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동생
내 기억 속의 여동생은 재능이 많았던 소녀의 모습이다.
여동생은 내가 초교 입학 후 본격적인 기억의 선상에 등장을 하는데 나는 잘 모르겠으나 어릴 적 여동생의 미모를 흠모하던 친구들이 있었다. 예를 들자면 4학년 때 한 반이었던 웅변 특기 친구도 있었고 친척 조카 중에도 당시 여동생의 외모를 기억하는 경우가 있더라.
여동생이 밉상이라는 것이 아니다. 어릴 적 내가 지닌 기억과 약간 차이가 있다는 것일 것뿐이니 오해는 마시기를.
그런데 여동생이 공부도 잘하는데 피아노까지 수준급이었으니 나의 초교시절에는 어떻게 커버가 되었지만 중학생 이후에는 차이가 많이 생겨서 비교불가한 모범생의 전형이었다.
이렇게 훌륭한 여동생이 너무 독주를 하다 보니 나에게는 상대적인 열등감이 존재했었다.
나는 공부를 잘하기를 하나 무슨 내세울 특기가 있기를 하나.
그러다가 사춘기에 들어서면서 동생의 못 마땅한 부분이 발견되면 괜스레 시비를 걸고 그랬는데 잦은 신경전을 지켜보시던 아버지가 참다 참다가 결국은 나와 여동생에게 회초리로 훈계를 하셨는데 어린 마음에 나의 옹졸함이 부끄러워서 몸 둘 바를 몰라했었다.
한 번은 장난을 친다고 유리창 건너편에 있던 여동생을 발견하고 유리창을 툭 친다는 것이 힘 조절이 안되어 유리창은 깨지고 파편이 여동생 미간으로 날아가 박히면서 많은 피를 흘렸는데 아마도 이 시점이 내가 여동생에게 부린 치졸함의 극치가 아니었나 싶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쑥스럽고 여동생한테 미안한 기분이 든다.
나이는 2살 차이지만 학년은 1학년이 차이가 나서 내 동창이거나 동생 동창들과 차이가 별로 없었다. 친구들 중에 재수를 했다면 여동생과 같은 학번이 되는 것이다.
실제로 그런 친구들이 가까운 녀석들 중 몇 명이 존재했었다.
여동생은 공부는 기본으로 줄곧 탑이었고 피아노도 내가 듣기에는 수준급이었는데 당시에는 피아노 학원에서 발표회를 한다고 음악당이나 지역 내 문화회관을 임대하여 학원생들의 가족들을 초청하는 경우가 있었다. 1년에 1-2번 정도를 했던 것 같은데 여동생 입장에서도 친척들을 초대한 발표회이니 얼마나 연습을 했겠는가? 그냥 들어도 슈베르트였고 베토벤이었다.
지금도 집에서 열심히 연습하던 여동생의 뒷모습이 생각나고 귀가 울리던 아름다운 피아노 선율이 그립고 생각이 많이 난다.
앞 화단의 제철 꽃들과 잘 어울렸던 그 피아노 선율이 그립다.
남동생
어릴 적 남동생의 출현 시점은 잘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어느 날 보니 평소에 못 보던 아이가 생겼는데 그게 남동생의 탄생이다.
어릴 적 남동생은 개구장이와 장난꾸러기를 잘 비벼 놓은 중간 메뉴 스타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개구장이와 장난꾸러기는 어떤 뜻인가 살펴보았다.
장난꾸러기 : 장난이 심한 아이
개구쟁이 : 심하고 짓궂게 장난을 하는 아이
그럼 수정한다. 짓궂게 장난을 하지는 않았으니 장난꾸러기로 정정한다.
한 번은 친구들과 놀다가 넘어졌다고 하는데 여기저기 피부가 상하고 피를 흘리며 집에 온 적이 있었다. 이쯤 되면 부상 원인이나 전후 사정은 둘째가 되고 형으로서 단순한 원인제공자에게 신체적인 응징을 날려야 할 필요가 있는데 바로 그러한 타이밍이었다.
남동생에게 원인 제공자를 확인한 후 다른 아이들과 놀고 있던 동네 아이한테 징벌을 내렸다. 지금 생각해보면 동생이 기억하는지 몰라도 내가 생각하는 최선의 선택이었지 않았나 싶다.
내가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가 없을 상황이었고 원인을 제공한 동네 아이의 배를 주먹으로 강타했는데 타격하는 힘의 세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동생의 부상에 대한 형의 안타까움과 다른 동네 친구들에게 동생에게는 형이 있다는 존재감을 심어 주어야 할 시점이었다.
내가 어린 동생을 보호하기 위하여 선택한 잘된 나의 행동이었다고 생각한다.
훗날 고교 절친 임 반장과 같은 학교를 선택해서 대학 진학 후 임 반장이 나를 대신해서 남동생을 챙겨주었는데 지금도 늘 감사하게 생각한다.
누군가의 순수함으로 배려된 보살핌은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감사한 느낌으로 평생을 간다.
그렇게 장난꾸러기로 일관성 있게 성장한 남동생은 중학교 입학 후 농구선수로 활약하면서 고교와 대학을 특기생으로 진학했고 가족과 친척들의 관심과 응원을 받았었다.
덕분에 내가 동생의 교체용으로 남은 중고 농구화를 애용하면서 어머니의 신발값을 많이도 절약해 드렸다.
지금도 아이들이 신고 다니는 농구화 스타일의 신발들을 보면 남동생 덕에 신고 다녔던 그 시절 농구화가 생각나고 남동생이 생각난다.
농구화는 곧 내 추억 속의 남동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