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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hy Oct 02. 2015

공감(共感)이 시작이다

있는 그대로의 인정

'트랜스젠더'하면 어떤 생각이 떠오르세요?

아니 정확하게 물어보면 어떤 감정이 자연스레 올라오세요?


스스로의 성별을 생물학적인 성별과는 일치하지 않는다고 여기는 사람이다. sex와 gender가 다른 사람. 약칭 트랜스 혹은 트랜. 국내의 경우 트젠이라고 하기도 한다. 동성애자인 게인(남자)나 레즈비언(여자)와는 다르다.

나무위키 : 트랜스젠더


개인적으로 솔직하게 이야기한다면, 이성적으로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니까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당연하지. 차별도 반대야"라고 생각하지만 심정적으로는 왠지모를 거부감이 들고 피하고 싶고 내 가족은 아니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몇년 전 트랜스젠더가 많기로 유명한 태국을 패키지 여행할 때 들린 극장에서 단체로 공연하는 것으로 보고는 나름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2시간 남짓 지나면서 또 그럴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도 들었다. 아마 여행 중이라, 그것도 해외라 더욱 너그러운 마음이 아니었을까.


머리로는 이해하려고 하지만 가슴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든 무엇.

며칠 전 EBS에서 방송한 다큐멘터리 '내 딸은 트랜스젠더입니다'를 우연히 보고난 뒤 여러 생각과 감정이 올라왔다.  수술까지 한 트랜스젠더더인 딸(원래 아들)과 아버지가 필리핀 여행을 하면서 벌어지는 모습을 그리는데 예상한 대로 '딸'로 받아들일 수 없는 아버지는 모진 말과 행동을 보이고 딸은 딸대로 상처받고 힘들어하는 내용이다. 방송화면에조차 나오지 않은 어머니와 언니(원래 누나)보다야 낫겠지만 수술까지 동의하고 지원해준 아버지도 힘들어하긴 마찬가지. 


프로그램을 시청하면서 보통 때와 다르게 쉬이 그들을 내 잣대로 '판단'하지 않았다. 어느 한쪽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않았고 위에 언급한 대로 트랜스젠더에 대해 가지고 있던 나의 '생각과 태도'로도 판단하지 않았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었다.


아버지나 딸을 둘러싼 모든 것을 떠나 있는 그대로 한 명의 사람으로, 그들이 대면한 상처와 혼란, 관계와 감정에 깊이 공감하게 되었다.


만감(萬感) : 솟아오르는 온갖 느낌


살아오면서 간혹 언급하곤 했던 "만감이 교차한다"란 말의 의미를 그들 부녀에게서 느꼈다. 만가지 감정, 그 하나하나 감정이 살아서 느껴진 것이다. 


20여년 동안 아들로 자라온 자식이 어느 날 여자로 살아가겠다는 것에 대한 배신감, 자식에 대한 분노, 세월동안의 억울함, 그러면서도 자식을 위해 수술에 동의해준 (이해해주고 싶어하는) 마음, 수술 이후에도 힘들어하는 딸에 대한 걱정, 미래에 대한 걱정, 집안을 풍비박산낸 딸에 대한 원망, 주변 눈치를 보는 자존심, 그러면서도 자식에 대한 부성애 등이 엉킨 아버지는 말그대로 만감이 교차한다.


딸은 다를까. 살아오면서 느꼈던 혼란스러웠을 성 정체성과 그로인한 자괴감, 트랜스젠더가 된 이후 느끼는 행복과 안정감을 뛰어넘는 주변 사회의 멸시와 공격 그리고 상처, 가족으로부터도 인정받을 수 없는 외로운 고립감,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엄청난 걱정, 수술 이후에도 죽을 때까지 맞아야만 하는 호르몬주사로 인한 육체적 고통을 그대로 느껴본다.


그런 그들에게 어느 누가 엄격한 잣대를 갖다대고 쉽게 판단해버리고 옳고그름을 정할 수 있을까. 그들을 있는 그대로의 존재 자체로만 인정한다면 말이다. 타인의 아픔을 공감하고 이해한 뒤에야 우리는 뭐라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지혜는 진정한 공감으로부터 나온다


판단하기 전에 공감부터 하자.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자, 나도 그도, 무엇도. 그런 뒤에야 무엇을 할 지 어떻게 할 지 현명한 판단을 할 수가 있다. 기억과 경험. 학습으로 만들어진 자신만의 안경을 벗고 나서야 현명한 무엇, 즉 '지혜'가 생긴다.


다르다와 틀리다가 구별되지 않는 한국사회에서 더더욱 공감은 어렵고 그렇기 때문에 지혜란 것을 찾을 수가 없다. 두려움이 지배하는 사회여서 더욱 그럴 지도 모르겠다. 두려움에서 벗어나야 한다.


출발은 공감이다. 자기 스스로를 공감하고 타인을 공감하고 관계를 공감하고. 머리로 하는 이해가 아니고 가슴으로 하는 공감 말이다. 타자화하는 연민이나 동정이 아니라 공감 말이다. 그냥 바라보는 것, 공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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