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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남설 Aug 27. 2023

요절하는 건물을 떠나보내는 방법

논현동 문영빌딩의 '유통기한 프로젝트'

서울 강남구 논현동 86-7번지 문영빌딩은 1988년에 태어났다. 학동역 사거리 한쪽 귀퉁이에서 뒷길로 접어 들어가면 나오는 건물이다. 주변 건물에 비해 가로로 긴 편이어서 존재감을 제법 내지만, 그밖에 이렇다 할 특징은 없다. 겉면에 두른 상아색 타일이나, 입구에 걸린 이름 '文永빌딩'의 한자와 영어독음 조합이 이 건물이 탄생한 시절을 짐작하게 한다.


양쪽 가장자리에 매달린 기다 간판 거치대는 이 건물이 한때 밀도 높은 상가였다고 전한다. 간판은 경관을 망치는 주범이자 잔인한 경쟁 사회의 증거이지만, 동시에 도시의 정체성을 이룬 요소이자 활력의 상징이기도 하다. 거리에서 간판 없이 덩그러니 선 건물을 마주하면, 어딘가 이질적이면서 생기가 없다고 느낄 게 틀림없다. 경쟁력 없어 도태된 패배자 취급을 받을 것이다.


문영빌딩은 그런 건물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현 소유주는 2021년 2월 재건축을 염두에 두고 문영빌딩을 사들였으면서도, 이 건물이 그렇게 맥없게 사라지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나 보다. 건물에 '2년'이란 시한을 주고, 그 시간을 기념하고자 한다. 임차인들이 떠난 건물의 간판을 모두 걷어내 문영빌딩의 원래 살갗을 드러내면서, 이 기념식의 이름 'EXP: 8 SEASONS'를 새겼다. 이른바 '유통기한(expiration date) 프로젝트'다. 문영빌딩은 2025년 5월 26일까지 1층에 특별하게 꾸민 카페 공간에서 여전히 손님을 맞이하고, 3~4층에서 다양한 전시·판매 등 '팝업(pop-up)' 행사를 열면서 8번의 계절(8 SEASONS)을 보낼 예정이다. 간판의 옷을 모두 벗은 문영빌딩은 마치 '나는 원래 이런 건물이었다'라고 말하는 것만 같다.

ⓒ허남설
ⓒ허남설
ⓒ허남설
ⓒ허남설

이 기념식은 건물의 남은 생을 기리며, 그 끝을 매듭짓는 방식에 관해 생각하게 한다. 우리 시대 건물들은 분명 '요절'하고 있다. 철근 콘크리트로 지은 건물은 100년도 거뜬히 가지만, 상업적 요구는 그 수명을 고작 30~40년 정도로 앞당긴다.


건물의 처지에서는 짧은 생의 마감도 억울한데 그 마지막 순간조차도 대개는 명예롭지 못하다. 기능이 불편한 건물, 유행에 뒤처진 건물, 경쟁에 패배한 건물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임차인들의 기피 대상이 된다. 30~40년 생에서 결코 짧지 않은 2~3년을 그런 낙인이 찍힌 채 보내며 서서히 죽어간다. 단명마저 온전히 살아내지 못하는 셈이다. 건물의 생애를 기념하는 걸 넘어 제대로 활용하기 위해서라도 지금 우리에게는 문영빌딩에서 거행되는 것과 같은 의식이 필요하지 않을까.


영국 사회적 기업 '민와일 스페이스(Meanwhile Space)'의 프로젝트는 문영빌딩의 '유통기한 프로젝트'와 비슷한 발상의 사업화 가능성을 보여준다. 민와일 스페이스는 이름(Meanwhile: 그 사이, 그동안) 그대로 재개발 직전 건물의 쓰임새가 애매해진 것과 같은 바로 그런 시간에 개입한다. 건물주는 어차피 인기가 없는 건물을 임대해 수익을 거둘 수 있고, 민와일 스페이스는 비교적 저렴하거나 혹은 무료로 임차해 지역사회에 필요한 용도(소매점, 공유사무실, 문화 및 여가공간)를 제공한다. 그 건물주가 명성과 규모가 꽤 큰 기업형 디벨로퍼나 공공부문이라면 이런 활용을 통해 사회적 공헌에 기여하는 셈이 된다. 도시 전체적으로 보면, 일부 지역과 건물에서 확산될 수 있는 슬럼화를 막는 순기능 또한 있다.

국내에서도 이와 비슷한 사례로 서울 성동구 송정동의 '1유로 프로젝트'를 들 수 있다. 오래된 다세대 주택 건물 소유주가 공간을 사실상 무료로 임대하면서 이 동네 변두리의 낡은 건축물이 활력 넘치는 상업건물로 재탄생했다. 이 건물에는 커피, 요리, 반려견, 향수, 서핑, 정원, 사진 등 다양한 점포가 들어와 영업 중이다. 1유로 프로젝트는 이탈리아 등 유럽에서 유산으로서 가치가 있지만 텅 빈 채 방치된 고택 등 건축물을 단돈 1유로에 임대해 활용 방법을 찾고자 한 데서 유래했다.


*참고자료

- 민와일스페이스 홈페이지 https://www.meanwhilespace.com/

- 김지아, 「철거를 앞둔 빌딩의 활용: '윤현상재 유통기한 프로젝트'」, 『SPACE』 668호, 2023년 7월

- 홍현진·강민수, 「372평 땅 5년간 공짜로 빌려준 부동산회사... 진짜?」, 『오마이뉴스』, 2013년 2월 22일

- 이혜운, 「임대료가 3년에 1유로! 착한 건물주와 꿈꾸는 건축가가 만든 기적」, 『조선일보』, 2023년 4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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