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와이아트 Dec 16. 2022

포스트 아포칼립스 지도 그리기

코로나 팬데믹을 계기로 ‘인간 이후의 인간’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고 있다. 현 인류가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지구 환경이 변화하고 인간 존재 또한 다양한 존재들과의 관계망 속에서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류가 멸망할 수 있다는 디스토피아적 전망에서부터 종말 이후의 세계를 그리는 포스트 아포칼립스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논의되는 담론들은 공통적으로 기존 세계에 대한 반성을 요구하고 새로운 시대를 향한 전환점을 제공한다. 


인간 이후의 인간을 그리는 시도는 단지 미래에 대한 것이 아니라 현재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미래는 언제나 예측 불가능한 방향으로 흘러가기에 지나친 낙관론이나 비관론을 펼치는 것은 경계해야 하겠지만, ‘인간 이후의 인간’은 지금과는 다르며 인간과 인간 아닌 것이 융합하는 시대가 도래한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 속에서 열린 아트센터 나비의 《퓨처 판타스틱(Future Fantastic)》 (2022.11.11. ~ 11.15.) 전시는 예술가들이 위기를 인식하는 방식을 다루면서 인류가 직면한 미래의 과제를 시간 순서로 탐구했다는 점에서 시기적절하다. 전시에 참여한 국내 미디어 아티스트 여덟 팀은 지속적인 기후 위기와 팬데믹 상황 속에서 인류가 방향감각을 상실하고 혼돈에 빠질 잠재적 상황을 가정하여 우리가 직면한 위기를 직시하는 아포칼립스 세계관을 보여준다. 인류 종말 직전에서부터 인간과 비인간이 연결된 가상의 공간, 인류 종말 후 지구에 적응한 비인류의 모습에 이르기까지 앞으로의 세계를 재정의한다.  


전시는 김훈예와 얄루의 융복합 프로젝트인 ‘호모폴리넬라 더 랩’의 영상 작품으로 문을 연다. 호모폴리넬라는 광합성이 가능한 포스트휴먼 종으로, 시각예술과 과학, 그리고 문학의 접점에서 탄생했다. 포스트휴먼 주체는 인간-아닌 것들, 즉 낯설고 기이한 존재들과 조우하면서 차이를 수용하는데, 호모폴리넬라가 자체 광합성을 통해 에너지를 스스로 만들어낸다는 설정은 인간 개념의 변화된 양상과 가능성을 암시한다. 인간이 더 이상 인간이 아닌 모습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이러한 가정을 통해 융합과 혼종성의 시대를 미리 엿볼 수 있다. 


호모폴리넬라 더 랩, <미끌미끌 축축한>, 단채널 영상, 도서, 2022.


호모폴리넬라 더 랩이 미역과 같은 해조류를 통해 비인간 존재와의 결합을 암시했다면, 장윤영은 <넥스트 가이아>(2022)에서 인공지능이 분석하는 미래의 생명체를 그린다. ‘가이아(Gaia)’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대지의 신으로, 제임스 러브록(James Lovelock)은 ‘가이아 가설’을 통해 지구 전체를 신성한 유기체로 보는 이론을 설파한 바 있다. 이러한 일원론적인 접근은 근대적 주체 개념인 휴머니즘의 이원론을 전면으로 비판하고 그 한계를 넘어서려는 시도로 해석된다. 장윤영은 새로운 생태에 대한 일원론적 접근을 바탕으로 이미지 생성 알고리즘인 ‘달리(DALL-E)’와 텍스트를 구현해주는 AI인 ‘GPT-3’을 통해 인공지능이 예측한 미래 생태종을 순차적으로 드러낸다. 작가와 AI의 협업으로 구현된 미래 생태 종들은 비현실적이면서도 사실적인 이미지로 나타나며 하나의 체계를 구성해나간다는 점에서 인간 존재의 전통적 조건을 해체한 후에 등장할 포스트휴먼을 예견한다. 


장윤영, <넥스트 가이아>, 인터랙티브 아트, 어플리케이션, 2022.


포스트 아포칼립스에 등장할 포스트휴먼을 ‘물질’ 측면에서 고찰한 작업도 전시를 구성하는 주요 주제다. 박예나는 <아티얼리즘: 수상한 초대>(2021)의 후속작업인 <아티얼리즘으로부터: 에피소드 1>(2022)을 통해 ‘몸’이라는 물질이 사라진 데이터 세계를 형상화했다. ‘아티얼리즘(Artialism)’은 인류가 물질을 기반으로 문명을 이루고 번성했던 마지막 시대를 의미하는 작가의 용어이다. 박예나는 미래의 인류가 몸을 되찾기 위해 현재의 인류를 초대하고 여정을 시작하게 되는 세계관을 게임의 방식으로 구축하면서 게임 속 세계가 그저 먼 미래가 아닌 현재의 세계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상기시킨다. 


박예나, <아티얼리즘으로부터: 에피소드 1>, 인터랙티브 도서, 웹, 단채널 영상, 2022.


앞으로 도래할 포스트휴먼의 미래에서는 인간과 비인간이 서로 연결되면서 생물학적 인간의 기준이 와해되고 새로운 존재가 등장할 것으로 예견된다. 황선정은 실재하는 식물이 실시간으로 보내는 생체 신호와 디지털 환경에서 구축한 네트워크를 연결하여 인간과 비인간의 인터페이스를 실험한다. 작가는 이를 통해 기술과 자연, 인간의 유기적인 관계 맺음을 드러내고자 한다. ‘탄하무 프로젝트’라고 이름 붙인 작업에서 식물-나무-균사 네트워크를 연결하는 인터페이스를 개발해 그 상호작용의 과정을 다양한 매체로 표현한다. ‘탄하무’는 신체와 마음의 욕구를 의미하는 고대 산스크리트어 ‘Tanhā’와 한자 ‘舞’(춤추다 무)를 합성한 말로, 식물들의 공생관계를 통해 인류를 지구-행성적 관점에서 바라보려는 시도로 해석된다. 이번 전시에서 선보인 <탄하무: 탄하무트로니카>(2022)에서도 포스트휴먼의 물질 대사와 유기적인 네트워크를 그려냄으로써 공생적 삶에 대한 영감을 전달한다. 


