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아이가 타인이라는것을 인정하라."
최근에 시청률이 20퍼센트를 넘었었던 ‘스카이 캐슬’을 뒤늦게 보게 됐다. 스토리의 짜임도 흥미로웠지만 보는 내내 나의 유년시절이 떠올랐다. 내 어머니 당신은 쌍둥이 형제였던 나와 동생을 언제나 철저하게 비교하셨다. 아직도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기억들이 있다. 매일같이 이루어졌던 받아쓰기, 50점을 맞고 볼펜 뒷부분으로 머리를 난도 당했던 기억. 초등학교 4학년 때 처음으로 전교 2등 했던 날, 나보다 시험을 못 친 쌍둥이 동생에게로 이어진 비난. 그림이 좋아 방과 후 활동 학습지를 장식 했던 날, 단소로 죽기 직전까지 얻어맞아 눈물로 참철된 기억. 아이러니한 것은 아직까지도 나는 맞춤법이 서툴다. 또 낙서가 좋았던 나는 열일곱부터 스물셋, 전역 후 대학교 복학 전까지 그림으로 성공하기 위해 죽을힘을 다했다. 토악질이 나올 정도로 강요의 반복이었던 일상은 지금의 나와는 전혀 관계없으며 억지로 감추어졌던 욕망들은 틀어막은 수도꼭지처럼 사방팔방으로 분출됐다.
이런 기억은 나에게만 존재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적어도 내가 바라본 세상의 보편적인 부모란 아이들을 자신의 소유물로 착각하고 ‘이게 올바른 부모가 해야 할 일’라는 명분으로 자신의 더러운 욕망을 감춘다. 오늘은 다름 아닌 부모의 소유욕으로 인해서 망가져가는 아이들의 삶에 대해서 이야기해볼까 한다. 소유욕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님을 사전에 밝힌다. 욕망이라는 것은 인간 본연의 자연스럽게 느끼는 순수한 현상 그 자체이다. 다만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 아이를 이용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에 대해 알고, 당신 자신의 소유욕과 아이들을 양육하는 데 있어 조금 더 바람직한 방향은 무엇일까에 대해서 이야기해볼까 한다.
아이들이 잡음이 넘치는 세상에서 스스로 도울 수 있게 하는 것, 그것이 교육의 본질 아닐까? 교육이란 ‘인간이 삶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모든 행위를 가르치고 배우는 과정이며 수단을 가리키는 교육학 용어’라고 네이버 지식백과에 정의되어 있다. 몸집만 성체인 대다수의 사람들은 스스로를 어른이라 칭하며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아이를 소유물로 착각하곤 한다. 본디 소유욕이라는 것은 사람으로 태어나 굉장히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자신의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 타인을 이용하게 되는 순간부터 욕망의 순도는 점점 내려가며 결국엔 걷잡을 수 없이 더러워진다.
아이를 자신의 소유물로 착각하는 부모는 아이의 행복을 위해서라며 은연중에 강요한다. “오늘은 몇 등이야?” “게임 좀 그만해.” “학생이 공부를 해야지!” 공부를 잘하지 못했던 학창 시절을 떠올리며 자신의 아이는 실패의 길을 걷게 할 순 없다며 등수 경쟁을 부추긴다. 정작 자신이 못난 이유는 타인과의 경쟁에서 밀려나서가 아니라, 자신과의 경쟁에서 패배했기 때문인데 말이다. 삶을 살아가면서 학교 성적이 중요하지 않단 것이 아니다. 삶이라는 것은 한 가지 요소로만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성적뿐만 아니라 대상을 평가할 요소는 무궁무진하다. 무엇보다 우리는 완전해지기 위해서 노력할 뿐이지, 완전해질 수 없다. 운 적인 요소에도 많은 영향을 받아 가며 살아가는 우리는 1점, 2점 차이로 나뉘는 등수를, 전부 1등으로 맞출 수 없다.
공부를 정말 열심히 해본 이들은 1등과 2등의 차이가 얼마나 의미가 없는지 알고 있다. 1등이란 수식어 자체에 많은 의미가 부여될 수 있지만 실질적인 능력 면에서만 바라본다면 1등과 2등, 차이가 얼마나지 않는 이들의 능력은 유의미할 정도로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어떤 분야든 좋은 성적의 타이틀은 삶에서 좋은 영향을 끼치겠지만 최근에는 두, 세 가지 분야에서 능력을 조금 더 키워 차별성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훨씬 유리한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 아직도 소위 ‘공부’라고 불리는 학교 성적이 모든 것을 바꿔준다는 시대착오적인 발상은 미래지향적 관점에서 바라보았을 때 아이에게 어떠한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다고 확신할 수 없다.
