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하다면 어린아이처럼 웃고 있을 것이다.”
여느 때처럼 유튜브를 보다가 알고리즘이 히사시 조 – Summer로 안내했다. 나는 평소에 시끄러운 노래보다는 잔잔한 음악을 듣는 편이다. 일과의 대부분이 공부여서 그렇기도 하고 1년 내내 하루도 빠짐없이 공부하기 위해서이다. 멘탈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시끄러운 노래보다는 잔잔한 음악이나 ASMR이 집중력도 높여주고 질리지 않는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히사시 조의 음악을 좋아하는 편이다. 언제나 그 안에서 자신의 과거가 겹쳐 보여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히사시 조의 음악을 듣고 있노라면 지금 하고 있는 일, 모두 과거의 저편으로 사라지고 하고 싶은걸 하며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던 나의 모습을 문득 떠올리게 되는데 그럴 때마다 자신이 걸어온 길을 돌아보며 올바른 방향으로 걷고 있는지 뛰어고 있는지 따위를 생각하고 ‘그때로 돌아간다면..’ 같은 생각을 하곤 한다.
지금의 내가 행복한지는 잘 모르겠다.
공부를 하면서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면 으레 ‘그럼 그렇지.’라며 희열을 느낄 때는 꽤나 많은 편이기도 하고. 배움이라는 것은 살아 움직일 때부터 고장 날 때까지 지속되는 것이라 생각하는 입장이라 딱히 거부감을 느끼지도 않는다. 다만 책상에 앉아서 하고 있는 일련의 모든 과정들이 내게 무조건적으로 흡수되는지에 대한 무구한 의심들이 가끔 한숨 나오게 한다.
그러다 문득 재회하게 된 Summer 영상에서의 히사시 조의 표정을 보자마자 들었던 생각이 ‘이 사람은 어린아이같이 웃고 있네.’였다.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는 그의 표정은 실로 당장 내일이라도 삶을 마감할 것 같은 외모와는 달리 무아무중의 즐거움을 전신으로 느끼는듯한 표정이었는데 그 표정을 보는 순간 진심으로 삶이 행복한 사람은 저런 표정을 짓는 것이라는 걸 깨달은 것이다.
나도 비슷한 표정을 지으며 온몸으로 행복을 느끼던 때가 있었다는 것이 떠올랐다. 애초에 나는 그닥 늙지 않았으니 어떻게 웃던 아직은 어린아이처럼 보일수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해맑은 순수함이 그 미소에 담겨 있느냐 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궁극적으로 행복해지기 위해서 살아간다. 구체적으로 이미 행복한상태가 지속되고 그런 날들이 이어질수 있도록 노력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모든 사람이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없고, 눈에 띄는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이 이내 깨닫는다. 이것의 기준은 시대에 따라 굉장히 달라지며 나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정해지곤 한다. 어쩌면 모든 가능성을 부정당한 채 스스로가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가 굉장히 적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면서 점점 실망스러운 기색이 온몸으로 드러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때때로 그런 편견들을 부숴버리고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대개 그런 사람들을 지탱하는 가치가 있다면 그건 ‘순수함’이라고 생각한다. 순수함은 열망 그 자체이며 언제나 그 자리에 존재하는 강한 신념이다. 더럽혀지지 않는 강한 신념은 타고날 때부터 깨끗한 것이 아니라 깨끗해지기 위해서 수없이 닦고 닦인 것이기에 맑고 깨끗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만들어지는 순수함은 어떤 가치와도 맞바꿀 수 없는 소중한 힘이 된다.
순수함은 어떤 사건과 부딪히더라도 그 자신이 그 일을 지속해야 하는 이유가 된다. 피곤함도 잊게 만드는 이 힘은 사람으로 하여금 절대로 포기하지 못하게 만들며 오늘이라는 내일을 끊임없이 내다보게 만든다. 순수함은 닥쳐오는 그 어떤 고난과 역경이라도 이겨낼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하며, 고난과 역경을 이겨낸 사람은 절벽 위에 피어난 고고한 꽃처럼 아름답게 피어난다.
순수한 사람들은 본질적인 즐거움을 추구하며 살아간다.
어떤 상황에서도 웃고 감사하며 성장하는 과정에서 피워낸 힘으로 세상을 자신의 색으로 칠해나간다.
우리는 행복해지기 위해서 살아간다.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서 살아간다.
우리는 행복하길 원한다.
행복은 여러 가지 방법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퇴근 후 마시는 맥주 한 잔에, 주 중 후엔 찾아오는 주말에, 게임 속의 승리 후에, 맛있는 밥 한 끼에.. 사소한 것들로부터 느끼는 행복감들도 있지만 역시 가장 큰 행복은 꿈의 실현일 것이다. 행복이라는 상태는 일시적이고 상대적이기에 우위를 가릴 수 없지만 등급을 매길 순 있다.
지금 찾아온 행복이 다음 행복을 가져올 수 있는가?
다음 행복에 얼마큼 영향을 미치는가?
지속 가능한 행복인가?