황선정, <탄하무: 탄하무트로니카>, 혼합매체, 커스텀PCB 인터페이스; 틴하무트로니카, 식물, 버섯, 실시간 오디오-비주얼, 2022.


인간을 지구-행성적 관점에서 바라보려는 시도는 언해피서킷의 <우주통신 지구국 1420 MHz>에서도 나타난다. 이 작품은 우주의 시민을 위한 지구 방송국을 표현한 것으로, 지구와 인간에 대한 정보를 외계 시청자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설립되었다는 세계관을 지니고 있다. 전자 음악가이자 미디어 아티스트로 활동 중인 언해피서킷은 인간이 아닌 존재를 탐구함으로써 휴머니티의 범주를 확장하는 데 관심을 둔다. 작가는 인간 이외의 존재를 탐구하면서 인간다움에 대한 반성적 성찰을 포괄하고 경계를 허무는 작업으로 나아간다. 


언해피서킷, <우주통신 지구국 1420 MHz>, 영상, 사운드, 파라볼라 안테나, 2022.


한편,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지도 그리기에서 ‘가상’은 하나의 표식으로서 경로를 구성한다. 온오프라인에서 설치미술을 다루는 작가인 조현서는 <이스케이프 스페이스>(2022)를 통해 메타버스 기반 가상의 전시 공간에 조각을 설치함으로서 가상성을 드러낸다. <이스케이프 스페이스>는 작가의 조각을 전시하는 가상의 전시 공간이기도 하지만, 그곳으로 들어가는 실물 입장권인 ‘이스케이프 키(key)’를 판매하는 곳이기도 하다. 관객은 입장권을 카메라로 인식시켜 전시 공간으로 입장하며 이곳에서 우리의 일상을 관통하는 조각을 살필 수 있다. 


조현서, <이스케이프 스페이스>, 웹 메타버스, 알루미늄 제품, 3D 영상, 2022.


게임이라는 가상의 형식과 메타버스 공간을 통해 ‘연결성’에 대한 주제를 다루는 전도희(팀 27%) 또한 현실과 가상에 동시에 존재하는 모호한 상태를 가시화한다. 그는 VR, 모션트래킹 센서와 같은 인터랙티브 디바이스를 활용하여 관객으로 하여금 가상의 공간을 탐험하게 한다. 이전 작품에서는 가상과 현실의 경계에서 사람들이 느끼는 감각과 인식의 부조화를 이야기했다면, 이번에 선보인 <캔드비>(2022)를 통해서는 친구를 만들 수 있는 디지털 펫 프로젝트를 소개함으로써 ‘관계’라는 추상적 개념을 존재와 존재의 만남으로 형상화한다. 


전도희(팀 27%), <캔드비>, P2E NFT 게임, 분산 어플리케이션, 2022.


온오프라인에서 발생하는 문화와 그로부터 파생되는 문제를 게임이라는 형식으로 다루는 안가영은 미래 인류가 이주하게 될 외계 행성인 ‘히온(Hiion)’을 통해 외계의 존재들과 공생하는 모습을 그린다. 디지털 게임은 가상공간에서 미래에 대한 비전을 구현하는 형식을 지닌 만큼, 관람객은 상호작용을 통해 작가가 그려낸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계관을 체현하게 된다. 지금까지 살펴본 작가들이 인류의 종말부터 새로운 종의 탄생, 현실과 가상의 문제를 다루었다면 안가영은 인류 종말 후 새로운 행성에 정착한 기이한 존재들을 그리면서 인류의 미래를 점친다.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인공지능이 우리의 생각과 다르게 작동하는 것처럼, ‘히온’에 먼저 도착한 안드로이드 로봇들은 인류의 상상과 사뭇 다르게 진화해 있다. 외계의 존재들과 공생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 핍진성 있는 이 작품을 통해 우리는 현재를 발견하고 새로운 대안적 세계를 상상해볼 수 있다. 


안가영, <히온의 아이들.beta>, 시네마틱 VR, 영상, 웹, 2022.


미국의 컴퓨터 과학자 레이 커즈와일(Ray Kurzweil)은 과학기술의 발전 속도가 너무 빨라져서 인간의 삶이 회귀 불가능할 정도로 깊이 변화하는 것을 ‘특이점(Singularity)’이라는 용어로 설명한 바 있다. 그는 2045년경을 특이점에 다다르는 시점으로 예측했지만, 기후 위기와 코로나 팬데믹 상황으로 미루어 보면 이미 인류가 특이점에 다다른 것일 수 있다는 의견도 존재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세계를 탐색한 작가들의 예술적 실천은 현 시대가 욕망하고 상상하는 포스트휴먼을 그려냈다는 점에서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다. 이 방향은 인류라는 틀 안에 국한되어 있던 범주에서 벗어나 탈-인류라는 새로운 지향으로 나아간다. 참여 작가들은 인류가 새로운 종으로 변형되는 탈-인류를 형상화함으로써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계에서 인간 존재의 조건에 대한 긍정적 가능성을 제시한다. 




본 글은 '인터랩(INTERLAB)'에 발행되었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데이터는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