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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남설 Dec 20. 2023

자동차가 탄압하는 제주의 가로수

정실마을 구실잣밤나무길의 운명은

제주에서는 요즘 도로를 넓힌다고 여기저기에서 가로수를 뽑으려고 한다.


제주도청에서 한라산 오르는 길로 가다 보면 만나는 월정사 인근엔 '정실마을'이란 동네가 있다. 이 마을 주민들은 1978년 대통령이 근처 관광지 개발사업 시찰 차 이곳을 지날 거란 얘기에 길가에 가로수를 새로 심으며 단장하는 일에 동원됐다. 안타깝게도 계획과 달리 대통령의 동선이 바뀌었다. 어쨌든 그렇게 정실마을 특유의 구실잣밤나무 가로가 생겨났고, 그 나무들은 이제 반백 살이 됐다. 도로에 터널처럼 드리운 가지와 이끼가 가득 핀 두툼한 둥치가 나무의 시간을 전한다.

제주 정실마을 인근 구실잣밤나무 가로수길. ⓒ허남설

그런데, 이 구실잣밤나무 70~80그루가 조만간 잘려나갈 수도 있다고 한다. 제주시는 이곳을 지나는 2차선 도로를 4차선 도로로 넓히려고 한다. 만성이 된 교통체증 때문이다.


제주공항 인근 제성마을에서도 왕벚나무가 같은 이유로 잘려나갔다. 제주 북쪽을 동서로 지나는 서광로의 풍경은 지금 상당히 우스꽝스럽다. 역시 도로를 넓히려고 가로수를 베었는데, 항의가 빗발치자 도로 공사를 없던 일로 했다. 나무는 이미 뽑고 말았으니, 대신 그 자리에 묘목을 심었다. 듬성듬성 덩그러니 자라는, 겨우 무릎 높이나 될까 한 키 작은 나무를 보면 헛웃음이 나온다.

제주 서광로. 가로수를 자르고 심은 묘목 반대편으로 원래 가로수가 보인다. ⓒ허남설

제주는 내지인도 외지인도 승용차 의존도가 높은 지역이다. 환경을 생각해 전기차 이용을 촉진한 지난 약 10년 동안 등록 차량 수는 거의 2배로 늘었다. 물론 전기차가 거의 '제로(0)'에서 2만5000여대로 크게 늘었지만, 전체 차량 중 전기차가 차지하는 비중은 6~7%에 불과하다. 전기차도 많이 늘었지만, 내연차도 무섭게 많이 늘어난 결과다.


민선 8기 들어 이걸 한번 바꿔보겠다고 대대적으로 자전거 정책을 짜거나, 수소버스·수소트램 등 도입으로 대중교통 다양성을 높이고 탄소중립을 추구할 방안을 구상 중이다. 그런데, 같은 제주 행정당국 안에서도 어느 부서는 자전거 도로를 내기 위해 도로를 다이어트하려고 하고, 또 어느 부서는 차량 정체가 심해 도로를 넓혀야 한다며 멀쩡한 가로수를 베려고 한다.


제주의 한 '어공'분이 이 상황을 전하며 목덜미를 잡고 뒤로 넘어가는 제스처를 취했다. "행정이 늘 하던 대로 하려는 관성이 사실 되게 무서운 거예요. 갈 길이 멉니다."

제주 정실마을 인근 구실잣밤나무 가로수길. ⓒ허남설


*참고자료

- 박미라, 「[탄소중립 제주, 미리 가 본 미래 ③] 육지보다 10년 앞선 제주의 전기차 시대…내연차도 늘어 탄소중립 더 멀어졌다」, 『경향신문』, 2022년 1월 13일

- 허호준, 「대통령 지나간다기에 심은 구실잣밤나무…이젠 잘려 나갈 위기」, 『한겨레신문』, 2023년 12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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