여러 가지 기준에 따라 행복의 기준은 달라진다. 그런 관점에서 꿈의 실현이라는 것은,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의 연속이며 때론 누군가의 갈채를 받을 수도 있고 때론 부를 가져오기도 한다. 많은 선택지 속에서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자유도는 높아지면서 행복이라는 상태는 유지되기 때문에 어떤 행복의 등급보다 높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꿈의 실현이라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단순한 과정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기에 고귀하며 다른 이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다. 그 자신은 타인에게 인정받기 위해 행동한 것은 아닐 테지만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영향력은 자신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증서가 되어준다.
사실 그런 것들을 다 떠나서 꿈을 이뤄낸다는 것은 행복 그 자체에 가까워지는 일이다. 꿈이라는 것은, 틀을 정해놓고 이뤄냈다!라고 말하기는 애매한 부분들이 많다. 하지만 추상적인 목표는 계속해서 더 높아지는 것이기에 어느 순간부터 꿈은 이루어졌다고 봐도 될 것이다. 꿈을 이룬 사람들은 언제나 여유롭다. 마음 한편에 커다란 공간을 만들고 어느 것이든 수용하며 살아간다.
누군가에게 각박하게 굴지 않으며 쫓기듯 살아가지도 않는다. 그저 모든 것을 부유하듯 바라보며, 그 자체를 느끼며 살아간다.
행복이란, 사실 모든 굴레를 던졌을 때 찾아오는 게 아닐까?
꿈이란 목표를 달성해서가 아니라 꿈이란 족쇄를 벗어났기에 비로소 찾게 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자신이 속해 있는 분야는 이미 손발 다루듯 자유롭게 통제할 수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어떤 것을 하더라도 제약을 받지 없으며, 막대한 부 또한 따라오기에 정말로 그 어떤 것에도 자유로운 상태. 그것이 행복이 아닐까? 하는 생각한다.
행복은 본질적으로 어린아이가 느끼는 감정 그 자체가 아닐까? 생각한다.
어린아이들은 대부분 아직 부모님의 치마폭에 보호받으며 내가 꿈에 그리던 무언가를 이룰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며 자신의 한계 같은 것은 상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역설적으로 모든 것에 대해 자유로울 수 있다. 히사시 조가 보여준 표정은 어린아이의 그것과 동일했다. 다양한 굴레로부터 탈피하여 어디든 갈 수 있을 것 같은 그 표정. 언제, 어디든, 무엇이든 할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 확신. 어린아이의 상태는 행복 그 자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지금의 난 그렇게 행복하지도 행복하지 않은 상태도 아니다. 굳이 어느 쪽을 선택하라고 한다면 행복한 쪽에 속해있겠지만, 물질적으로는 안정적일지라도 정서적으로는 안정적이지 못하기에 아직은 갈망하고 배고파하는 중이다. 가끔 히사시 조와 같은 표정을 짓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나도 언젠간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을까? 생각한다.
유튜브나 뉴스를 통해 난동을 부리는 어르신 이야기를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다. 쭈글쭈글한 특유의 주름은 인상을 얼마나 썼는지 알게 해주는 나이테 역할을 한다, 그분들은 자신의 권리를 강력하게 주장하며 관심을 필요로 한다. 우리는 현인을 떠올릴 때 지긋한 나잇살을 먹었더라도 희미하게 미소를 띠며 여유 있는 통달한 사람을 떠올린다.
하지만 실제로 접하는 대부분의 어르신들은 무엇에 그렇게 화나있는지 인상이 잡힌 미간은 펴지질 않은 채 듣는 이를 고려하지 않는 이야기를 늘어놓곤 한다.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얼마나 지루한 삶을 살아왔는지 또 살아가고 있는지 저절로 알게 된다.
행복하지 않은 인간은 듣는 이를 필요로 한다.
자신의 이야기에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기 때문이다.
행복한 사람은 굳이 듣는 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자신의 이야기에 모두가 관심을 가지기 때문이다.
인간은 태어나서 땅으로 돌아갈 때까지 끊임없이 행복해하고 싶어 한다. 인간은 스스로가 느끼는 행복지수가 낮아지면 부족한 만큼의 행복을 채우기 위해서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발생시켜 계속해서 등을 떠민다. 하지만 외로움으로 틀어막은 구멍은 언젠가 터지기 마련이다. 다시금 비어버린 공간을 채우기 위해 우리는 꾸역꾸역 앞으로 나아간다.
좋지 않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우리는 지금 걷고 있는 길이 언제일지 모를 행복을 위한 것이라며 자위한다.
원하지 않은 일을 하면서 세상은 원래 그러니까 어쩔 수 없어라고 이야기하며 눈과 귀를 틀어막고 피해자 행세를 한다.
하지만 세상은 제법 정직하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손에 넣기 위해 필사적으로 행동하는 이에게 크든 작든 세상은 그에 맞는 코멘트를 달아준다. 이 진리는 손에 넣어본 사람만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주위를 둘러보자. 히사시 조와 같은 표정을 짓는 이가 있다면, 이는 필시 원하는 것을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대로 살아가기 때문이라.
분명한 건 많은 사람들이 웃으면서 임종을 맞이하지 못한다.
우리는 어떨까?
마지막 순간에는 웃으면서 모든 일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나이, 성별, 환경 등을 핑계를 만들면서 하지 못한 것에 대해 후회하면서 늙어갈까?
혹은 철없는 어린아이처럼 보이더라도 행복을 끌어앉고 살아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