 거짓말하는 것은 그만두고 진짜 자신의 모습으로 소통하며 경계의 벽을 허물고 나아갈 것, 경계를 허물지 못한 대인과 의미 없는 소통의 시간은 정리할 것. 만남에 대한 이별과 소중함을 알고 각별함을 구분할 것. 친구라고 생각했던 이들과 자신을 명확하게 구분하기 시작하면 주변에 남는 사람들은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살아가면서 당연하게 발생했어야 될 일이지만 이때까지 눈 돌려 피하기만 했을 것이다. 자신을 둘러싼 모든 일에 대해 중심에 자신을 덮어씌우면서 잃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원래 세상은 힘들고 아픈 일 투성이라는 것을 알고 참아내야 한다. 참아야만 하는 상황이 아니라 참아야 하는 상황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지금은 추워서 아침 운동을 나가진 않지만, 1주 전, 살짝 따뜻할 때만 해도 매일 아침 쌍둥이 형제와 스파링을 하러 공원에 나갔었다. 그럴 때마다 아이에게 마스크를 씌우지 않은 엄마들이 삼삼오오 모여있는 것을 발견했었는데 그들의 손에는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들려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경악을 금치 못했다. TV에서 사회적 거리 두기 2.5단계를 실시하고 5인 이상 집합하지 말라는 정부의 지침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판국에 정자에 모여서 커피를 마신다고? 카페에서 커피를 못 마시게 하니 정자에 모여서 커피를 마시는구나 하하하하하. 그 모습을 보고 헛웃음부터 나왔는데, 주변에 아이들이 놀고 있는 것을 보고 웃음기가 사라졌다.
반복적인 이야기다. 지금 이 시국이 힘들고 짜증 나는 모든 원인은 당신 자신에게 있다. 당장 주변을 둘러보라. 아이스 아메리카를 들고 몰상식하게 모여 “지침에는 이런 거 없었으니까ㅋ”같은 사고방식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다. 비단 아이스 아메리카노만의 문제가 아니다. 카페에 모이지 못하게 하니 패스트푸드점에서 커피를 사 먹고 술집을 못 가게 하니 헌팅 포차를 간다. 이게 정상적인 사고방식일까? 여태까지 정부 지침의 중심에는 ‘집단적 행동 금지’라는 메세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모여서 작당을 하고 싶어 하는 게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다는 생각만 들게 한다. 이런 1차원적인 사고방식으론 절대 이 악몽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강력하게 이야기하고 싶다.
사람을 만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충분히 이겨낼 수 있다. 1차원적 생각밖에 하지 않는 사람들은 어떻게든 유지해온 인간관계의 끈을 붙잡기 위해서 행동했었던 기존의 양식 그대로 이어나가려고 한다. 하지만 연결의 방법은 상당히 광범위하다. 꼭 얼굴을 봐야만 연결되는 것이 아니다. 이를테면 블로그에 글을 주기적으로 업로드하여 의견을 나눌 수도 있고, 일상을 유튜브에 업로드해 소통할 수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쉬운 방법만 찾고 행복하길 바란다. 그리고 유지하고 있다고 착각한다. 안타깝지만 유지되는 세상은 없다. 자신이 멈춰있는 사이 누군가는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실제로 당신의 삶은 뒤로 밀려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어렵고 귀찮다는 이유만으로 발전을 거부한다. 세상은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코로나는 그 변화의 일부에 불과하며 앞으로도 이런 변수가 발생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명확하게 제시한다. 아직도 새로운 삶의 양식을 거부한 채 자신의 양식을 지켜야겠다면 아마 미래영겁 힘들지도 모른다. 이런 행동들은 자신뿐만이 아니라 타인에게도 나쁜 영향을 미치는 엄연한 민폐이다. 자유에는 책임이 따르는 법이다. 지금 당신이 누리고 있는 자유 아래 누군가와의 연결을 소중히 여긴다면 친구를 위해서라도, 애인을 위해서라도, 부모님을 위해서라도, 자신의 아이를 위해서라도 내일 하루쯤은 손에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아닌 연필을 잡아보는 것은 어떨까?
