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질 에세이의 서막
“초판을 찍자”라는 슬로건이 걸린 김해 독서대전을 위한 수업이 진행되고 있다. 말 그대로 나의 이야기로 초판을 찍기 위한 여정이다. 매주 화요일 오후 7시-9시는 강의를 듣기 위해 도서관에 간다. 나는 글과 책이 있는 곳에 자꾸 기웃거리고 있다. 독서모임에 참여하여 책을 읽고, 독서모임을 만들어 책을 읽는 상황을 만들었다. 언제나 책과 글이 있는 곳에 열정을 쏟으니 나의 짝지는 불만스러워한다. 도대체 그는 왜 불만스러운 걸까?
나는 매주 화요일 오후 7시-9시. “초판을 찍자” 수업 중이다.
열 살짜리 딸아이가 있다. 딸아이에게 저녁 7시-9시라는 시간은 아직 무섭다. ‘나 홀로 집에’가 불가능하다. 그로 인해 딸아이를 데리고 수업에 참여해야 하는 날이 잦다. 한 달에 두 어번 정도는 남편의 이른 귀가를 독려하면 아이를 맡길 수 있다. 나는 공동의 양육자인 남편에게 아이를 맡긴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는 것이 씁쓸하다. 사실, 남편은 그림자 혹은 사람 냄새만 풍기고 있으면 족하다. 이맘때 여자아이는 혼자서도 사부작 할 일이 많다. 어둠을 지켜 줄 어른만 필요하다. 매주는 아니더라도 한 달에 두어 번 정도. 그가 아이와 나를 위해 시간을 마련해 주기를 바랐다. 그런데 두어 번 중에 한 번을 그는 깜박하고 약속을 잡았다.
“내일 나, 도서관 수업 가는 날인데, 술 약속을 잡았어?”
“아~ 깜박했다. 미안해.”
“그래? 어쩔 수 없지. 데리고 다녀와야겠다.”
그렇게 말을 끝내고 돌아섰는데 왠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억울한 감정은 있는데, 화는 나지 않았다. 보통 억울하면 화가 나는 게 정상 아닌가? 그는 당연했고, 나는 그의 당연함이 너무 당연했던 것이다. 주부로서의 내가 뭘 배우고, 누구를 만나고, 급한 용무가 생기면 그에게 도움을 청했다. 나의 개인적 용무에는 허락을 받아야 하는 건 아니어도 양해를 구해야 했다. 그가 시간이 안 되면 딸아이를 동행할 것이었고, 시간이 된다고 하면 남편과 아이의 끼니를 준비해 놓고, 딸아이가 해야 할 공부를 시켜놓고, 먹었던 식사를 정리해 놓고서야 외출을 하는 것이 편했다.. 필시 아이를 시댁에 맡겨도 불편하다. 내가 하는 외출이 꼭 필요한 것인지 자기 검열을 신중하게 한다. 타인의 이해를 눈치 봐야 하기 때문이다. 굳이 아이를 맡기는 상황이 되면, 그나마 남편이 덜 불편한 쪽이다. 하물며 덜 불편한 남편에게 아이를 맡겨도 나가는 과정이 심플하지만은 않다.
나의 부재는 누구를 불편하게 한다. 아무도 불편해하지 않도록 나는 애쓰고 있었다. 그게 당연한 것처럼 체득되어있었다. 너무 자연스러워서 생각했다. 나의 유전자 안에 내재된 것 아닐까? 엄마들이, 여자들이 물려준 유전. 아니면, 사회적 동물로서 키워지면서 모든 구조적 장치들이 여자에게만 불합리적 사고의 흐름을 하도록 강요된 것은 아닐까? 그래서 그에게 다시 물었다.
“매주 화요일에는 내가 뭘 하는지 말을 했잖아. 겨우 두 번 정도. 애는 집에 있어서 좋고, 나는 혼자 홀가분하게 다녀올 수 있는데. 약속을 잡았어?”
“아니, 깜박했다니까.”
“약속을 잡기 전에 물어봤어야지.”
“뭐, 한 번쯤 빠져도 되는 거 아니야? 그리고 네가 좋아서 하는 일이잖아.”
“그럼, 당신 약속은 꼭 필요한 거였나? 술 마시고, 친목 도모하는 게. 일의 연장이라는 핑계로.”
“누가 하지 말라는 거냐? 굳이 서로 불편하게 하면서 네가 하는 거잖아.”
“누굴 불편하게 한다는 거냐? 내가 하는 일은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거고, 당신이 술 약속 잡는 건 불편하게 하는 일이 아니고?”
비단 이 번 일만 그런 건 아닐 것이다. 수없이 많은 상황 속에 그의 당연함을 나의 당연함으로 받아들였던 순간이 많았을 것이다. 그 밑바탕에는 남자라는 이유와 가족의 경제력을 책임지는 자의 폭력성이 내재되어있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지금 내 삶에 빌런은 당신이었네.”
그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사실은 억측스럽고, 폭력성을 가지고 있음을 알려주고 싶었다. 같은 공간에서 삶을 공유한다는 것에는 네 일과 나의 일이 나누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그가 책임지는 경제활동을 위한 시간을 내가 지켜주고 있는 것이고, 내가 책임지고 있는 가정을 잘 가꾸어가는 것 또한 그가 지켜주고 있음을 나는 안다.
그가 향유하고자 하는 즐거움이 있듯, 내가 향유하고 싶은 즐거움이 있다. 서로가 존중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각자의 향유를 한쪽으로 기울여 잣대를 높이거나, 낮춘다면 그건 폭력이다. 말하지 않으면 모른다고 하니 말을 했다. 나는 당신이 좋아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응원해 줄 것이다. 당신도 내가 좋아하고 삶을 지향하는 쪽을 적극적으로 응원해 주길 바란다고.
그는 말했다.
“와~ 뒤끝 장난 아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