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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반기독교적인 책", 다시 읽는 카뮈의 '페스트'

죄 없는 인간의 죽음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by 허남설

알베르 카뮈가 쓴 소설 <페스트>는 감염병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감염병의 도래와 종말, 감염자의 고통과 죽음이 이야기 전반을 뒤덮지만 이것은 명백히 무신론에 관한 이야기다. 물론 소설 속 감염병 페스트는 코로나19에, 도시 오랑은 대구에 대입되고, 의사 리외와 보건대의 투쟁은 고글과 마스크로 얼굴이 상처투성이가 된 의료진을 떠올리게 한다. 소설처럼 코로나19도 많은 희생을 낳았고, 언제 그랬냐는 듯 서서히 종식으로 가는 듯하다.


하지만 카뮈는 <페스트>를 두고 "가장 반기독교적인 책"이라고 자평했다고 한다. <페스트>는 신 이외엔 아무도 통제할 수 없을 감염병을 통제하지 않는, 혹은 통제하지 못하는 신을 노골적으로 거부한다. 페스트는 꼭 페스트가 아니라 다른 무엇으로 대체해도 괜찮다는 식이다. 카뮈가 정작 이야기하고 싶은 건 감염병이 아니라 무신론이기 때문이다. 그는 소설 속 무수한 죽음 가운데 유독 두 죽음을 자세하게 묘사하며 무신론을 전개한다.


한 소년의 죽음이 신에 대한 논쟁을 제기한다. 카뮈는 판사인 오통의 아들이 죽는 모습을 시시각각으로, 다소 잔인하다 싶을 정도로 세밀하게 그린다. 이 아이는 '마치 누가 위장을 잡아 뜯기라도 하는 듯 가냘픈 신음 소리를 내면서' 괴로워하다가, '굵은 눈물이 납빛이 된 얼굴 위로 흘러내리기 시작했고', 결국 '인간의 것이라기에는 너무나도 이상한, 마치 모든 인간들에게서 한꺼번에 솟구쳐 나오는 것만 같은 비명'을 지르며 죽는다.


의사 리외는 이 죽음을 함께 지켜본 신부 파늘루에게 피를 토한다. "이 애는 적어도 아무 죄가 없었습니다."(리외) "아마도 우리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해야 할지도 모릅니다."(파늘루) "어린애들마저도 주리를 틀도록 창조해 놓은 이 세상이라면 나는 죽어도 거부하겠습니다."(리외)


파늘루는 앞서 어느 일요일 예배에서 "여러분은 불행을 겪어 마땅하다"라고 설교했다. 그는 예배에 참석한 청중을 무릎 꿇린 뒤 "피비린내 나는 고통의 타작마당에서 두들겨 맞아 여러분은 짚과 함께 버림받을 것"이라며 "여러분을 괴롭히는 그 재앙이 도리어 여러분을 향상하고 여러분에게 길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했다. 페스트는 회개하지 않는 사악한 인간을 가리기 위해, '짚과 낟알'을 가리기 위해 인류를 타작하는 과정이란 것이다.


죽은 소년은 과연 무슨 죄를 지었나. 이 죽음마저도 신의 타작인가. 소년은 가려내야 할 짚이었나. 이것이 리외를 화나게 했다. 파늘루의 세계에서 인간은 신에게 늘 패배하는 존재이지만 리외의 세계에서 신은 싸워야 할 대상조차 되지 못한다.


리외는 원래 신을 믿지 않았다. 그는 파늘루의 설교를 들은 뒤 타루와 대화하며 "페스트를 용인한다는 것은 미친 사람이나 눈먼 사람이나 비겁한 사람의 태도일 수밖에 없다"라고 단언한다. 만약 어떤 전능한 신을 믿는다면 페스트의 치료는 의사가 아닌 신에게 맡기면 된다. 하지만 파늘루처럼 신의 숭배를 업으로 삼는 인간조차도 그런 식으로 신을 믿는 사람은 없다. 죽음과의 싸움은 결국 인간의 몫이다. 이 전투에 신이 끼어들 자리는 없다. 리외의 무신론은 소년의 죽음을 거치며 더욱 단단해진 것으로 보인다.


파늘루 역시 리외가 소년의 죽음 앞에서 신에 대한 절절한 항변을 토해낸 이후 흔들린다. 그는 어느 일요일, 앞서 '신의 타작'을 늘어놓은 설교를 할 때와는 달리 "여러분"이 아니라 "우리들"이란 말을 쓴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파늘루의 주장은 결국 "우리는 신을 혐오하든가, 사랑하든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그런데 대체 누가 감히 신에 대한 증오를 택할 수 있단 말입니까?"란 데서 머무른다. 그는 며칠 뒤 소년처럼 얼굴에 납빛을 띠며 앓다가 피를 토한 뒤 결국 침대 밖으로 몸을 축 늘어뜨린 채 죽는다. 다만 사망 직전까지도 리외는 "페스트의 주요한 증세는 하나도 없다"라고 진단한다. 페스트 한복판에서 '병명 미상'의 죽음을 맞이한 신부는 신의 짚인가, 낟알인가.


카뮈는 <페스트>에서 소년의 죽음으로 물음을 던지고 신부의 죽음으로 답하면서 그의 무신론을 완성한다. 죄 없는 인간의 죽음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 묻기 위해 소년을 죽이고,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죽음이 있다고 답하기 위해 병명 미상으로 신부를 죽인다. 인간의 죽음과 신이 행하는 주요한 기능 중 하나인 단죄의 연결고리를 이렇게 끊어낸다. 설령 신이 페스트를 보냈다고 해도 순순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인간은 없다. 파늘루는 죽는 순간까지 십자가를 손에서 놓지 않으면서도 리외의 치료 역시 거부하지 않았다. 근본적으로, 무엇보다 페스트를 보내는 신을 인간이 받아들여야 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페스트를 전쟁이나 테러, 기근, 쓰나미, 하다못해 교통사고 따위로 바꿔도 유효한 질문과 답이 될 것이다.


페스트 | 지은이 알베르 카뮈 | 옮긴이 김화영 | 2011년 3월 |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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