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욕망을 기계를 통해 실현해 왔다. 신체를 기계와 결합해 인간 종(種)이 가진 한계와 조건들을 넘어서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기계는 인간 욕망의 현시(顯示)이다. 기계는 늘 인간이 스스로를 초월하고자 하는 욕망이 집약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인간의 욕망은 진보를 위한 원동력이 되지만, 한편으로는 파괴성을 내재하는 등 양가성을 지닌다. 자연을 실험의 대상으로 삼으며 과학기술을 고도화한 사이, 인류는 기후위기와 코로나 팬데믹 등을 겪으며 생존을 위협받고 있다. 기술이 인간을 위한 도구를 넘어서 우리가 살아가는 환경을 바꾸고 인간 존재 자체를 변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팬데믹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열린 《MMCA 현대차 시리즈 2022: 최우람 - 작은 방주》는 ‘인간으로 존재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성찰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현재 우리가 처한 상황을 여실히 드러낸다. 키네틱 아트를 주로 선보여온 조각가 최우람(1970-)은 그동안 ‘기계 생명체’ 연작을 통해 인간과 기계에 대한 심도 있는 고찰을 보여주었다. 이번 전시는 기존 작업에 내재해 있던 인간 본질에 대한 탐구를 전면에 내세우며 우리로 하여금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지 묻는다.
전시의 제목이기도 한 신작 <작은 방주>는 현재 우리가 처한 상황을 ‘방주’의 형태로 구현해낸다. 노아의 방주를 연상시키는 이 작품은 길이 12m, 높이 2m 크기의 배 형태로 존재한다. 작품으로서는 거대할지 몰라도 인류의 멸망을 피하기 위해 많은 것을 실어야 할 배라면 작품 제목처럼 ‘작은’ 크기에 불과하다. 최우람은 구원과 희망을 상징하는 ‘방주’ 앞에 ‘작은’이라는 수식을 붙임으로써 양가적인 의미를 덧씌운 것이다.
작가가 곳곳에 배치한 여러 장치들 또한 양가적인 의미를 내포한다. 가령 배에 올라탄 두 선장은 등을 돌린 채 정반대의 방향으로 앉아 있고, <천사>는 힘없이 축 늘어져 있으며, 인간은 <무한 공간>과 <출구>에서 보이는 것처럼 계속해서 욕망을 쫓는다. 그는 이러한 설치를 통해 ‘인간 욕망의 끝은 어디인가?’ ‘우리는 과연 무엇을 위해 항해하는가?’, ‘우리는 어디로 가야하는가?’를 묻는다.
최우람은 키네틱 아티스트로써 기계의 움직임을 정교하게 구현해내는 데 집중하지만, 그의 작품은 근본적으로 인간 존재에 대한 탐구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특히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변화하는 인간 존재, 인간 사회의 구조와 작동 원리 등에 대한 철학적 성찰이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가 된다.
최우람 작품세계의 시작점은 그가 7살 때 그린 그림 <자화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70년에 태어난 작가는 어린 시절 분단이라는 현실과 냉전 체제로 인해 자주 반공 교육을 받았고, 핵전쟁에 대한 위협, 에너지 고갈 등과 같은 뉴스를 접하며 자랐다. 그러다보니 로봇을 만드는 과학자가 되어 가족들과 함께 떠나고 싶다는 상상을 했다고 한다. 이러한 관심은 <자화상>에서처럼 내부가 훤히 보이는 로봇으로 표현되었다. 작가는 이번 현대차 시리즈를 준비하면서 예전부터 스케치로 남겨둔 작업들을 꺼내 실현하지 못한 작업들을 점검했다고 밝힌다. 이러한 과정에서도 <자화상>은 중심이 되며, 그동안의 기억들은 구체적인 형상으로 표현된다.
