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는 우리에게 일상적이고 친숙한 행위이다. 자연스러움을 넘어 무의식적인 행동이라 평소에는 잘 인식하지 못한 채 살아가기도 한다. 하지만 걷기는 우리의 몸과 행동에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고유의 리듬을 만들면서 고유의 정체성을 형성시킨다.
여기 ‘걷기’라는 행위를 예술가들만의 독특한 시선으로 탐구하는 전시가 있다. 코리아나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스텝 X 스텝》 (2023. 9. 14. ~ 11. 30.)이다. 전시 제목에서 두 번 쓰인 ‘스텝(Step)’은 걸음을 뜻하는 단어이자, 춤을 출 때의 발의 움직임을 의미한다. ‘걷기’와 ‘춤추기’의 행위를 교차해서 보여주려는 기획 의도가 담겨 있다.
전시는 브루스 나우만의 작품으로 시작된다. 나우만은 조각, 사진, 비디오, 설치, 퍼포먼스 등 다양한 매체로 작업하는 예술가이다. 미술사 책에서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작가인데, 국내에서는 막상 작품을 볼 기회가 많지 않아서 이번에 코리아나미술관에 전시된 작품이 반갑게 느껴졌다.
1960년대 후반 나우만은 자신의 신체를 매개로 한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퍼포먼스는 신체의 행위를 작품의 구성 요소로 삼아 새로운 상황들이 발생하는 과정들을 보여주는 장르이다. 나우만은 작가의 작업실에서 행해지는 것은 모두 예술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예술가에 의해 물리적으로 완성된 형태를 보여주기보다는 자신의 신체를 캔버스처럼 활용해 ‘행위로서의 예술’을 탐구한 것이다.
나우만의 <콘트라포스토 자세로 걷기>는 서양의 고전 조각상에 적용되었던 ‘콘트라포스토’ 자세를 취한 채 불편하고 과장된 걸음으로 좁고 긴 복도를 오가는 작품이다. 이탈리아어로 ‘대칭, 정반대’를 뜻하는 콘트라포스토는 한쪽 무릎을 구부리고 체중을 반대편 엉덩이에 실어 몸을 ‘S’자 형태로 만드는 자세로, 고대 그리스 시대 조각상에서 살펴볼 수 있다. 나우만은 비디오테이프의 최대 녹화 시간인 1시간 내내 이 행위를 반복하면서 인체의 곡선미를 강조하는 콘트라포스토의 불합리성을 왜곡된 신체 움직임 속에 담아낸다.
직립보행이라는 걷기의 특성을 재해석한 에브리 오션 휴즈의 <감각과 지각>이라는 작품도 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땅에 발을 붙인 채 걸음을 내딛는데, 이 작품의 퍼포머는 광장의 바닥에 기대어 수평적 걷기를 시도한다. 의도적으로 수직성을 포기한 채 바닥을 힘겹게 걸어나가는 퍼포머의 모습이 저항의 몸짓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2채널 영상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좌측에서는 퍼포머의 움직임을 근접해 촬영한 영상을 재생하고, 우측에서는 퍼포머의 모습을 원거리에서 담은 영상을 배치했다. 특히 우측의 영상에서는 지나가는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고 퍼포머를 바라보기도 하고 관심이 없다는 듯 그냥 지나치기도 하는데, 이는 퍼포머의 움직임을 우리 주변의 공간으로 확장하는 효과를 가져다준다.
우리는 평소 스스로 어떻게 움직이는지, 다른 사람은 어떤 움직임을 보이는지 잘 인식하지 못한 채 살아가곤 한다. 작가는 이러한 문제의식 하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미학적, 사회적, 정치적으로 움직이는지에 관심을 두고, 일상적 걸음 사이에서 움직이고 있는 퍼포머의 모습을 연출했다.
전시실에 배치된 의자에 앉아 천천히 시간을 보내며 감상하면 좋을 작품으로는 차이밍량의 <행자>를 꼽고 싶다. 영화감독으로 잘 알려져 있는 차이밍량은 <행자>에서 한 승려가 맨발로 도심 속을 느리게 걷는 모습을 담아냈다. 배우 이강생이 연기한 붉은 법의를 입은 승려는 한 손에는 빵을, 다른 한 손에는 비닐봉지를 들고 있는데, 한 걸음을 내딛는 속도가 거의 25초가 걸릴 만큼 굉장히 느린 걸음을 보여준다.
요즘은 ‘쇼츠’ 동영상을 비롯해 빠르게 제작되고 빠르게 소비되는 콘텐츠가 범람하는 시대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행자>가 보여주는 ‘느림의 미학’은 우리의 삶과 주변을 새롭게 인식하게 만든다. 이 작품은 처음에 “무엇이 아름다운가”를 주제로 제작한 에피소드 중 하나인데, 인생에서 정말로 중요한 것은 무엇인지, 어떤 몸짓과 리듬으로 살아갈 것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으로 보인다.
