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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남설 Aug 10. 2023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죗값

전 국민이 무량판을 알게 한 사태

ⓒrawkkim on Unsplash

우리의 아파트는 수명이 짧다. 30~40년을 버티지 못하고 '경축! 재건축' 현수막을 내건다. 저 콘크리트 덩어리에 무슨 문제가 생긴 걸까? 콘크리트는 100년, 아니 200년도 거뜬하다니까 그럴 리는 없다. 로마 시대 건설한 판테온 역시 콘크리트 건축물인데 2000년 가까이 그저 멀쩡하다.


문제는 콘크리트가 아니다. 콘크리트 벽 너머에 감춰져 평소엔 보이지 않는 설비(수도, 난방, 전기 등)가 낡으며 말썽을 부리기 때문이다. 지은 지 20~30년만 지나도 "녹물 나오는 집에서 어떻게 살란 말이냐"는 불만이 터져 나온다. 설비를 싹 바꿔주면 되는데, 설비만 쏙 바꾸는 건 안된다. 설비를 감추고 있는 콘크리트 벽을 다 깨부숴야 한다. 공사가 장난이 아니다. 20~30년마다 이 짓을 해야 하는데, 대체 유럽에 흔하다는 100년 넘은 집은 어떻게 가능한 걸까?


이 낭비는 다 우리가 아파트를 짓는 방식 때문에 생긴다. 인류 최초의 건축이라는 스톤 헨지, 서구 건축의 유전자를 뿌린 파르테논, 근대 건축의 논리를 선전한 빌라 사보아 모두 기둥에 바닥을 얹었는데, 우리의 아파트는 기둥이 아니라 벽체에 바닥을 얹는다. 무거운 바닥을 가느다란 기둥에 올리는 것보다, 평면에 골고루 퍼진 벽체에 올리는 게 훨씬 더 쉽고 빠르다. 건설 현장에서 속도는 곧 돈이다. 날마다 건설비로 '땡겨온' 자금에 붙는 이자는 불어나고, 현장 인부들 일당에 밥값이 줄줄 흘러나간다. 필사적으로 아파트를 빨리 짓기 위해 택한 게 벽식 구조다.

빌라 사보아ⓒWikimedia Commons(Alessio antonietti)

쉽고 빠를 뿐만 아니라 분양 수익도 더 벌어준다. 기둥식 구조와 비교해 한 층 올릴 때마다 '30센티미터'씩 이득이 되기 때문이다. 벽식 구조에서는 위층 바닥과 아래층 바닥이 3미터 떨어져 있다면, 입주자가 사용하는 실제 한 층의 높이 역시 3미터라고 봐도 무방하다. 하지만, 기둥식 구조에서는 기둥과 기둥 사이에 보라는 가로형 구조물이 들어가는데, 이 두께가 30센티미터는 족히 된다. 그래서 보 아래로 실제 천장을 대면, 입주자가 사용하는 실제 한 층의 높이는 2.7미터가 된다. 30센티미터를 손해 보는 셈이다.


한 층에서는 겨우 30센티미터지만, 한 동을 넘어 한 단지 수준으로 가면 몇 개 층에 몇십 세대 차이가 나게 된다. 예를 들어, 한 동의 높이가 30미터에 거주자가 실제 사용하는 한 층의 높이가 3미터인 아파트를 짓는다고 치자. 이때 벽식 구조로 하면 3미터 간격으로 콘크리트 바닥을 쌓아서 10층 아파트를 지을 수 있다. 그런데, 기둥식 구조를 쓰면 보 두께인 30센티미터를 고려해야 하므로, 3미터가 아닌 3.3미터 간격으로 바닥을 쌓아야 한다. 그럼 이 아파트는 높이 30미터 안에서 9층밖에 안 나온다. 집을 팔아 돈을 버는 입장에서는 벽식 구조가 더 낫다.


