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미디어 예술에서 상호작용성은 미적 경험의 주요 부분을 차지한다. 작품과의 상호작용을 위해서는 신체에 입력되는 자극이 필수적인 것처럼 여겨지기도 하지만, 실제로 상호작용이 발생하는 지점은 단순히 물리적 신체에 국한되지 않는다.
뉴미디어 예술을 경험할 때 인간의 신체는 정신과 긴밀하게 연결된다. 서양 철학의 전통에서 정신은 철저하게 신체와 분리되는 것으로 여겨졌으나, 뉴미디어 예술에서의 상호작용은 단순히 신체적 경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 세계로부터 감각 정보를 받아들이는 인지의 영역을 포괄한다.
예술 작품 감상에서 인간의 신체와 정신을 긴밀하게 연관 짓는 이러한 접근 방식은 ‘체현된 인지(Embodied Cognition)’로 구체화해볼 수 있다. 체현된 인지 이론은 몸과 마음의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 경험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인지의 과정이 뇌 신경망에 국한되지 않고 몸과 환경, 세계로 확장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접근 방법은 모리스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의 현상학과 연관된 것으로, 마음은 신체화되어 있고 이성은 몸에 의해 형성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메를로-퐁티에 따르면 인간은 단순히 감각하는 자가 아니며, 감각은 인간과 세계가 서로를 체험하며 현존하는 것으로 정의된다. 즉, 감각은 인간이 신체로써 세계 속에 존재하는 상태를 가리킨다.
체현된 인지 이론은 뉴미디어 예술에서 상호작용성이 강조되는 이유를 설명하는 데 유용하다. 실제로 예술 작품의 감상은 체험과 직결되어 있으며, 작품은 관람객의 몸과 마음이 개입해 상호작용하며 완성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페터 바이벨(Peter Weibel, 1944-)의 작품은 체현된 인지를 예술적으로 구현한 사례로 읽히며,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개인전 《페터 바이벨: 인지 행위로서의 예술》(2023.2.3. ~ 5.14.)에서 그의 예술적 실천을 살펴볼 수 있다.
바이벨은 예술을 인지 행위 그 자체라고 보았다. 즉 직접 관찰하고 느끼고 인지하는 행위가 예술이 된다는 의미다. 가령 <관찰을 관찰하기: 불확실성>라는 작품에서 그는 ‘인지 행위로서의 예술’이 무엇인지 표현한다. 3대의 카메라와 모니터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어떤 각도로 움직여도 오직 자신의 뒤통수만 보이도록 설계돼 있다. 관객이 바닥에 그려진 기하학적 문양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카메라가 관객의 모습을 촬영하고, 관객은 모니터를 통해 실시간으로 자신의 모습을 관찰하게 된다. 그러나 어떤 각도로 몸을 움직인다 해도 자신의 앞모습이 아닌 뒷모습만 보인다. “관찰자가 자신의 관찰을 직접 관찰할 수는 없다”라는 메시지를 던지는 이 작품은 예술이 인지 행위 그 자체임을 드러내고, 관객들에게 작품과의 소통을 제안한다.
바이벨의 <주체의 십자가형>도 체현된 인지로서의 예술을 고찰하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나무십자가와 그 안에 설치된 카메라, 2대의 센서, 그리고 1대의 모니터로 구성돼 있다. 카메라는 팔을 벌리고 섰을 때만 켜지는데, 그 이유는 우리가 팔을 벌리고 섰을 때에만 ‘십자가’ 모양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현상학에서의 ‘감각’은 인간이 살(flash)적 존재로서 세계 내에 존재하는 것인데, 바이벨은 이 작품에서 십자가라는 기독교의 상징을 활용하며 의식적 경험구조로부터의 감각을 드러내도록 유도한다. 관람객은 십자가 모양으로 팔을 벌려 작품과 상호작용하는 과정에서 신체적 반응이 의식의 차원에 영향을 미치는 순간을 경험하고, 이성이 신체적 경험의 본성에서 유래한다는 사실을 체현하게 된다. 이처럼 뉴미디어 예술 작품을 경험하는 데 있어 신체를 매개로 소통하는 과정은 우리의 인지적 경험을 풍부하게 만든다.
