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수지의 <MIT 부르스 글리크너의 교수 강의 2: 비트콘드리아와 다중-디지털 공간 존재 증거(Lecture 2: The Footprint of the Existence of Bitchondria and Multi-Flattened Flat Space)>는 씨알콜렉티브의 기획 전시 《대체불가현실: □☞∴∂★∽콜렉티브》 (2022.12.8. ~ 2023.1.28.)에 소개된 설치 작품이다. 이 작품에는 디지털 공간과 물리적 공간 사이의 관계에 대한 작가의 상상이 체계적으로 담겨 있다.
작가는 디지털 공간과 물리적 공간 사이에서 발생하는 새로운 경로를 찾기 위해 ‘비트콘드리아(Bitchondira)’의 세계관을 창조한다. 비트콘드리아는 디지털의 가장 작은 정보 단위인 ‘비트(bit)’와 유기체의 세포에 에너지를 공급하는 역할을 하는 ‘미토콘드리아’가 결합한 말이다. 작가가 디지털 공간과 물리적 공간의 사이를 유영하기 위해 미토콘드리아의 은유를 활용한 것은 미토콘드리아가 외막과 내막으로 이루어진 특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미토콘드리아의 내막과 외막 사이의 영역을 가리키는 막 사이 공간(intermembrane space)은 호흡이나 대사기능 조절과 같은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4차원 이상의 인터넷 공간에 살고 있는 데이터 소기관인 비트콘드리아는 미토콘드리아의 막 사이 공간이 세포활동을 조정하는 역할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데이터가 더 빠르게 움직일 수 있도록 돕는다는 것이다.
비트콘드리아가 단순히 미토콘드리아만을 은유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비트콘드리아는 아주 작은 양자 세계부터 거대한 우주 공간 사이를 넘나드는 초끈의 특성, 그리고 인공지능 진화에 필요한 양자비트의 특성을 모두 지닌 생명체로 설정되어 있다. 비트콘드리아가 다중 디지털 공간을 탐험할 수 있다는 ‘증거’로 제시된 것이 바로 <MIT 부르스 글리크너의 교수 강의 2>이다. 18분 26초의 3채널 영상과 설치로 구성된 이 작품은 가상 인물인 부르스 글리크너 교수가 비트콘드리아와 다중 디지털 세계의 존재 증거를 설명하는 일종의 페이크 다큐멘터리이다. 세계관에 설득력과 신뢰성을 더하기 위해 교육 강의의 형식을 차용했다.
작품 속 부르스 글리크너 교수가 제시한 첫 번째 증거는 각기 다른 시대에 살았지만 공통적으로 다중우주론을 주장한 철학자, 과학자, 문학가, 종교인이 함께 찍은 단체 사진이다. 다중우주론은 어떤 한 사건이 서로 다른 선택으로 인해 여러 결과가 생겨나고 이것이 다양한 평행 우주 안에 존재한다는 이론으로, 양자역학의 해석 중 하나다. 한수지는 다른 시대를 살았던 이들이 동일한 공간에서 함께 찍은 사진을 영상과 설치로 표현하면서 우리로 하여금 가상과 현실의 경계, 다중세계의 가능성에 대해 묻는다.
비트콘드리아와 다중 디지털 세계의 존재 증거를 설명하는 두 번째 증거는 브라이언 그린(Brian Greene)의 『멀티 유니버스』(원제: The Hidden Reality) 164쪽이다. 164쪽에는 ‘끈 이론’의 검증에 사용될 수 있는 실험 및 관측 자료들이 표로 정리되어 있다. 작가는 이 페이지를 비트콘드리아가 우연히 쓴 것으로 설정했다. 끈 이론과 실제 데이터를 연결시키는 이 목록은 작가의 관심사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디지털 정보와 물리공간의 정보들이 변환되는 과정에 관심을 두고 작업을 지속해온 작가가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할을 통합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끈 이론’을 택한 것은 일종의 사이 공간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연관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비트콘드리아와 끈 이론의 연결고리가 비교적 자연스럽게 느껴졌던 데에는 비트콘드리아가 인간이 작성한 데이터를 비트로 변환시키는 역할을 수행한다는 세계관이 이미 설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한수지는 2021년 선보인 <비트콘드리아 겉가죽 표본>에서 비트콘드리아를 비트-플랑크톤의 세포 안에 있는 작은 세포 소기관으로 설정하고 비트콘드리아의 모습을 확대해 표현했다. 종이 두께의 ‘백억분의 백억분의 백억분의 십분의 1’ 크기인 비트콘드리아를 모형으로 만든 것으로, 이 설치 작품은 실제 비트콘드리아의 존재를 상상하게 만든다. 실재와 가상이 혼합된 이미지가 물리적 공간과 결합해 현실을 재구성하는 것이다.
이처럼 비트콘드리아는 실제 형상을 통해 가상과 실재가 겹쳐지는 것과 같은 인상을 남김과 동시에 이미지가 표현하는 내러티브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지각을 형성시킨다. 우리는 일상에서 오프라인 공간과 인터넷 공간 사이를 오가며 감각과 사고방식이 변화하게 되는데, 비트콘드리아의 내러티브는 이러한 과정을 은유하면서 시간성과 공간성을 새롭게 구성한다. 가상적 여기가 실제적 여기를 형성하면서 또 다른 공간으로 탈바꿈되는 것이다.
우리는 종종 지구가 속한 우주 A 외에도 우주 B, C, D…가 존재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MIT 부르스 글리크너의 교수 강의 2>는 다양한 시공간에 동시에 존재하는 우주의 가능성을 제시함으로써 다중디지털 공간에 대해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한수지는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영역 외의 또 다른 세계에 대한 상상을 지속해 온 만큼, 그의 작품 앞에서 우리는 비물질의 세계를 구성하는 요소들을 마주하게 된다. 작가의 상상 속에서 탄생한 보이지 않는 배후의 세계에서 다른 차원의 현실이 감각되는 순간을 발견할 수 있다.
본 글은 '인터랩(INTERLAB)'에 발행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