다시금 이야기를 이 시국을 답답하게 여기네, 마네로 되돌리자면, 얼마 전 날더러 “집안에서 생활하는 것이 익숙하니까 답답하지 않은 것이다.”라는 말을 한 사람이 있다. 부럽다며 이어지는 그의 말에는 자신은 평소에 밖에 나다니는 것을 좋아해서 조금만 집에 있어도 미칠 것 같다는 이야기를 했다. 안타깝지만 정말 잘못 짚었다고 생각이 들었다. 나는 MBTI 유형 중에서도 E로 시작하는 ‘ENTJ’ 외향형 성격이다. 나는 에너지를 밖으로 풀어내야 성에 차는 사람이다. 하지만 내 안에서 풀어나가야 할 숙제가 있음을 명확하게 인지하고 나를 통제하는 연습을 하는 것이고 이는 상당한 고통이 동반한다.
자신은 외향형이니까 내향형인 너랑은 다르게 고통이 더욱 크다.라는 식의 말은 참 뭐랄까... 우리는 주위에서 곧잘 어린아이들을 관찰할 수 있는데 어린아이들은 싫으면 생떼를 부리고 바닥에 주저앉아 울기도 한다. 그렇다. 밖에 나가지 않으면 답답하다, 뭐~ 불안하다, 힘들다, 이런 말들은 그냥 억지 부리는 어린아이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세상은 평평한 구조를 띄고 있었지도 않고 모두가 같은 환경에서 생활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능력이 같은가? 완전하지 않은 세상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언제나 고통이 뒤따른다. 고통을 대하는 태도는 온전히 자신의 몫이다. 자신만의 세상에 갇혀서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니까’라는 편협한 시각으로는 어떤 것도 극복할 수 없다.
자신의 약점이 있다면 약점을 보완하는 데 신경을 써야 한다. 세상은 한쪽 방향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빛과 어둠, 행복과 슬픔, 짠맛과 단맛 등 서로의 반대되는 개념이 존재하기에 서로의 정의가 존재하며 우리는 상호 반대 개념이 존재하는 상대적인 세상에서 살아가기에 그 중간 어딘가 조화로움을 계속해서 찾아야 한다. 자신의 삶에서 조화로움을 찾는다는 것은, 밖에서만 시간을 보내는 이에게는 혼자만의 시간을 자주 갖는 것이 될 것이고 안에서만 시간을 보내는 이에게는 다른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많은 관심을 가져보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코로나라는 강한 충격은 우리에게 묻는다. “지금 당신은 자신이라는 이름의 고통과 마주해야 할 때 아닐까?”
20대 초반, 질투와 시기가 난무하는 얘들 놀이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잠깐 타올랐다가 금세 꺼지는 것은 사랑이라고 부를 수 없다. 사랑이란 처음부터 그 자리에 거짓 없이 존재하는 것이다. 비록 흔들리고 의미가 약해질지언정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고 잘 보이고 싶어서 거짓된 행위를 반복하는 것은 일시적이고 본래의 속성으로 돌아오는 것은 한순간이다. 누군가를 위한 지속적인 행동은 자신을 위한 것과 동일시될 때 가능하다. 결과적으로 사랑 또한 나에게 득이 되지 않으면 꺼지기 마련이고 의미를 잃어간다. 그런 의미에서 타인을 사랑하기 이전에 자신을 먼저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누구나 할 수 있고 아무나 할 수 없는 것이 사랑이다.
자신을 진정하게 사랑하는 행위는 저마다의 정의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 순간을 넋 놓고 바라보는 행위는 절대 아니다. 술을 마시고, 커피를 마시고, 장난을 치고, 게임을 하고, 옷을 사고, 맛집을 탐방하며, 셀카를 찍고, 등등등등 일시적 순간에 행복이라는 꿈을 꾸게 만들어 주는 행위는 1차원적인 사랑에 그치지 않는다. 그저 순간과 자아도취에 빠져 도파민 호르몬 속을 헤엄치다가 언젠간 잠식되어 가라앉을 것이다. 행복이라는 것은 하나의 순간을 의미하지 않는다.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무수히 많은 행복이라는 점이 이어진 선을 의미한다. 1차원적 행동의 점은 다른 점들과의 개연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이어질 수 없다. 서로 연결되는 행복만이 자신을 꾸준히 사랑하는 방법인 것이다.