지하 전시장으로 이동하면 클라라 리덴의 <그라운딩>이 관객을 맞이한다. 비스듬히 세워진 스크린에서는 작가가 맨해튼 거리를 배경으로 걷다 넘어지고 또 다시 일어나 걷는 행위를 반복하는 모습이 재생되고 있다. 작가가 로어 맨해튼 거리를 배경으로 삼은 이유는 이곳이 뉴욕의 금융지구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거대한 힘 앞에서 개인이 어떠한 역할을 할 수 있는지 담아낸 것이다. 계속해서 넘어짐에도 또 다시 일어나 계속해서 걷는 행위를 통해 우리의 삶을 은유한다.
이 작품에서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바로 음악이다. 작가는 처음 이 작품을 제작할 때 영국의 밴드 매시브 어택(Massive Attack)에게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특히 1991년 발표곡 “미완성의 감정(Unfinished Sympathy)” 뮤직비디오를 참조했다고 밝힌다. 이 뮤직비디오는 보컬 샤라 넬슨이 로스앤젤레스 거리를 활보하는 모습을 롱테이크로 촬영해 만든 것으로, 훗날 많은 영상제작자들이 참고한 뮤직비디오이기도 하다. 클라라 리덴 또한 겹겹이 쌓아 올린 힙합 비트와 직접 촬영한 영상을 함께 배치함으로써 자신만의 나아감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작품 제목인 <그라운딩>에도 주목할 만하다. 그라운딩(grounding)은 심리학 용어로, 감정의 동요가 일거나 불안을 느낄 때 ‘땅’과 접촉하며 안정감을 느끼는 전략을 뜻한다. 작가는 혼란에 휩쓸리지 말고 ‘지금, 여기’의 현실에 접촉하게 함으로써 디딤과 나아감의 반복을 안무적 몸짓으로 연결시킨다.
중앙의 전시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는 작품은 강서경의 것이다. 강서경은 현재 리움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진행하고 있는 작가이기도 하다. 리움미술관에는 그의 대표작들을 중심으로 전시가 되고 있다면, 《스텝 X 스텝》에서는 작가가 학생들과 함께 워크숍을 진행하며 만든 결과물들이 작품으로 표현돼 있다. <자리 검은 자리—동—cccktps>은 한국 전통의 정간보 구조가 바탕이 된 수직, 수평의 그리드와 이를 넘나드는 여러 가지 형상들이 수놓아진 작품이다. 동양화를 전공한 작가는 평면에서 표현되는 회화적 요소들을 공간의 차원으로 확장하여 시각적 악보를 보여주는 작업을 주로 하고 있다.
이번 작품에서는 조선시대 정간보를 활용해 미술적 요소를 만들어냈다. 정간보는 한 칸에 하나의 박자를 입력하는 악보인데, 음의 높이, 박자뿐만 아니라 신체의 움직임까지 담아내는 방식을 취한다. 작가는 한 칸에 하나의 박자를 만들어내는 정간보의 규칙에서 벗어나 동전인 이미지가 칸 사이사이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시간과 공간을 가로지르는 모습을 담아냈다.
강서경 작가가 재해석한 정간보를 나만의 방식으로 그려보는 ‘드로잉 코너’도 마련되어 있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듯, 다리와 발에 박자를 싣고 리듬을 타게 되는 나만의 걸음을 상상해보자. 그리고 여러분이 상상한 스텝과 움직임을 종이 위에 자유롭게 그려보자. 나와 다른 사람들의 움직임이 모여 새로운 운율을 만들어내는 과정에 참여할 수 있다.
좀 더 직접적인 참여형 작품도 있다. 신제현의 <MP3 댄스-스텝>이라는 작품이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움직임과 관련한 도서를 MP3 파일로 녹음하고, 그것을 안무로 표현하도록 했다. 작가는 춘앵무, 발레, 검무, 태권도 등 서로 다른 분야에서 활동하는 퍼포머를 초청하여 녹음된 지시어를 들려주고 각각 자신만의 해석을 통한 움직임을 보여줄 것을 요청한다. 같은 지시어를 들었지만 서로 다른 움직임을 보여주는 모니터 속 퍼포머들의 모습이 흥미롭다.
퍼포머의 모습을 보는 데 그치지 않고 직접 지시어를 듣고 움직임을 수행해볼 수도 있다. 실제로 퍼포먼스는 관객의 참여가 필수적인 장르이다. 전통적인 예술에서는 ‘보는 것’이 작품 감상의 주요 행위였다면, 퍼포먼스에서는 ‘행위하는 것’이 작품을 이루는 주요 요소가 된다. 즉, 능동적인 참여자로서의 관객이 작품을 완성시키는 것이다.
