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모네 집
외가 근처에 이모네 집이 있었다.
부산 말투를 쓰시는 이모부가 어떻게 이모와 결혼을 했는지 궁금했지만 누구에게 물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어릴 적 여동생이 아팠을 때 이모가 나를 잠시 키워줬다고 하는데 도통 기억이 없다. 그래서 사람은 배은망덕할 수 있는 동물이다. 기억이 나지 않으면 어쩔 수 없다고 얼버무릴 수 있는 동물들이다. 나를 그러한 사례로 보면 되겠다.
이모네 집은 아들, 딸, 딸, 아들 순으로 2남 2녀가 있었는데 장남이 나와 한 6-7년 차이가 나는데 내가 어릴 적부터 많이 귀여워했고 그 밑 동생들도 나와는 좋은 기억들이 있을 것이다.
이모의 입장에서는 내가 외가의 맏이였으니 많이 귀엽게 여기셨다고 삼촌들에게 여러 번 들었다. 그토록 이모는 나를 한결 같이 귀여워했다. 이모가 베풀어 주신 사랑의 1/10 정도라도 사촌 동생들에게 되돌려주려는 심리가 작동했을 수도 있었겠다. 어릴 적 이러한 사정을 지켜본 삼촌들이 한결같이 나중에 커서 이모의 은혜를 갚으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는데 내 불찰로 연락도 자주 드리지 못하고 있으니 죄송스럽다.
큰 집
큰 집은 딸 둘과 아들 셋 순서로 다섯 명의 자녀들이 있는데 어릴 적 큰 누나 집에 놀러 가면 식빵을 마가린에 구워서 딸기잼을 발라서 먹었는데 그 맛이 기가 막히게 맛있었다.
오죽하면 지금도 토스트를 만들어 먹어 보면 맛은 있으나 그 시절 맛이 안 나던데 맛에 대한 추억은 연령에 맞는 특별한 정서가 들어가야만 제 맛이 나는 모양이다.
둘째 누나의 매형은 나중에 내가 커서 ‘동래파전’이라는 전설의 술집을 출입할 때 우연히 만나서 술 값을 대신 계산해 주셨던 추억이 있다. 참으로 고마운 기억이 되시겠다.
큰 형은 중국 연길에서 식당을 하실 때 내가 손님들을 자주 모시고 가서 매상에 올려드렸던 적이 있었다. 형수님은 수줍음이 많아 보였던 여학생 이미지가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다.
둘째 형은 ‘로댕’ 시절 내가 자원한 알바 시기에 술자리를 자주 가졌었는데 젊은 날 아름다운 시절의 추억이 많이 묻어 있다. 사촌들의 어릴 적 물놀이 도중 찍은 깨복장이 사진을 보고 그렸다는 형수의 그림을 보았는데 사실감 있는 표현으로 우리들에게 다시 그 시절로 초대받는 느낌이 들게 하였다.
새삼 그림이 주는 위력에 감탄했었고 그 그림이 아직도 잘 있는지도 궁금하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그림 속의 추억으로 다시 이야기를 남기고 싶다.
셋째 형은 나와 1학년 위로 나에게 영어 과외를 통하여 중 3 화려한 영어의 시절을 열게 해 준 공신이었다. 또한 쥐포에 대한 맛의 기억도 심어준 다양한 추억의 공유자 이기도 하다.
어릴 적 큰 집에 놀러 가면 매일 아침 병우유가 배달되었는데 그 병우유 뚜껑을 우유에 닿지 않고 따는 방법도 알려주었다. 형수가 영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의 맥 라이언을 닮았다.
하루는 유리함에 있던 인공 화초를 내가 잘못 건드려서 큰 어머니가 그 유리에 베어 손가락에서 피가 났었던 죄송한 기억도 나는데 왜 그리 장난을 심하게 했는지 알다 가도 모를 일이다.