작은 기계들의 움직임에 집중한 초기 작품들을 지나 ‘기계 생명체’의 모습이 나타난 첫 작품으로는 2002년에 제작한 <울티마 머드폭스>가 있다. 그가 자신의 작품을 ‘기계 생명체’라고 부르는 이유는 실제 생명체와 같이 움직이고 특정 장소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자신의 기계 생명체에 실제로 발견된 생명체라는 의미에서 학명(scientific name)을 붙이고 각 생명체마다 스토리를 입혔다. 가령 <울티마 머드폭스>는 지하철 공사 중 최초로 발견된 미지의 생명체라는 서사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서사는 금속조각을 단지 기계가 아니라 실제 생명체로 인지하게 만드는 장치가 된다. 이를 통해 그는 인간과 기계의 존재 방식을 고찰하고 미래 인간의 모습을 상상한다.
최우람의 작품을 생명체처럼 보이게 하는 요소는 바로 ‘움직임’이다. 그의 작품은 날카로운 금속 재료들로 제작되었지만, 흡사 생명체와 같은 반복적이지 않은 움직임을 보여줌으로써 실재하는 생명체처럼 인식되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꼽히는 <쿠스토스 카붐>은 거대한 몸체의 사이보그 생명체가 숨을 쉬는 듯한 모습이다. 작품은 크게 머리와 몸통, 꼬리로 구성되고, 머리 부분은 고생물의 뼈처럼 보인다. 기계 부품이 맞물려 만들어내는 들숨과 날숨의 움직임은 생명체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만든다.
최우람의 작품에서는 ‘움직임’ 만큼이나 ‘멈춤’의 순간도 중요하다. ‘움직임’이 계속된다면 그 자체는 변화량이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철학적으로나 과학적으로나 ‘죽음’의 이미지로 읽힌다. 일정한 움직임을 돋보이게 하려면 멈춰있는 상태가 필요한 것이다. ‘멈춤’의 순간은 이번 전시에서 선보인 신작 <원탁>에서 두드러진다. <원탁>은 18개의 머리 없는 지푸라기 몸체가 <원탁>을 받치고 있는 형태이다. 원탁 위에는 하나의 둥근 머리가 테이블 위에 이리저리 굴러다니면서 하나의 머리를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듯한 모습을 연출한다. 누군가가 머리를 차지할 듯 보이는 ‘멈춤’의 순간이 있지만, 머리는 이내 곧 다른 쪽으로 굴러간다. 작가는 ‘움직임’과 ‘멈춤’의 순간들을 통해 어떤 방식으로도 이 경쟁에서 벗어날 수 없는 구조를 역설적으로 빗대고 있는 듯하다.
작가는 작업 초기만 하더라도 ‘마이크로 로봇’이라는 로봇 공학 회사에서 디자이너 일을 병행하고 있었다. 그러다 2006년 일본 도쿄의 모리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준비하면서 본격적으로 엔지니어들과 협업하기 시작한다. 당시 선보인 <어바너스>라는 작품을 보면 초기보다 움직임의 범위가 크게 확장된 것을 볼 수 있다. 암컷과 수컷으로 구성된 <어바너스>는 도쿄의 상공을 비행하는 듯한 모습을 띤다. 커다란 꽃처럼 입을 벌리고 있는 <어바너스 암컷>이 도시 에너지를 직접 받아 자신이 흡수한 것을 빛의 형태로 <어바너스 수컷>에게 전달하는 형태다. 인간이 창조한 기계가 스스로 도시 에너지를 통해 생존하면서 진화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 전시되어 있는 <URC-1>과 <URC-2>는 폐차된 자동차 전조등과 후미등을 모아 구(球)의 형태로 구축한 작품이다. 앞선 작품들이 모두 부품을 일일이 깎아서 제작한 것이라면, 이 작품들은 예외적으로 전조등과 후미등이라는 기존의 소재를 활용했다. 우리가 버린 사물들이 작가의 손을 거쳐 또 다른 생명을 얻은 모습으로도 보인다. 라이트의 환한 빛이 비규칙적으로 켜졌다 꺼졌다를 반복하면서 살아 숨 쉬는 행성의 모습을 은유한다.