무엇보다도 아이의 행복이다. 우리는 내적 동기라는 말을 이미 알고 있다. 무언가에 임할 때 외부적인 영향을 받지 않고 스스로 성취감에 의해 움직이게 만드는 내면의 힘을 뜻한다.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공부를 억지로 시키는 부모 중 공부를 잘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까놓고 이야기하면 자기주도적 능력이 굉장히 떨어진다. 잘한다라는 것은 오래 한다는 것이고, 오래 한다는 것은 그만큼 인내와 끈기가 필요한 일이다. 오랜 시간 동안 무언가를 한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좋아하지 않는다면 불가하다. 좋아하는 마음이 동반되는 일은 다른 무엇도 아닌 ‘행복’이라는 성취감으로 보상 되어진다. 부모 당신 또한 이런 이치를 깨닫고 여전히 행복하다면 아이에게 무분별한 강요를 할 이유가 전혀 없다.
교육이란 아이를 등수 경쟁으로 몰아넣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잡음이 넘치는 세상에서 스스로 도울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아이가 당신과는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완전하게 인정하고 정답이 없는 세상에서 현명한 해답을 내놓을 수 있게 도와주는 것, 그것이 아이에게 부모로서 해줄 수 있는 최선의 교육이라고 생각한다.
부모들은 곧잘 자신의 아이를 ‘-2세’ 라고 부르곤한다. 자신의 분신인것처럼 생각하기도 하고, 자신의 가정의 축복, 대들보, 등으로 생각한다. 핵심은 자신들의 ‘보물’이고 ‘재산’으로 여긴다는점에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아이는 당신들의 ‘누군가’가 아니다. 분신은 더욱 더 아닐 것이다. 3억분의 1의 확률로 수정된 정자로 형성된 아이들과 당신들의 공통점은 DNA가 일치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단 한 가지도 없다. 기억도 재능도 기질도 경험도 그 무엇하나도 당신과 같지 않고 같아질 가능성도 없다. 당신이 당신의 색상으로 아이들을 덧칠해 나갈경우를 제외하곤 말이다. 아이들은 흰색 도화지와 같아 앞으로 어떤 색상으로 칠해질지 알 수 없다. 당신의 행동이 아이들에게 먹칠을 하게 될것인지, 무지개빛으로 칠하게 될것인지 조차 당신은 알 수 없다.
아이에게 당신은 우연찮게 부모가 됐을 뿐이다. 당신이 아이에게 행사할 수 있는 유일한 권리는 아이를 완전한 타인임을 인정하고 기르기 위해 책임을 지는 것이다.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의사결정을 할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스스로 알고 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때려 부수기도 하고 울며 생떼를 부리고 몇 시간이고 토라져서 말을 듣지 않을 수도 있다. 비록 미성숙할지라도 서투르고 도움을 받아야 하며 책임을 이행할 힘이 존재하지 않더라도 자신의 의사를 명확하게 표현할 줄 안다. 스스로 사고하고 움직일 줄 아이들은 한 명의 인격체로서 누군가의 소유물이 되기에는 부적절하다.
단언컨대 아이들은 부모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네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부모한테 말대꾸하지 마라." "무슨 말 버릇이냐!"와 같은 말들로 당신들이 소유주임을 확인하고 때론 "엄마 마음 알지?", "누구 아들인데 암."과 같은 말들로 당신들의 소유물임을 확인하기도 한다. 당장 10분 전만 해도 당신도 당신의 부모에게 들었을법한 말들이지만, 그 속에는 자식에 대한 부모의 소유 심리가 숨겨져있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이런 말들에 많은 이들이 공감한다는 것은, 그만큼 부모의 소유의식이 국민 정서에 뿌리 깊게 내려져있고, 의식적으로 개선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아이들은 아이들의 삶 자체를 온전하게 받아들일 권리와 자유가 있다.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아이들이 자신의 신체를 움직이듯 자신의 삶을 자유롭게 살아갈 권리가 있다. 아이를 키우며 들어가는 비용과 시간을 투자했다고 해서 아이 삶의 주인이 부모 당신이 될 순 없다. 부모 당신이 주인 행세를 하면 할수록 아이는 절대로 당신이 원하는 방향으로는 굴러가지 않을 것이다. 주체적 권리를 아이에게 양도하고 스스로의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 후에 자신의 삶에 대해 참견하지 말라며 쓴소리를 듣지 않는 유일한 방법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당신이 가장 두려워해야 할 점은 아이가 받게 될 못난 성적이 아니고 당신의 허영심도 물려받게 될 수 있다는 점이다. 많은 이들의 채워지지 못한 욕심은 허영으로 대체된다. 가짜라도 좋으니 인정에 목마른 마음이 진실을 지켜야 한다는 윤리적 의식을 앞설 때 허영심은 생겨난다. 윤리적 의식이 인정받고 싶어 하는 의식에 의해 잠식되었을 때는 이미 가짜가 진짜가 되어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선입관과 편견이 없고 세상의 모든 것의 정의가 되어있지 않은 상태이다. 이런 아이들은 자신이 따르는 부모의 행동을 보고 무언가를 규정짓고 인식하게 된다. 당연하게도 당신의 허영심을 보고 받아들이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대부분의 부모들은 아이들이 잘 되길 바란다. 하지만 분명하게 이야기하건대 방법이 잘못되었다.