큰 아버지는 아버지와 작은 아버지와 함께 삼 형제가 합심하여 빙과류 도매 대리점 사업을 하셨는데 내가 어릴 적 태권도 도장에서 ‘아맛나’라는 별명으로 불려질 수 있게 해 주신 고마운 분이시다.
어릴 적 친할머니가 주로 계셨던 곳은 큰 집으로 아마도 다른 큰아버지들은 돌아가시고 남은 형제 중에 제일 연장자였는데 집안의 큰 어른으로 대소사를 결정하는데 많은 역할을 하셨다.
특히 할머니가 어릴 적 들려 주신 아버지의 '맨발의 청춘'은 내가 스스로 아버지를 우상화하는데 일조를 하였다.
우상화는 북한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더라.
할아버지는 내가 어릴 적 돌아가셨고 할머니는 내가 대학교 시절에 돌아가셨는데 할머니가 평소 보여주신 긍정과 장수의 기운을 우리 자손들도 두루두루 받았음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어느 초교시절 추석에 온 사촌들이 모여서 성묘를 하는데 서울대를 들어가는 후손들이 있으면 등록금을 지원하겠다고 공언하신 적이 있었다. 그런데 고마운 그 장학금을 유일하게 내 여동생이 수여를 받는 기쁨도 주셨다. 당시 대학 입시를 앞둔 사촌들은 물경 30명 가까이 되었는데 여동생이 유일한 장학금 수혜자였으니 여동생은 물론 부모님께도 기쁨의 추억을 만들어 주셨던 큰 아버지는 당시에 기발한 동기부여로 학습의욕을 북돋아 주셨던 고마운 이셨다. 그때 정신 차리고 나도 열심히 공부를 했었더라면 서울대를 갈 수 있었을까?
당시 큰 아버지의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후보자는 대충 헤아려 봐도 큰 집에 5명, 우리 집에 3명, 작은집에 3명, 큰 약국 집에 5명, 작은 약국 집에 3명, 변호사 형님 집에 3명, 사무관 형님 집에 2명, 고모네 5명 등등.
그러고 보니 그 많던 사촌들 중에 유일한 장학금 수혜자였던 여동생은 정말 대단했고 새삼 자랑스럽다.
작은 집
쌍둥이 동생이신 작은 아버지가 또 쌍둥이를 낳으셨으니 분명 뉴스거리 감이다.
쌍둥이 형제는 나보다 같은 해에 태어나 생일이 빠르다고 사촌 형들이 되었는데 어릴 적 사진을 보면 판박이지만 성장과정을 통하여 후천적 요인이 작용을 했는지 지금은 많은 부분에서 차이를 느낄 수 있다. 멘델의 유전법칙이 아니더라도 아버지 쌍둥이 형제도 어릴 적 사진을 보면 구분이 안 될 정도인데 지금은 역시 많은 차이가 있어 보인다.
어릴 적 작은 집에 놀러 갔는데 어느 겨울 아침 일찍 작은 아버지가 우리들을 깨워서 2층 옥상에 올라가 아침 체조를 하는데 신기하기도 했지만 당시에는 무척 추워서 솔직히 게으른 내가 받아들이기에는 매우 힘들었다. 그런데 작은집 3형제들은 익숙한 아침 행사로 가볍게 수행을 하는 것을 보고 대단하다고 느꼈다. 지금도 3형제는 덕분인지 다들 건강한 삶을 유지하고 있으니 작은아버지의 아침체조 행사는 이 분들에게 건강한 삶의 기초를 세워준 은혜이기도 한 것이다.
작은 어머니는 내 어릴 적 이상적인 어머니의 모습으로 문학적인 소양과 차분한 성격이 기억에 남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작은 아버지에게 순종하는 여인상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내가 속으로 나중에 결혼을 하면 엄마의 여장부 스타일과 작은 어머니의 순종의 이미지가 섞여 있는 아가씨를 만나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음을 고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