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일기 : 탄생과 성장 5

by 제이킴

掛けうどん


우동에 대한 아름다운 추억이 생각난다.

어릴 적 겨울은 유난히도 추웠다. 한옥에 살아서 그런지 외풍도 심하고 손은 늘 터 있었고 볼도 겨울 동안 홍조를 띤 얼굴로 건조하게 보내는데 기다려지는 중요한 겨울 행사가 있었다.

바로 목욕 후 먹는 각기우동 掛けうどん.

일본식 발음으로는 ‘가케우동’ 인데 한국식 발음으로는 ‘각기우동’으로 변형된 듯하고 지금으로 말하면 일식 가락국수인데 겨울만 되면 아버지와 남동생과 함께 목욕 후 먹는 그 우동의 맛이 기가 막혔다. 지금 생각해보면 포장마차에서 많지 않은 재료로 즉석 해서 만드는 음식이 얼마나 맛이 있었겠나 싶은데 그때는 따끈한 국물이 목젖을 타고 내려가면 온통 속이 훈훈해지는 쾌감이 있었다.

목욕탕에서 온탕과 냉탕을 오가며 놀았으니 혈액순환은 이미 완료되었고 때밀기는 2인 1조로 자기 반 타인 반으로 대충 밀어내고 허기진 배를 채우는 시간이 되면 목욕탕 앞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빨간 포장마차의 그 우동은 겨울철을 상징하는 음식이 되어 버렸다.

포장마차 아저씨도 정해진 시간에 영업을 시작하는데 그 날은 보이지 않아서 아버지한테 물어보았더니 아저씨는 아직 안 나왔지만 목욕이 끝날 시간이 되면 포장마차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위안을 하셨다.

그럼 그렇지. 어린 마음에 목욕은 부차적인 활동이고 우동을 먹을 수 있느냐로 주객이 전도되었는데 목욕을 마치고 고개를 빼꼼하게 길게 늘어트리고 포장마차를 찾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왜 그리 허전하던지. 포장마차가 있어야 할 자리에 찬 바람만 휑하니 머문다. 포장마차 아저씨의 부재를 원망하며 가던 길을 돌아보고 또 돌아보며 집에 갔다.

혹시나 늦은 출근을 할지도 모르는 포장마차 아저씨의 등장을 고대하며.



삼촌과 조카


어릴 적 큰 집에 가면 기본적으로 20명 정도가 모였다.

아버지 형제들이 10남매인데 아버지는 9번째 쌍둥이 형님이고 10번째는 쌍둥이 동생인 작은 아버지. 그러다 보니 큰아들이 장가를 가서 낳은 첫째보다 막내아들 같은 아버지가 더 늦게 태어나는 경우가 생긴다.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고? 삼촌과 조카가 같이 자라면서 싸우기도 하는데 커서 보면 삼촌과 조카 사이라는 말이다. 어린 삼촌이 큰 조카한테 맞기도 한다.

할머니가 쌍둥이 형제를 낳은 후 젖이 모자라면 며느리한테 젖을 빌리곤 했다는데 형수의 젖을 먹고 자란 도련님들이 바로 우리 아버지와 작은 아버지.

큰아버지가 낳은 8남매와 쌍둥이 아버지 형제와 그리고 큰 어머니 친정 식구 중 학업을 위하여 같이 생활하던 학생들을 합치면 물경 11-12명.

집안 일과 식사를 도와주던 가사도우미가 흔하던 시절이었기에 한 집에 15명이 살면서 많을 때는

도시락을 20개 이상 준비하던 시절이 있었다고 한다. 한 달에 쌀 두 가마를 소비를 했다고 하는데 정말일까? 그 당시에는 식사량도 많아서 고봉高峯처럼 올린 밥그릇이 대세이기도 했다.

그렇게 되면 내가 3세이고 일찍 자손을 보셨던 큰 집들 식구들의 4세들과 같이 성장을 하는데 설날이 되면 새해 인사를 드린다고 우르르 몰려다니곤 했다. 할머니와 거의 동급인 큰어머니는 우리에게 고쟁이 바지에서 쌈지 주머니를 꺼내어 일일이 덕담을 건네며 세뱃돈을 주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할머니와 큰어머니의 나이는 20살 차이가 나지 않았을 것이다.