첫째로, 아이들의 사교육이다. 선행교육이랍시고 어릴 적부터 많은 아이들이 사교육에 임하게 된다. 세상을 편견 없이 바라보는 아이들은 당연히 공부가 세상의 전부인 양 받아들이게 된다, 누차 강조하지만 학교에서 배우는 공부가 인생의 전부가 아니다. 만약 학교에서 배우는 그 잘난 성적이 인생을 좌지우지한다면 지금 당신보다 주머니가 두둑한 고졸 출신의 사업가들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 무엇을, 어떻게, 왜 해야만 하는지를 알게 하고 적절한 방법을 찾게 해 행동하게 만드는 것이다. 만약 아이의 꿈이 학교 선생님이라면 훗날 뒤의 아이들에게 가르칠 지식을 배우는 차원에서 학업은 도움이 될 수 있겠지만, 저마다가 다른 길을 걷기에, 사교육은 결코 아이를 위한 길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둘째로, 강요하는 것이다. 서두에서 내적 동기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모든 일은 스스로 우러나와서 해야만 의미가 있다. 자신이 선택한 길을 걸어야만 후일에 남 탓과 변명을 하지 않는다. 몇 번을 이야기해도 모자란다고 생각한다. 강요로 인해서 발생하는 교육 환경은 아이들의 정서에도 좋은 영향을 미치지 않을뿐더러 당신들이 바라마지않는 좋은 성적을 얻지 못한다. 극한에 몰린 아이들은 제법 좋은 성적을 내긴 할 것이다. 하지만 당신들이 원하는 1등의 목걸이는 절대 걸지 못할 것이다. 우연찮게 걸게 되더라도 우연은 두 번 이상은 반복되지 않기에 우연이라 불린다. 애초에 좋은 성적을 받아도 더 좋은 성적을 받길 바라는 부모 당신들의 끝없는 요구에 지쳐 아이들은 먼저 포기하게 되거나 반발심리에 의해서 당신들이 원하는 길과는 정반대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위 두 가지를 입이 마르고 닳도록 이야기해도 가장 큰 문제점은 부모 당신, 자신이 이를 인지하지 못하는 것에 있다. ‘에이 우리 집은 아니지.’, ‘나는 우리 딸한테 최선을 다하고 있어.’ 안타깝게도 인간은 합리화의 동물이다. 의식의 저 아래 ‘우리 아이들 이대로 괜찮을까?’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이미 소유의식이 싹튼 것이다. 어딘가에서, 누군가에게 자신의 아이들을 자랑하고 있다면 그 순간부터 허영심과 형태가 없는 강요가 당신의 아이들을 짓누르게 된다. 잘 살아가지 못했던 당신의 모습은 아이에게로 옮겨져 당신의 꿈이 아이의 꿈이 된다. 당신의 살아온 과정까지 아이의 삶에 덧칠되어 ‘실패한 과정’ 자체를 아이는 걷게 된다. 셀 수없이 많은 형태의 삶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부모의 말이 정답인 아이들은 그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이라곤 외모밖에 없는 껍데기뿐인 인생을 살아갈 것이다. 허영심이 대물림되는 것은 자명한 일이고 할 줄 아는 거라곤 남 탓밖에 없는 삶. 이것이 정말로 당신의 아이가 걷길 바라는 길인가?