작품 <URC-1>과 <URC-2>는 작가의 조부모와도 연관된 것으로 보인다. 먼저 작가의 할머니는 1930년대 초반 비행기를 목격하고 파일럿을 꿈꾸며 서울로 상경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시대에 여성이 파일럿이 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기 때문에 결국 꿈을 낮춰 한국 최초의 여성 운전사가 되었다. 당시 자동차 회사에서 작가의 할아버지를 만났는데, 조부 또한 한국 최초의 자동차인 ‘시발(始發) 자동차’의 엔지니어였다. 작가는 서양화를 전공한 부모님과 기술자였던 조부모님의 피를 물려받아 기계로 작업하는 예술가가 된 것 같다고 말한다.
이러한 작가의 성장 배경은 예술과 기술의 접점에서 작업을 이어나가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 그는 특히 인간과 기계가 공존하는 상황을 보여줌으로써 인간 본질을 탐구하고 삶과 죽음 같은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2012년 제작한 <우로보로스>는 ‘꼬리는 삼키는 자’라는 뜻으로, 삶과 죽음, 영혼의 부활, 영원한 시간 등을 상징한다. 우로보로스는 자신의 입으로 머리를 물고 있는데, 이러한 모습은 처음과 마지막이 이어지는 원이 되고, 탄생과 죽음의 결합을 의미한다. 우리는 흔히 삶과 죽음이 단절돼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탄생과 죽음은 끊임없이 되풀이될 수 있다. 시작과 끝이 명확하지 않으며 그저 뱀의 머리가 지나가는 문턱만이 존재하는 <우로보로스>를 통해 우리는 삶과 죽음이 이분법적으로 분리된 것이 아니며 생명과 죽음이 연속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꽃이 피고 지는 모습의 <하나>는 <우로보로스>와 마찬가지로 생명과 죽음이 하나로 연결돼 있다는 사실을 표현하는 듯하다. <하나>는 차갑고 딱딱한 소재의 금속 재료로 만들어진 다른 작품들과 달리 방호복 천을 사용해 제작했다. 작가는 이 작품이 코로나 팬데믹 시대에 바치는 헌화의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꽃잎이 오므라졌을 때는 빛이 모두 차단되도록 설계되어 있고, 다시 꽃잎이 펼쳐질 때는 빛이 함께 발산된다. 펼쳐졌다 오므라지기를 반복하는 꽃잎은 죽음 앞의 인간이 확인하는 생의 에너지를 함축하며,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냉소와 회의에서 벗어나 긍정의 대안을 구축하고자 한다.
<하나>가 팬데믹을 위로하는 작가의 헌화라면, 신작 <빨강>에는 앞으로 나아가는 우리의 모습과 순환하는 생명의 에너지를 담아냈다. 고대 신화에서 붉은 꽃은 땅에 흘린 신의 피에서 자라나는 새로운 생명을 의미한다. 이 신화에서처럼 붉은 벽 위에 피고 지는 꽃의 움직임은 생명의 본질을 느끼게 만든다. 뜨겁게 붉음을 토해내며 피고 지기를 반복하는 <빨강> 앞에서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근본적 가치를 어떻게 추구할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마주하게 된다.
최우람의 작품은 인간과 기계를 둘러싼 세계를 표현하면서 동시대를 사는 우리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질문을 던진다. 과학기술의 발전은 필연적으로 인간 존재에 관한 물음을 수반하는데, 작가는 우리로 하여금 회의주의를 맞이하게 할 것인지 새로운 생명의 에너지로 나아갈 것인지에 대한 방향성을 공유한다. 그동안 당연하게 생각했던 인간 사회 구조와 작동 원리에 대해 철학적 성찰이 필요해진 시점이다. 그의 손끝에서 탄생한 기계들은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사유할 실마리를 던져준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인간을 둘러싼 환경의 변화를 주시하면서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전략으로 나아갈 길을 제시한다.
본 글은 '인터랩(INTERLAB)'에 발행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