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 미술에서는 다양한 장르의 미술 작품이 등장하고 있지만, 여전히 회화는 가장 오래된 표현 방식 중 하나다.
금호미술관의 《마주한 세계: 풍경의 안팎》은 회화 작가 7인의 작품을 다룬 전시로, 각기 다른 시선과 방식으로 공간 속 풍경을 담아내고 있어 주목된다.
산책하듯 걷다 잠시 멈추고, 멀리 또는 가까이에서 세계를 마주하는 방식으로 자유로이 전시를 감상해보자.
동시대 미술에서는 설치, 미디어아트, 퍼포먼스 등 다양한 장르의 미술 작품이 등장하고 있지만, ‘회화’는 여전히 가장 오래된 표현 방식 중 하나이다. 회화는 우리에게 미적 관조와 사색을 불러일으키는 중요한 매체로, 벽면에 설치되는 것을 전제로 특정한 공간에 단일한 이미지를 제시하는 형식을 뜻한다. 회화의 도구인 ‘물감’은 질감을 표현할 뿐만 아니라 ‘붓질’의 표현에서처럼 과정을 담아낸다. 예술가들에게 캔버스라는 평면의 공간은 자신의 생각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장이 되는 것이다.
사진의 발명과 함께 회화가 위기를 맞이했다는 분위기도 있었지만, 이미지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회화는 다시 미술의 중요한 표현 형식이 되었다. 실제로 동시대 미술에서 회화는 이미지의 지지체로서 여전히 힘을 지니고 있다. 우리에게 회화는 사색적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매체로서 새로운 시도를 해나가고 있다.
‘회화’는 이처럼 우리에게 친숙한 장르지만, 요즘 미술관에서 회화 작품만을 다룬 전시는 많이 없었던 듯하다. 새로운 미술 장르가 상대적으로 많이 소개되면서 오히려 회화 작품이 덜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이러한 가운데 금호미술관에서 진행 중인 《마주한 세계: 풍경의 안팎》 (2023. 11. 24. ~ 2024. 2. 4.)은 회화 작품으로만 구성된 전시로, 국내 중견작가 7인이 각기 다른 시선과 방식으로 공간 속 풍경을 담아내고 있어 주목된다.
이번 전시에는 도성욱, 송은영, 신선주, 유현미, 윤정선, 이만나, 정보영 등 총 7명의 작가가 회화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3층부터 지하 1층까지 최근 작품을 중심으로 하여 초기 작업으로부터의 변화를 추적하는 방식이 하나의 감상법이 될 수 있다. 또한 다양한 매체가 등장하는 동시대 미술에서 ‘캔버스’와 ‘물감’이라는 회화 고유의 매체만으로 얼마나 많은 것들을 이야기할 수 있는지 그 가능성을 살펴볼 수 있다.
3층 전시장 안쪽에 들어서면 윤정선 작가가 하나의 마을처럼 전시장을 구성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실제 풍경처럼 공간의 기억을 화폭에 담아낸 것이다. 작가는 국내외 여러 도시에 머물며 경험했던 장소를 캔버스에 서정적으로 담아낸다. 일상 속 거리, 공원에서 마주한 풍경을 주요 소재로 삼은 것이다.
일상적 사물을 대상으로 하는 미술 작품은 미술과 일상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면서 대중들을 전시장으로 끌어들이는 요인이 된다. ‘일상적’이라는 단어는 특별하지 않고 날마다 접할 수 있는 것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데, 일상적 풍경을 그린다는 것은 그 대상에 특별함을 부여하면서 재발견을 하는 행위로 볼 수 있다.
윤정선의 최근 작품에서 익선동 풍경을 담아내며 일상적 이미지를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들인다. 작가의 종로 작업실 인근인 익선동은 오랜 역사를 간직한 곳으로, 그는 익선동에서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을 표현했다. 일상의 풍경에서 새로운 것을 상상해내는 것은 그곳을 본래의 자리에서 벗어나게 함으로써 다른 가치를 부여하는 것으로 읽힌다. 이미지는 힘을 가지고 있기에 사람들은 이러한 이미지에 매혹당하며, 각자의 경험에 대한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흑백 사진처럼 느껴지는 신선주의 회화는 제작 방식이 독특하다. 캔버스에 검은색 오일 파스텔을 손가락으로 문질러 펴 바른 후, 얇은 송곳 등으로 선을 그은 뒤, 다시 덧칠하고 지우기를 반복하는 방식으로 제작된다.