궁극적으로 인간이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저마다의 대답이 있겠지만 그 모든 대답을 아우르는 하나의 단어가 있다면 바로 ‘행복’일 것이다. 인간은 행복하기 위해서 살아간다. 앞서 말했다시피 대부분의 부모들은 자녀의 성적이 높길 바라며 거기서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올라가길 바란다. 하지만 과연 높은 성적이 인간의 살아가는 궁극적 목적인 ‘행복’을 대변해 줄 수 있을까?
나는 그림으로 성공하고 싶다는 생각을 품고 약 5년간 내가 생각하는 최선의 훈련 방식을 통해 그림을 연마했다. 하루에 4시간을 잤던 날도 많았고, 밥 먹는 시간도 아까워서 밥 먹는 동안 수첩을 펼쳐놓고 아이디어를 생각했다. 군 복무 시절에는 야간 초병 근무 복귀 후 밤에도 라이트 펜을 켜서 아이디어를 그려나갔고 위병조장 보직을 택해서 철야 당직 때는 14시간 동안 필요한 컨셉과 이야기를 짜며 세계관을 만들어나갔다. 모두가 즐기며 나태해지는 개인정비 시간에는 어떤 소음이 들려와도 그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고 외출, 외박 시 술과 게임으로 계획을 만들어나갔던 동기들과 달리 나는 오직 나의 교양을 쌓기 위해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림, 그림을 그리는 것 밖에 할 줄 모르던 나에게도 군 시절은 꽤나 재밌는 기억들을 많이 안겨주었는데, 나는 꽤 인기가 많은 사람이었단 것이다. 오직 그림만을 위해서 살아가는 동물처럼 그림만 그렸었지만, 작은 체구에 대한 열등감으로 인해 조금씩 했던 운동의 결실과 남을 깎아내리면서 만들어졌던 유쾌한 언어 구사력이 조금씩 긍정적으로 바뀌어가면서 나에게 좋은 영향을 미쳤는지, 전신에 문신이 있는 소위 조폭 같은 친구들을 포함하여 ‘마초스러운’ 친구들이 호의적으로 대하였고 훈련소 때는 1소대부터 7소대까지 나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심지어 이러한 사실은 자대를 배치받은 후 얼굴도 몰랐던 훈련소 동기에게 들었고, 자대 배치 후에도 내가 꽤나 훌륭한 사람으로 떠받들어졌던 기억이 수 많이 있다.
이러한 기억들은 시작에 불과하다. 수많은 나에 대한 사랑을 통해 나는 그림만 열심히 그리는 것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진짜 행복은 높은 성적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윤택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만들어진다는 것을 알았으면 한다. 높은 성적을 유지하면 그만큼 레벨이 높은 삶을 살아갈 수도 있겠지만 1급수의 물에는 물고기가 살지 못하듯, 최선을 다하더라도 곁을 지켜주는 동료가 없다면 그처럼 외로운 인생도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혼자서 결과물을 만들어나가는 것보다 여럿이서 만드는 결과물이 더 좋을 수밖에 없기에 혼자의 길을 걷는 것은 어떤 측면에서 바라보아도 비효율적이라는 것은 틀림없다.
학교의 성적은 암기 위주의 과목으로 형성되어 사람을 평가하는 편협한 방식 중 하나일 뿐, 모든 능력을 나타내는 지표가 될 수 없다. 사력을 다해 무언가를 하는 것은 언제나 빛나고 고귀하다. 하지만 행복이란 무수히 많은 점들이 이어진 선과 같기에 매 순간 빛을 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수많은 외로움을 동반한다. 특정 분야의 정점에 올라서는 것은 인생에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치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행복의 형태란 하나로 정의할 수 없고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올라서는 것은 다양한 삶의 방식 중 하나일 뿐이다. 당신의 아이에게 가장 큰 행복은 무엇일지 생각해 보는 것은 어떨까?
“그 나이 때 밖에 못하는 것이 있다."라는 말을 자주 듣곤 한다. 주변 어른들이 애어른이 되어버린 나에게 자주 쓰는 말이다. 물론 공식적으로 20대 후반에 접어든 나도 이제 애어른이라고 부르기엔 애매한 나이가 되어버렸다. 많은 어른들이 이런 말들을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정말로 그 시기에 할 수밖에 없는 일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1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이런 말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가 하고 있는 무언가들을 부정하는듯했고, 나를 깎아내리는 말로 들렸기 때문이다. 그들이 나를 대상으로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너무나도 뻔하다.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하는 자신의 삶을 회고하며 당신이 그때로 돌아가게 된다면 더 좋은 삶을 택할 수 있었으리라는 후회 때문일 것이다.
