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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이아트 Feb 16. 2022

대지미술 : 풍경과 대지를 담은 캔버스 (하)

황량한 벌판 한 가운데 검은 매연을 뿜어내는 깃발이 꽂혀 있다. 깃발이 위치한 곳은 미국 텍사스(Texas)의 스핀들톱(Spindletop). 이곳은 1901년 세계 최초의 석유 발견지다. 유전 개발 붐이 휩쓸고 지나간 스핀들톱에 이 깃발을 설치한 이는 아일랜드 출신의 예술가 존 제라드(John Gerrard, 1974~)다. 화석연료에 의존하는 인류를 비판하려는 목적이라기엔 작품 자체가 환경을 오염시키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매연을 내뿜는 깃발은 실시간으로 렌더링되는 미디어아트일 뿐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존 제라드, <웨스턴 플래그(Western Flag)>, Spindletop, Texas, 2017. (출처: 작가 홈페이지)


렌더링(Rendering)은 컴퓨터 프로그램을 이용해 2차원의 이미지를 3차원으로 바꾸어 표현하는 것을 말한다. 렌더링 기술은 다양한데, 존 제라드는 그의 작품 <웨스턴 플래그(Western Flag)>에서 스핀들탑 지역의 실제 상황을 실시간(realtime)으로 담아내는 방식을 택한다. 계절과 시간에 따라 배경이 달라지는 모습을 연출하기 위해 영상의 각 프레임을 계산하는 소프트웨어를 활용한 것이다. 작가는 2017년 미국 캘리포니아의 코첼라 벨리(Coachella Valley)에서 열린 ‘Desert X’라는 미술 전시회에 출품했던 이 작품을 지난 5월 NFT(대체 불가능한 토큰)로 발행했다. 기후위기에 목소리를 내는 작품인 만큼 NFT 발행 과정에서 온실가스가 배출되지 않도록 탄소발자국을 추적하고, 수익금의 절반을 아일랜드 토양 복원을 위한 단체인 ‘regenerate.farm’에 기부하고 있다.


존 제라드, , Lincoln Center, NY, 2014. (출처: 작가 홈페이지)


존 제라드는 실시간 컴퓨터 그래픽, 위성 데이터, 3D 스캐닝, 모션 캡쳐 등을 사용해 디지털 시뮬레이션의 형태를 취하는 조각을 만들어온 예술가다. 그의 설치작품들은 자연환경을 주요 대상으로 삼는 대지미술의 성격을 띠지만, 여기에 미디어아트의 요소를 가미해 새로운 시각 문화를 창출해낸다. 뉴욕 맨하튼에 네바다 사막의 풍경을 담아낸 <솔라 리저브(Solar Reserve)>(2014)가 그 예다. 이 작품에서 그는 네바다 사막에 위치한 태양열 발전소의 모습을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재구성해 뉴욕 한복판으로 실시간 전송한다. 그가 직접 디자인한 LED 커튼월은 프레임을 가지고 있지 않아 뉴욕과 네바다 사막이 연결된 느낌을 배가한다.


존 제라드, , Kistefos Museet, Norway, 2013. (출처: 작가 홈페이지)


존 제라드가 2013년 제작한 <펄프 프레스(Pulp Press)>도 자연환경을 가상공간으로 확장한 예다. 이 작품은 19세기 노르웨이의 Jevnaker 지역에 있던 제지 공장과 제지 기계들을 리메이크하는 형태로 만들어졌다. 작가는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제지 기계를 가상현실 내에서 다시 작동하게 만들었다. 그는 이 작품을 통해 산업화 이후 생산 방식에 대해 고찰하고, 오늘날의 자본주의가 물질과 수단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산업의 연속성을 주장한다. 기계를 비추는 가상 카메라를 통해 기술적으로 매개된 피사체는 우리로 하여금 그것의 본질과 의미를 되새기게 만든다. 


X. LAEVIS (SPACELAB) 2017. (출처: 존 제라드 유튜브 채널)


그의 또 다른 작품 <X. laevis>(2017)는 이탈리아의 해부학자 루이지 갈바니(Luigi Galvani, 1737~1798)가 개구리의 절단된 다리에 행한 실험을 소재로 삼았다. 갈바니는 죽은 개구리의 다리에 전류를 흘려보내 개구리의 팔다리를 움직이며 점프하게 만들었는데, 존 제라드는 이 같은 실험을 개구리가 중심이 되는 작품으로 리메이크했다. <X. laevis>는 그의 이전 작품처럼 실시간으로 렌더링되는 디지털 애니메이션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이러한 가상 실험을 통해 개구리가 무중력 상태에서 번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냈다. 영상 속 렌더링된 개구리를 향해 손을 뻗는 것은 인간과 신이 접촉하는 기독교의 이미지를 암시하기도 한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삶과 시뮬레이션 사이의 경계를 묻는다. 


존 제라드, <옥수수 작업(코리브)>, Claddagh Quay, Galway 전시 전경, 2020. (출처: 작가 홈페이지)


존 제라드는 올해 열린 제13회 광주비엔날레 참여 작가이기도 했다. 그가 비엔날레에 출품한 <옥수수 작업(코리브)>은 켈트 이교도들의 형상을 한 네 명의 밀짚 소년들이 춤을 추는 장면을 담아낸다. 얼핏 보면 실제 무용수들이 춤을 추는 영상 작품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실시간 시뮬레이션과 알고리즘으로 생성된 이미지다. 존 제라드는 스튜디오 환경에서 모션 캡쳐 슈트를 입은 무용수들의 움직임을 포착한 뒤 데이터로 변환하는 과정을 거쳤다. 이를 통해 지속적인 안무를 생산해내고 계절과 시간의 변화를 추적한다. 이처럼 존 제라드의 작품은 알고리즘적인 조건들의 집합으로 나타나며, 이러한 장면들은 가상 세계의 시간과 공간 내에서 펼쳐진다. 


존 제라드가 기술 장비들을 활용해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1960~70년대 대지미술 작가들이 말하고자 했던 바와 크게 다르지 않다. 기후변화로부터 지구의 유산을 지키고 인간과 환경의 관계를 다시 고찰해야 한다는 것이다. <옥수수 작업>에서 무용수들의 느릿한 움직임은 생태계 파괴라는 현재의 흐름을 표현한다. 작가는 이 작품에 대해 “인구가 급증함에 따라 소멸해 가는 비인간 세계를 애통해 하는 작업”이라고 언급했는데,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관계를 재설정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존 제라드, <Farm(Counsil Bluffs, Iowa), 2015. (출처: 작가 홈페이지)


존 제라드에게 기술은 그가 작품을 제작하는 핵심적인 수단이지만, 단순히 수단으로 머물지 않는다. 그는 진보된 기술을 통해 가상과 실재의 어딘가에 그의 작품을 배치함으로써 풍경인 듯 상상인 듯 새로운 이미지를 창출해낸다. 낯선 이미지를 통해 새로운 장소를 창조하고, 우리로 하여금 환경과 인간의 관계를 동화시켜 달라고 요청한다. 그가 소재로 삼는 자연 환경, 그리고 산업 시설들은 이제 전 세계의 생산 네트워크의 숨겨진 부분으로 남아 있다. 이러한 시설들은 우리의 삶에서 사라진 것처럼 보이지만, 존 제라드의 작업을 통해서 다시금 우리 삶으로 소환된다. 



본 글은 ‘프럼에이’에 발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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