그런데, 이 벽식 구조에는 치명적 단점이 있다. 아까 이야기했듯 아파트 안에 복잡하게 담긴 설비를 주기적으로 바꿔줘야 하는데, 그러면 벽체를 다 들어내야 한다는 점이다. '벽식' 구조, 즉 기둥 대신 벽이 바닥을 받치는 구조이므로 벽체를 부수면 아파트는 무너진다. 원래 아파트를 부순 자리에 다시 아파트를 짓는 게 재건축이다. 그리고 벽식 구조는 마치 드럼통과 같아서 사는 내내 층간소음에 시달린다. 이미 벽으로 공간이 구획돼 있기 때문에 입주자 마음대로 방과 거실의 위치를 바꾸지도 못한다.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이 모두 똑같이 생긴 집에 살게 된 이유다.


그럼 대안으로 기둥식 구조를 택하면 되지 않을까? 기둥과 기둥 사이에 가벽을 세워서 입주자 마음대로 공간을 꾸밀 수 있고, 층간소음도 덜하고, 설비가 낡으면 가벽만 해체해서 리모델링하는 게 가능하니 말이다. 하지만 대부분 그러지 않았다. 건설사는 아파트를 지어 분양 수익만 거두고 빠지면 그만이니까. 애초 지을 때 세대 수가 더 많이 나오는 벽식 구조가 더 낫다. 우리의 아파트에서 벽식 구조가 지닌 논리는 이렇게 탄탄하다.

일반 기둥식 구조(왼쪽)와 무량판 구조 개념도ⓒ허남설

지금 '순살아파트' 때문에 논란의 중심에 선 무량판 구조가 사실 이 논리적 귀결에 일부 균열을 낸 존재였다. 기둥식 구조에서 보를 없애는 대신 철근을 더 넣었다. 벽식 구조와 똑같이 한 동의 높이가 30미터라면, 한 층에 3미터씩 총 10층을 넣을 수 있게 됐다. 층간소음이 덜하고, 나중에 리모델링이 쉽고, 입주자에게 자유롭게 공간을 구성할 여지를 주는 기둥식 구조의 장점은 그대로 남았다. 벽식 구조와 기둥식 구조의 장점을 각각 취하며 고층 아파트에 나름 혁신적 절충안을 제시한 셈이다. 그래서 트○○○, 파○○○ 등 고급 주상복합 아파트들은 무량판 구조를 취했다.


하지만 속성 자체가 바뀐 건 아니었다. 마땅히 넣어야 할 철근을 빼먹어 이 파장을 낳고 있으니 말이다. 사고가 난 아파트는 지하주차장에 무량판 구조를 썼다. 땅을 파야 지하에 주차장을 만들 것인데, 땅 1센티미터 파는 일도 역시 다 돈이다. 그런데, 주차장을 만들 때는 차가 다닐 통로와 되도록 많은 주차면을 확보하는 게 관건이므로, 유연함이 덜한 벽식 구조 대신 빈 공간을 많이 확보할 수 있는 기둥식 구조를 쓸 수밖에 없다. 3미터 높이 주차장을 만들려면, 기둥식 구조로는 보 두께 30센티미터를 감안해 3.3미터를 파야 한다. 그래서 보 없이 3미터만 파면 되는 무량판 구조를 쓴다. 단, 30센티미터 덜 판 돈으로 철근을 열심히 보강해야 했는데, 그러지 않아 결국 이 사달을 냈다. 건설업계에서는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철근 가격이 2배로 뛰었다"며 그 배경을 넘겨짚는 말이 들린다.


이번 사건으로 '무량판 포비아'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혼란이 커지고 있다. 무량판 구조로 지었다는 아파트에 사람들은 불안에 떠는 모양이다. 무량판을 아예 죄악시할 조짐마저 보이자, 이제는 "무량판은 죄가 없다"라며 옹호하기도 한다. 맞는 말이다. 무량판 아파트는 잘만 지으면 사는 사람에게도 좋고, 재건축을 남발하지 않아도 되니 환경에도 좋다. 고로, 무량판은 죄가 없는 게 맞다. 속도와 분양 이익에만 몰두한 이 '콘크리트 유토피아'에 죄를 묻는다면 또 모르겠지만. 지금 그 죗값을 치르는 중일 수도 있고.


*참고자료

연규욱·이희수, 「반포써밋·트리마제도 '무량판 포비아'… 10년 된 단지도 조사 추진」, 『매일경제』, 2023년 8월 2일 자.

이혜진, 「[여명]'무량판은 죄가 없다」, 『서울경제』, 2023년 8월 4일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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