이 말을 듣고 자란 어떤 이들은 어쭙잖게 조언한다. “대학생 때는 돈 다 써도 돼~.", “1학년은 원래 술 먹고 노는 거야.” 마치 술을 마시고 밤거리를 들쑤시며 돈을 방탕하게 소비하는 것이 20살이 되면 누구나 해야 하는 것처럼 말한다. 정말 웃긴 사실은 그들은 고등학교 시절에는 분명히 자신은 ‘학생이니까’라는 제약을 가져와서 자신이 지금 공부를 하는 것과 참고 버티는 것이 마치 당연하다는 듯 생각했을 것이다. 그들은 10대에서 20대가 되어도 누군가가 깔아놓은 레일 위를 걸어가며 그것이 당연하다는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의 부모는 분명 그들이 방탕한 삶을 살기를 원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기억해둬야 할 것은 그들이 방탕한 삶을 살아가는 것은 당신들의 통제 때문이라는 것이다. 마치 탄성 있는 고무줄이 버티다 못해 튕겨나가듯 그들에게 걸린 목줄이 풀리자마자 그들은 튕겨나간 것이다.
두 가지의 예시는 전혀 관계가 없어 보이지만 공통점이 존재한다. 바로 합리화를 하고 있다는 것인데 첫 번째의 경우 돌이켜보면 어른 당신들이 하지 못 했던 것들에 대한 후회를 하며 마치 자신처럼 되지 말라는 듯 말하는 것이다. 안타깝지만 그들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 당신이 무엇을 하느냐이다. 만약 후회할 시간에 조금이라도 바뀌기 위해 노력했다면 조금이라도 바뀐 일상을 살아가지 않을까? 두 번째의 경우, 이때까지 열심히 노력한 자신에 대한 보상이라는 명분으로 미쳐날뛰고 마치 인생의 대선배라도 된 것처럼 나이 차라곤 고작 한 두 살밖에 나지 않는 친구들에게 어쭙잖게 조언하는 것이다. 안타깝지만 그들도 정신을 못 차렸다. 그들은 술 한 잔에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동하지만, 결국 누군가가 깔아놓은 레일에서 도망치듯 벗어나 현실을 도피하고 있을 뿐이다.
모든 일에는 시기와 적기가 있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대상의 육체 연령으로만 판단해서는 안 되고 당신들의 짧은 잣대만으로 판단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누가 됐던 언제가 됐던 각자의 때에 각자가 원하는 삶의 방향은 분명하게 존재한다. 그렇다면 그게 무엇이 됐건 간에 자기 자신이 바라는 삶을 위해 무언가를 하는 것이 분명 시의적절한 선택일 것이다. 우리는 매번 선택하고 책임을 지며 살아간다. 선택에 대한 책임은 그 누가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 하고 있는 이야기는 아이를 키우는 부모, 당신과 관계없는 이야기가 아니다. 아이는 언젠가 성장해서 당신과 같은 어른이 될 것이다. 살아가면서 제일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높은 성적일까? 주머니에 가득 찬 돈일까? 좋은 배우자를 선택하는 것일까? 어떤 것이 더 중요한지는 당신이 판단해서는 안 된다. 판단은 각자의 몫이지 부모 당신의 몫이 아니기 때문이다. 당신이 아직도 아이가 해야 할 일을 제시하며 대신해 주고 있다면, 첫 번째 예시의 사람과 같아질 것이고 당신의 아이는 두 번째 예시의 사람과 같아질 것이다.
인간은 모두 행복해지기 위해서 살아간다. 당신도 아이도 행복해지기 위해서 살아간다는 것은 틀림없을 것이다. 하지만 당신이 행복해지기 위해서 아이를 불행에 빠뜨리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 당신은 당신의 삶이 있다. 아이가 당신의 삶에 와준 것으로 이미 큰 축복일 것이다. 축복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당신은 아이를 낳은 것에 대한 책임을 질 필요가 있다. 아이를 잘 키워내야 한다는 책임을 이행하기 위해서 당신의 아이를 체스 말 정도로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이가 어떤 방향의 길을 걷든 당신은 아이를 방해해서는 안 된다. 아이와의 소통을 통해 부모와 공생관계를 유지하고 있음을 명확하게 알리고 아이를 설득하여 더 좋은 방향으로 서로가 원하는 행복으로 이끌어나가는 것, 그것이 부모로서 해야 할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