<가능한>이라는 작품을 통해서는 우리가 의식적 인지뿐만 아니라, 무의식적인 인지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작품에 가까이 다가서면 필름 영사기가 ‘가능한’이라는 단어를 비추고 있는 모습을 인지하게 된다. 그렇기에 영사기와 스크린의 사이 공간을 지나가면 당연히 ‘그림자’가 드리우고 단어가 가려질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작품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서면 단어를 비추는 스크린이 있는 것이 아니라, 흰색 나무 패널에 접착된 글자였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인간의 감각과 사고가 무의식적 차원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다. 바이벨은 이 작품을 통해 모든 것은 ‘가능’하고, ‘가능한’ 것은 실재하는 것에 새겨져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가상’에는 잠재되어 있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는 만큼, 현실보다 더 큰 가능성을 품은 무의식의 공간을 구현한 작품으로 읽힌다.
한편, 바이벨은 <감정의 화산학>에서 인간의 감정을 보다 직접적으로 다룬다. 감정은 언어를 통해 전달되는 경우도 있지만, 행동이나 자세 같은 비언어로 표출되기도 한다. 바이벨은 빈에서 진행한 퍼포먼스를 재구성해 9면의 모니터로 설치한 이 비디오 작품에서 비언어적인 과정이 어떻게 감정으로 전달되는지 표현한다. 그는 누군가 특정한 공간에서 어떤 신체적 표현을 할 때 그것은 그가 느끼는 감정을 표현한 결과물이라고 보았다. 즉, 공간에 따라 반응하는 인간의 행동은 감정을 투영하는 거울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체현된 인지는 신체의 감각기관을 통해 받은 자극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체현을 통해 유동적으로 변화하는 감정을 포괄한다. 바이벨은 이 작품에서 비언어적 표현을 통해 감정을 드러내는 방식을 고찰하고, 신체가 공간과 맺는 관계가 복잡해질수록 표현되는 감정 역시 다양해진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바이벨의 작품을 통해 인간의 신체와 정신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발견했다면, 이제 이러한 사고를 기술적 측면으로 확장해볼 수 있다. 인간과 세계의 관계를 파악하는 데 있어 ‘기술’이 하나의 중요한 축으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인간과 기계의 경계가 모호해진 이러한 상황을 마셜 매클루언(Marshall McLuhan)은 ‘인간의 확장’이라 표현했고,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은 신체와 테크놀로지의 결합이라는 의미에서 프로스테시스(Prosthesis) 논의로 확장한다. 뉴미디어 예술의 미적 경험은 신체의 확장이라는 측면에서 새롭게 체현된 인지를 가능하게 한다.
1960년대부터 뉴미디어 예술을 선보인 바이벨은 새롭게 등장한 기술 장치가 체현된 인지를 가능케 한다고 보았다. 당시 중요한 기술 매체로는 ‘사진’을 들 수 있는데, 바이벨은 사진이라는 장치가 가진 기계적 특징에 주목하면서 다양한 자화상 연작을 선보였다. <여자로서의 자화상>, <익명인으로서의 자화상>, <어린 개로서의 자화상>은 바이벨이 눈과 입을 신문이나 광고 사진으로 가린 채 찍은 사진이다. 다소 낯설어 보이는 이러한 모습을 통해 작가는 사진이라는 기술이 가지는 매체적 변화를 포착하고, 인간의 감각적 경험을 확장한다. 기술을 통한 감각이 어떻게 인간의 신체를 확장시키고 새롭게 체현되는 감각으로 확장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바이벨의 작품은 뉴미디어 예술을 경험하는 다양한 주체들에게 체현된 인지를 가능하게 하면서 정신과 신체에 대한 이분법적 해석의 한계를 넘어서게 한다. 실제로 우리는 그의 작품을 경험할 때 정신과 신체, 자연과 기술, 가상과 현실이 완전히 구분된 개념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바이벨은 세상을 이분법적으로 바라보는 기존의 시각을 거부하고 새로운 인지적 경험을 제안한다. 인식의 과정 자체를 예술로 본 그의 시각을 통해 우리는 체현된 인지의 새로운 가능성을 탐구하게 된다.
본 글은 '인터랩(INTERLAB)'에 발행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