작품에 가까이 다가가면 묘사가 상당히 정교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작가는 건축물을 그대로 옮기기보다는 자신이 건축물을 보면서 느꼈던 감상이나 분위기를 재현하려 했다고 한다. 세부적인 묘사에 치중하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그의 손끝에서 탄생한 건축 풍경은 전체 공간을 압도하며 아름다우면서도 정교한 조형미를 뽐내고 있다.
신선주의 작업은 ‘사진’을 찍는 것에서 시작한다. 수많은 사진 중 그리고 싶게 만드는 요소들이 있어야 작품을 시작한다고 하는데, 가령 <Hmmmmmmmm...>이라는 작품은 건물 외벽에 공장이라는 건축물과 다소 어울리지 않는 글자가 적혀 있었기에 선택한 것이라고 한다. 차갑고 건조한 건축 풍경에 특유의 감각과 감성이 녹아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이만나 작가의 작품을 처음 보았을 때 무언가 마음이 요동치는 느낌을 받았다. 차를 타고 오고가며 많이 보던 풍경인데, 왠지 모를 낯섦이 느껴졌기 때문인 듯하다. 작가는 익숙한 일상에서 한 순간 낯설게 다가온 대상과 풍경을 캔버스에 담아내는 작업을 하고 있다. 무심히 스쳐 지나가다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되돌아본 일상의 한 모퉁이를 그려내는 것이다.
화면에서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느껴지는 이유는 이곳이 더 이상 실재하지 않는 공간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작가는 최근 작업에서 조금 더 확장된 시선으로 도시개발과 정비 사업 등으로 사라져가는 도시의 모습에 주목한다. 우리의 기억에서 잊혀가는 도시의 풍경 속에 공기와 빛, 시간에 대한 감각을 녹여내는 것이다.
이만나의 작품을 가까이서 보면 풍경이 ‘점묘법’처럼 표현돼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점묘법은 점이나 매우 짧은 터치로 그림을 그리는 화법을 뜻한다. 작가는 입자들이 쌓여서 진동하는 느낌을 내고 싶어 이러한 방식을 채택했다고 말한다. 점을 찍어 표현한 방식은 레이어가 겹쳐지면서 공간을 더욱 깊이 있게 만들며, 이러한 공간은 오랜 시간성을 반영하면서 우리가 바라보는 풍경 너머의 세계를 상상할 수 있도록 만든다.
도성욱은 상상의 빛을 표현하기 위해 숲의 장면을 그린다. 나무숲 사이로 열린 하늘에서 쏟아지는 밝은 빛이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이러한 그의 풍경은 마치 실제 숲을 촬영한 사진인 것처럼 느껴진다. 사실 이 풍경은 빛, 공기, 온도, 습도, 바람 등의 비물질적 요소들을 가시화하고 작가의 내적 감성을 함께 담아내는 가상의 공간이다. 작가에게 숲은 이처럼 빛을 그리기 위한 재료이자, 빛에 도달하기 위한 매개의 역할을 한다.
"아름다움은 그것이 더 이상 실재 같은 환영으로 재현되지 않고, 그 대신에 현실과 현실 속에서의 기쁨을 표현할 때 새로운 구체적 표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 허버트 마르쿠제·철학자
최근 작업에서도 ‘숲’은 작가에게 여전히 중요한 소재이지만, 이전과 다르게 숲의 부분을 확대하여 전면에 배치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작가는 빛의 스펙트럼을 다양화하면서 보는 이로 하여금 더욱 작품에 몰입하게 한다. 부드럽고 따뜻한 온기를 품은 빛이 밝히는 숲의 공간은 우리에게 위로를 선사하며 편안한 감각을 느끼게 만들고 있다.
현대미술에서 작가들의 창작 동기 중 하나는 미디엄(medium)을 탐구하는 것이다. 미술에서 ‘미디엄’은 매체를 뜻하는 말로, 페인팅, 드로잉, 입체, 사진, 영상, 사운드 등 예술 표현의 장르를 말한다. 예술가들은 자신의 표현 행위를 실행할 미디엄의 가능성과 한계를 숙고하며, 그 숙고를 기반으로 창작 활동을 수행한다.
정보영은 빛과 공간의 관계를 통해 ‘회화’라는 매체를 탐구한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빛을 효과적으로 포착하고 건축물 내부에 어둠을 구조화하는 방식을 사용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작가는 특정 공간에 의지와 테이블, 촛불과 조명 등의 오브제를 옮겨가며 수많은 사진을 찍고, 이를 선별해 회화로 옮긴다.