시간이 지나며 사람은 나이를 먹는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육체의 노화를 의미하기도 한다. 육체가 노화되면서 경우에 따라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이 점점 제한되며 의미를 잃어가는 것들이 많아진다. 이를테면 외모와 같은 것 말이다. 순간의 행복이라면서 카페에서 커피를 먹는 감성 샷을 찍거나 자신의 수려한 외모를 뽐내기 위해서 사진을 찍는 것, 예쁘게 꾸며 입고 자랑하는 사진을 찍는 것, 등 시간이 지나면 의미를 잃어버리는 것들에는 지속적인 행복이 따라오지 않는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보편적 행복은 지속되지 않을뿐더러 때론 슬픔도 뒤따른다. 짜증도 동반될 것이고, 실패와 괴로움, 부정이라고 일컬어지는 감정들이 자신을 괴롭힐 것이다.
세상은 복잡하고 다중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다.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흘러가는 시간 속 매 순간 자신이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을 치열하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에 있다. 코로나로 고통받지 않는 이는 한 명도 없다. 하지만 누군가는 앞으로 나아간다. 마스크에 가려 누가 웃고 있는지, 울고 있는지 알지 못한 채 모든 이유를 남에게서 찾는다면 코로나라는 새로운 생태계의 형태에 삼켜져 사라지게 될 것이다. 잊지 말자. 내가 미쳐가는 이유는 누군가의 행동 때문에도, 코로나 때문에도, 마스크 속 여드름 때문에도 아니다. 모든 것은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겨난 일이다.
얼마전 정인이 사건에 대한 뉴스를 보았습니다. 사람들이 시위를 하며 ‘어른들이 대신해 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플랫카드를 들고 있었고 해당 유튜브 영상 댓글에는 찢어 죽여야 한다는 의견들이 많았습니다. 그곳에는 증오만이 존재했고 “과연 이 감정이 옳은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네요. 시간을 내서 정인이 사건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들여다보고 난 후에는 사람들의 감정과 행동이 이해가 되기 시작했습니다만 머릿속 한편에선 “증오는 증오를 낳을 뿐이다.” 라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정인이 부모를 찢어 죽인다 한들 죽은 사람이 1명에서 3명으로 늘어나는 것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죠. 이성적으로 바라볼 때 사망자가 3명이 될 뿐인 것입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최근에 사람들이 분개하며 소리를 내는 일들이 많아졌다는.. 그런 생각이요. N번방 사건, 촉법소년, 조두순 출소, 알페스 사건, 정인이 사건 등 2020년에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일들이 난무했습니다. 스케일이 대중이 생각하는 선을 넘은 만큼 사람들의 분노는 익명이라는 특성을 등에 업고 화면 안의 폭력으로 이어졌습니다. 물론 법으로 통치하는 법치국가에서 범죄자의 ‘사회화’라는 이유만으로 제대로 된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음에는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동의합니다. 하지만 정말로 솜방망이 처벌 때문에 사람들이 분개하고 봉기한 것일까요? 감정이 고조되고 행동이 격해지는 것에는 다른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저는 코로나가 많은 선물을 가지고 왔다고 믿습니다. 불필요한 일의 체계는 사라지고 불필요한 문화도 사라지고 있거든요. 불편한 관계 속에서 시간을 보낼 일도 이젠 거의 없게 된 듯 합니다. 누군가에겐 축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세상은 빠르게 변화하고 있고 사람들은 변화에 적응하는 자와 적응하지 못하는 자로 나뉘고 있습니다. 이 좁은 땅 한반도에선 조선시대가 끝이 나고 대한민국이 되어갈 무렵에 양반제도가 없어졌습니다. 양반들 입장에선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을 테죠. 과연 양반들은 처음부터 수긍하고 받아들였을까요? 코로나는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치며 많은 것들을 강제로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세상의 최적화 시스템이 실행된 것입니다.
우리에게 남는 것은 불편한 진실뿐입니다. 불편한 진실은 사람들이 보려고 하지 않기에 불편한 진실이라고 불립니다. 지금 당신이 보지 않으려고 하는 불편한 진실은 무엇입니까? 그게 어떤 것인진 제가 단정 지을 수 없는 부분일 겁니다. 하지만 전 이 말을 꼭 전달하고 싶습니다. 지금 미쳐가는 이유는 당신에게 있다는 것, 미쳐버릴 것 같다면 불만을 내뱉기보다 발전의 시간을 가져보라는 것. 미쳐갈지, 미쳐가지 않을지는 전적으로 당신의 선택에 달려있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