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랫한 지붕 아래 서로 다르게 생긴 블럭을 옹기종기 모아놓은 듯한 건물. 을지로 기업은행, 청계천 삼일빌딩, 여의도 KBS 등을 디자인한 김중업의 1989년 작, 군산시민문화회관.
이 건물이 있는 군산 나운동은 1990년대까지 서울의 압구정 같았다고 한다.군산시민문화회관은 이름 그대로 공연과 전시 등 시민문화의 중심 역할을 했다. 그러나, 2013년 군산 예술의전당 개관 이래 건물도 동네도 활력을 잃었다. 1년 중 사람이 차는 날보다 비는 날이 압도적으로 더 많은 858석 규모 공연장과 부대시설을 굴려봤자 쌓여가는 건 공공부문 적자뿐.
ⓒ허남설
군산시는 어차피 잃을 게 없다고 판단했을까? 대담한 실험을 시작한다. 그간의 운영 방식은 민간위탁 운영자가 수익을 내면 회수하고(물론 그럴 일은 없었다), 적자를 내면 메워주기. 여기서 벗어나 카페를 열든지 굿즈를 팔든지 해서 수익 한번 마음대로 내봐라, 대신 번 돈으로 공연장 잘 굴려서 시민문화에 기여 좀 하라는 식으로 바꿨다. 실험 기간은 무려 20년.
뭐 별 거냐 싶겠지만, 특혜 및 공정성 시비에 취약하고 민간/공공 딱딱한 이분법에 익숙한 우리 현실에선 온갖 법 조항을 퍼즐 조각처럼 끼워맞춰 근거를 만들어야 했다고.
오늘은 그 군산시민문화회관이 잠에서 깨어나 뒤척거리다 기지개를 크게 한번 켠 날이었다. 8월 31일, 9월 1일 이틀 간 열리는 ‘군산북페어’ 첫날. 오전부터 사람이 바글바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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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 좋게도 관계자 안내를 받아 옥상까지 회관 구석구석을 둘러봤다. 출판사 등 100개 셀러들은 ‘무대’와 ‘객석’이란 역시 딱딱한 이분법을 지운 공간에 자리를 폈다. 권위적인 포디움엔 구멍을 뚫어 어린이와 장애인, 노인 모두가 쉽게 건물로 들어올 수 있는 길을 냈다. 김중업이 1984년에 그린 시민문화의 장은 이렇게 돌아와 2024년의 달라진 시민문화에 적응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