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일기 : 탄생과 성장 13

by 제이킴

父의 추억 #3 : 이발소


아버지 고향 후배가 하는 이발소에 간다고 집에서 가까운 곳을 놔두고 한동안 그곳으로 이발을 하러 다녔다.

샌님 스타일의 단정한 용모가 아직도 기억나는 아저씨는 내가 가면 귀엽다고 갈 때마다 빵이나 아이스크림을 사 주셨는데 하루는 ‘해뜰날’로 해성같이 나타나 가요계를 평정했던 가수가 있었다.

그런데 아저씨가 장난인지 사실인지 그 가수가 이발을 배운다고 아저씨 이발소에서 기술을 배운 적이 있다고 하길래 아저씨의 이발 기술이 정말 대단하다고 느낀 적이 있었다. 가수왕이 배우려 했다면 그 경지는 최고위가 아니겠는가?

내가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동네 이발소로 변경을 했는지 아니면 이발소가 다른 곳으로 이전을 했는지는 기억이 불분명한데 한 번은 아저씨는 내가 원하지도 않았던 고대기로 드라이를 해 주셨다.

이발하고 주산학원에 가려는 계획이었는데 아저씨는 선의로 머리 손질이라는 선물을 해주셨으나 결혼식 신랑 머리같이 너무나 단정히 정리된 머리를 하고 학원에 갔더니 선생님과 아이들의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의 입장을 쳐다보았던 아니 나의 머리 스타일에 대한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면서 굉장히 난처했고 쑥스러워했던 기억이 난다.

나의 5학년 시절의 이야기인데 내가 6학년 때부터 쾌활한 성격으로 변했으니 당시 학원에서 얼마나 수줍어했었는지 기억에 또렷하다.



母의 추억 #3 : 해뜰날


검색을 해보니 가수와 우리 어머니가 성씨가 같고 고향도 같은 지역인 것을 보면 이 곳 출신들이 노래를 잘하는 지형적 또는 후천적 영향을 받고 자랐을 것으로 강하게 추정을 해 본다.

어머니한테 가수와 같은 성씨에 본도 같고 살았던 곳도 비슷하다고 전화로 물어보았더니 어머니의 초등학교 같은 반에 가수의 작은 이모가 있었다고 기억을 해 내셨다.

그리고 당시 어머니 고향은 집성촌으로 일대에 같은 성씨들이 함께 모여 살았다고 한다.

가수의 조부가 독립유공자로 되어 있는 것을 보면 동학운동의 주역 전봉준 장군의 기운이 지역 후손들에게 전해지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독립운동가 송영근은 1919년 3월 16일 정읍군 태인면 장날을 이용하여 여러 동지들과 함께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결의하였고 태극기와 기미독립선언서를 준비하여 장터에 모인 장꾼들에게 나누어 주고 이들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운동을 벌이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당시 일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6개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른 분으로 확인된다.

199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 표창이 추서 되었다.

내가 어머니한테 추억 일기의 좋은 소재를 주셨다고 고마워하자 웃으시면서 전화를 끊으셨다.

이렇게 추억 일기를 통하여 새록새록 오래된 기억을 소환하는 재미가 있더라.

그러면 부모님도 함께 즐거운 작업에 동참하는 셈이니 부디 더불어 즐겁기를 소망합니다.

아울러 어머니와 가수의 좋은 기억이 오랫동안 이어지기를 기원합니다.


여담으로 학생 시절 팝송 중 ‘Centerfold’라는 노래가 히트를 했었는데 ‘해뜰날’의 경쾌한 리듬과 유사한 부분이 많아서 당시 이 팝송이 한국 노래를 표절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이 있었다.

실제로 두 노래를 들어보면 약 50% 정도는 흥겨움과 기본 리듬이 많이 흡사한데 들리는 소문에 The J. Geils Band의 멤버 중 한 명이 주한미군에서 근무한 적이 있으며 그 시절 해뜰날의 히트에 영감을 받아서 몇 소절 일부를 빌려 썼다는 이야기가 테레비 프로그램 ‘서프라이즈’ 에서도 소개된 적이 있었다는 것을 보면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는 아닌 모양이다.

믿거나 말거나 말이다.



주산학원


초교시절 ‘묘기 대행진’에 출연하여 계산기보다 더 빠르고 정확하게 신묘한 암산을 시범 보이던 여고생이 있었다. 암산도 대단했지만 주판을 놀리던 손길도 정말 민첩했다.

그 시절 묘기 대행진의 영향으로 주산학원의 학생들이 대폭 증가되는 현상이 전국적으로 있었다고 추정된다. 나도 그 가운데 한 명이었던 것 같은데 사실 나는 산수와 같은 셈법에 그리 밝지를 못했다.

불친 중 한 명은 4학년 때 시작한 주산을 6학년 때까지 꾸준히 다니면서 연마하여 공인 3단을 따냈던 대단한 친구가 있다. 나름 암산에도 내공을 쌓아서 당시 학교 선생님들의 시험 채점 및 통계 지원으로 인기를 한 몸에 받았던 이 친구는 지금도 은행에 다니면서 성실하게 생활을 하고 있다.

같이 지내온 세월이 40년을 넘어섰으니 앞으로 40년도 함께 가기로 서로가 다짐을 했다.


당시 고향에는 전설적인 주산학원이 있었다. 전매청 건너편 2층 건물로 목재 계단이 가파라서 기억이 더 또렸하게 난다. 나중에 학생들이 늘어나서 부설 학원을 추가하는 등 대단한 호황을 누리던 그 선생님의 근황이 갑자기 궁금해진다.

학원별 선생님 한 분과 학생들이 방과 후 오후 반으로 몰리는데 한 학원에서 최소 3-4개 시간대의 수업을 진행하던 시절이다. 가끔은 학생들이 빼곡하게 들어서 수업 진행이 불가할 경우도 생기는데 이럴 때는 일부 학생들을 다른 학원으로 분산시키거나 다른 시간대의 수업으로 조정을 할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별명은 넙죽이 선생님.

지금 생각해봐도 당시 ‘주산 배우기’ 열풍은 후끈했었다.

그 선생님에게 주판은 인생의 어떤 느낌으로 남아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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