정보영에게 사진 촬영은 인간의 눈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빛의 출처를 찾아가는 여정이다. 물론 그는 사진 작업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카메라조차 포착할 수 없는 빛의 흐름과 흔적을 ‘회화’로 표현한다. 빛을 둘러싼 사건들을 마주함으로써 회화의 본질을 탐구하는 것이다. 실제 벽의 연장선상에 있는 듯한 회화는 관람자로 하여금 화면의 안과 밖을 넘나들게 하면서 공간에 대한 체험을 극대화하고 있다.
경계가 있다는 것은 경계의 안과 밖에 다른 차원이 존재한다는 의미다. 분할된 화면은 시각적으로 경계의 지각범위를 벗어나게 함으로써 안과 밖의 구분을 모호하게 만드는 것이다. 즉, 화면의 이미지 속으로 몰입할 수 있는 시각 환경을 제공한다.
루돌프 아른하임은 “특정한 크기와 형태를 가진 틀은 틀 안의 공간에 있는 사물들의 위치를 규정하며, 그 안에 있는 사물들 사이의 거리도 결정한다”라고 말한 바 있다. 송은영이 환영과 실재의 혼재를 작업의 모티프로 하면서 서로의 경계와 공간을 침범하는 작업을 선보인 것은 이처럼 환영과 실재의 다른 차원을 탐구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림의 세계는 깊이만이 아니라 넓이에 있어서도 무한한 것으로 지각되기 때문에 그림의 일정한 경계는 그 그림의 한계가 아니라 화면의 크기를 정하게 된다."
-루돌프 아른하임, 『미술과 시지각』 中
송은영의 작업은 초현실주의적인 작품에서처럼 원근법이나 일상의 시지각 원리에서 벗어나 있다. 작가는 현실과 비현실, 안과 밖, 앞과 뒤 등 서로 반대되는 요소들을 하나의 공간 안에 공존시키면서 비확정적인 풍경을 그려낸다. 우리는 그의 작업을 통해 일반적인 지각의 관습에서 벗어나 열린 시각과 마음으로 낯선 경계들을 발견하게 된다.
유현미는 사진, 회화, 조각, 설치, 영상의 영역을 아우르며 꿈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한 비현실적 공간을 선보인다. 사진을 기반으로 하여 유화로 리터치를 하는 작업인데, 이를 통해 작가는 ‘이미지’의 본질을 탐구하고자 한다. 여러 매체로 작업하는 작가에게 ‘본다’는 것은 그 자체로 예술의 영역에 속한다. 그의 회화 작품을 통해 우리는 본질에 더 가까워지고자 하는 마음을 전달받을 수 있다.
작가는 꿈 혹은 일상에서 만난 상황과 감정을 ‘문학’의 형태로 옮기기도 하는데, 이는 작업에 중요한 모티브가 된다. 최근작인 <적(敵)> 시리즈는 2022년 출간한 작가의 자작 소설인 『적(敵)』에서 시작한 것이다. 창작 과정에서 느끼는 자기복제에 대한 두려움을 주제로 하는 소설이며, 전시장에서 책 형태로 읽을 수 있다. 이 소설에서 그는 과거 작업 속에서 파생된 돌과 테이블 등을 화면 위에 풀어내며 작가로서의 고뇌를 표현한다. 현실과 비현실, 실재와 허구의 경계를 넘나드는 그의 이미지들은 인식의 전환과 새로운 경험을 유도하고 있다.
“예술의 최상위 기능은 우리에게 자신과 주변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허구적인 세계를 재현하는 것이다.”
- 래리 샤이너, 『순수예술의 발명』 中
《마주한 세계: 풍경의 안팎》는 한국 미술계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중견 작가들의 작품 세계를 살펴볼 좋은 기회다. 오랜 시간 묵묵히 자신만의 독특한 예술 세계를 구축하며 작업을 심화시킨 모습에서 수행자적 태도가 읽혀졌다. 작가들의 손끝에서 탄생한 다양한 풍경들은 한 자리에 모여 또 하나의 작은 세계를 이루고 있다. 산책하듯 걷다 잠시 멈추고, 멀리 또는 가까이에서 세계를 마주하는 방식으로 자유로이 공간을 경험해볼 수 있다.
본 글은 '프럼에이'에 발행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