할아버지는 60세 이후 돌아가셨는데 그 당시에는 장수하신 편이셨고 할머니는 90세 이상 장수하셨다. 할머니가 우리 집에는 일 년 중 약 1-2달 머무시면서 우리들에게 아버지 학창 시절 무용담을 이야기해 주셨다. 물론 약간의 과장이 있을 수 있겠지만 어린 내가 듣기에 어마어마한 활약상을 느낄 수 있었는데 거의 협객 수준이었다.

신성일이 주연한 '맨발의 청춘'이 생각난다.

아버지가 주연한 '쌍둥이의 청춘'도 영원하소서.

세발자전거


오래된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면 세발자전거를 타고 다녔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모르지만 세발자전거를 고인 빗물에 넣고 세차 놀이를 하던 사진이 있었다.

나의 세발자전거는 뒤에 동생을 태울 수 있는 조그만 안전석이 있었는데 혼자 자전거를 타다가 무료해지면 여동생을 태우고 다니기도 했다. 그 당시에 어린이들이 누릴 수 있는 호사였다.

어떤 세발자전거는 1인승이었는데 뒤에 탑승석이 없어서 지금의 2인승 쿠페 같은 느낌이 난다.

세발자전거는 일단 넘어질 염려가 없다. 이륜 자전거는 세워 놓으면 넘어지지만 세발자전거는 자력으로 잘 서있다. 물론 세발이 접지되어 속도는 느리지만 아이가 즐기기에는 제법 속도감이 있었다.

어린 기준으로 봐도 품질은 그다지 좋지를 않았는데 특히 핸들 부분이 유격이 생겨서 얼마 타지 않았어도 자전거포에 가서 얼라이먼트 조정을 받아야 했다. 과정은 단순해서 드라이버로 느슨해진 나사를 조여만 주어도 바로 핸들이 고정되고 운행에 지장이 없었다.

그 당시 나랑 다니던 '세발자전거 야타족'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강아지 수난사


우리 집 강아지들은 비교적 단명을 했다.

복날에 잡아먹었냐고? 아니다. 대부분 사고사였다.

한옥집 화단의 모서리에서 전원생활을 즐기던 당시 우리 집 개들은 나의 사랑으로 대부분 행복한 견공들이었다.

아직도 기억이 선명한 몇 마리가 있다. 스피츠, 그레이하운드.

스피츠는 흰 털이 예술이었고 그냥 보아도 눈이 부실 정도로 정갈한 하얀색이었다.

낮은 대문 틈 아래로 동네 마실을 다니다가 내가 학교에서 돌아올 시간이 되면 대문이 잘 보이는 토방에 자리를 잡고 얌전하게 엎드려서 대문을 바라보며 나를 기다린다고 어머니가 신기하다고 했다.

스피츠 이름이 ‘메리’ 였는데 그 당시 견공들 이름은 8할이 영어 이름이었다. 개들 이름만 보아도 당시 미국이 한국에 심어준 국력과 자유우방의 영향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메리는 순정파였다. 유달리 나에 대한 애정표현이 심했다.

하루는 귀가 후 메리가 안 보이길래 기다리고 있는데 누군가 교통사고로 죽은 개가 있다고 한다.

도로에 설마 하고 나가보았더니 메리가 길게 누워있었다. 화단에 내가 직접 눈물로 묻어 주었다.

메리랑 같이 나누어 먹었던 아이스크림과 과자를 사서 같이 묻었다.

그레이하운드는 외삼촌한테 선물로 받았다. 새끼였는데 정말 영화에서 보던 날씬한 체형과 드문드문 박힌 점들도 세련되게 보였다. 개를 받아오던 날 구멍가게에서 산 빵을 같이 먹었다.

그 날 따라 추운 어느 겨울밤. 밖에서 자던 하운드가 추워서 그런지 자꾸 낑낑거린다.

지금 생각하면 마루에 올려서 하루 밤을 재울 수도 있었는데 당시 개에게 금지된 사람의 영역인 마루를 넘어와서는 안된다는 분위기가 유지되어 결국 그 겨울밤을 이기지 못하고 동사를 했다.

다음 날 희미한 숨을 내쉬는 하운드를 보면서 그날 밤 나의 무관심과 무배려에 자책을 했었다.

부디 내가 좋아한 견공들이 다시 태어날 수만 있다면 다시 태어나서 애완견을 방 안에서 키우는 지금의 환경에서 행복하게 같이 살았으면 좋으련만...

이전 04화추억 일기 : 탄생과 성장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