“관객은 매 순간 자신이 보거나 말해온 것, 하거나 꿈꿔온 것을 연결한다.”
- 자크 랑시에르·철학자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는 『해방된 관객』에서 예술가와 관객 사이의 이분법을 거부하며 예술가와 관객 사이의 지적 평등을 이야기한다. 관객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예술을 해석할 수 있으며, 직접 행위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랑시에르에 따르면, 예술가와 관객 사이에는 지적인 평등뿐만 아니라 신체의 행동 사이에도 어떠한 위계가 없다. 신제현 작가는 관객이 퍼포머가 되는 경험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직접 의미를 생산하도록 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듀오로 활동 중인 폴린 부드리와 레나테 로렌츠의 <거꾸로 움직이기>는 여러 요소들을 종합해 살펴볼 필요가 있는 작품이다. 먼저 <거꾸로 움직이기>라는 ‘제목’에 주목해 작품을 음미해보자. 이들은 언어를 제외한 채 오직 퍼포머들의 몸짓을 통해 “우리는 과연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일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서로 다른 장르의 무용수 5명은 무대에서 이동하며 움직이는 듯 보이지만, 거꾸로 재생되는 듯한 사운드, 눈에 띄는 어색한 움직임들로 인해 이들이 뒤로 움직이는 것인지, 혹은 기술적으로 영상을 거꾸로 되감은 것인지 헷갈리게 만든다. 실제로 인생을 살면서 진전하는 것인지 후퇴하는 것인지 의문이 들 때가 많은데, 작가는 어느 방향으로 가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몸짓을 통해 이러한 의문이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님을 상기시킨다.
이 작품은 쿠르드족의 게릴라 여성들에게 영감을 받은 것이다. 이들은 눈 덮인 산에서 어느 방향으로 이동하였는지 적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신발을 거꾸로 신고 산을 올라가는 생존 전략을 썼는데, 실제 영상에서도 신발을 거꾸로 신고 앞인지 뒤인지 모를 모호함이 표현되어 있다.
영상이 재생되는 공간의 설치 요소에도 주목해보자. 영상 중간에 섬광처럼 번쩍이는 조명은 작품의 주요 요소로 기능한다. 영화에서 편집을 위해 ‘슬레이트’를 치는 장면을 많이 보았을 텐데, 작가들은 슬레이트를 친 뒤 조명을 안무처럼 활용해 관객을 스테이지로 이끌어낸다. 조명에 맞춰 관객들이 움직임을 보여주길 바라는 작가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 바닥 또한 평소의 미술관 바닥과 다르게 코팅이 되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영상이 반사되어 영상 안과 밖의 경계가 허물어진 것처럼 느껴진다. 이러한 장치들은 모두 작품을 구성하는 요소로 기능하면서 퍼포먼스의 범위를 확장시킨다.
“근육이 긴장한다. 한쪽 다리가 기둥처럼 땅과 하늘 사이에서 몸을 지탱한다. 다른 쪽 다리가 뒤에서 휙 옮겨 온다. 발바닥이 바닥에 닿는다. 몸무게가 앞쪽 발볼로 쏠린다. 엄지발가락이 바닥을 밀어내면, 몸무게는 또 한 번 미묘한 균형을 찾아간다. 두 다리가 위치를 바꾼다. 그렇게 한걸음, 또 한 걸음, 그리고 또 한 걸음이 이어지면서, 탁, 탁, 탁, 탁, 보행의 리듬이 생긴다.”
- 리베카 솔닛·문화비평가
『걷기의 인문학』의 저자 리베카 솔닛은 ‘걷기’를 위와 같이 묘사한다. 걷기는 일상적인 행위기기는 하지만 창조적이며 동시에 혁명적이기까지 할 수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예로부터 많은 철학자들은 걷기가 정신적 사유에 영향을 미친다고 이야기했다. 실제로 걷기는 발목과 무릎, 엉덩이, 척추와 어깨를 골고루 움직이면서 전신의 균형을 맞추는 수행적인 과정이기에 몸과 마음의 균형을 맞추며 중심을 잡는 행위라고 볼 수 있다. 개인의 몸에서 시작하는 걷기는 자신만의 감각과 경험을 확장하면서 공간으로 나아간다. 이번 전시에서 소개된 7명의 예술가들이 ‘걷기’를 어떻게 표현했는지 살펴보면서 나만의 걷기 감각을 다시금 떠올려보자. 작품 속 움직임이 촉발하고 있는 이야기 속에서 나만의 리듬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본 글은 '프럼에이'에 발행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