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던 아파트 위아래 심지어 옆 집에서도 베란다에 폭죽을 걸어 놓고 약 1-2시간 동안 폭죽을 터트리는데 그 소란함은 상상 이상이었고 늦은 시간까지 이어지자 인내심에 바닥이 났지만 참을 수밖에.
그렇다고 새해맞이 명절행사로 하는 미풍양속을 외국인이 가서 참견한 들 곱게 생각을 하겠는가 말이다.
그저 춘절 폭죽행사가 빨리 지나가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연길에서도 아파트는 공동 주택이니 층간 소음도 문제가 되는데 살면서 직접적인 소음으로 어려움을 겪어보지는 않았지만 폭죽 같은 인조 장치로 인하여 새벽까지 이어지는 전통 풍습은 인내하기 어려운 고통이었다.
어릴 적 가지고 놀던 폭약과 성냥이 기억난다.
빨간 종이에 올록볼록 올라온 둥근 부위를 돌로 내려치면 꽤 큰 소리와 함께 화약연기가 피어오른다. 할 일없는 어린이들이 가지고 다니다가 거리에 앉아 돌로 화약 종이를 때리던 심심풀이였는데 물론 그 가운데 나도 종종 끼어 있는 경우가 있었다.
또는 통성냥에서 성냥을 몇 개 추린 후 통성냥에 붙어있는 마찰 종이에 물을 묻혀서 성냥머리에 잘 덮어 씌워서 말리면 딱성냥이 만들어지는데 나도 몇 개를 만들어성냥갑에 넣고 다니다가 성냥 머리끼리 부딪쳐서 자연발화가 되는 현상을 목격했는데 참으로위험천만이었다.
만약 바지나 옷에 넣고 다니다가 발화가 되었거나 집에서 자칫 잘못으로 불이 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기록을 찾아보니 1886년 인천에 처음으로 성냥 공장이 들어섰다고 하는데 그럼 군대에서 불렀던 <인천의 성냥공장 아가씨>라는 노래는 그 시절에 만들어진 것인가?
여담)
. 중국은 춘절이 되면 산에서 한 마리의 괴물이 내려와 이 괴물을 만난 사람은 고열을 내면서 고통받고 죽었다는 전설이 있는데 괴물의 약점은 대나무를 모닥불에 지피고 큰소리를 싫어하는 것이다. 중국에는 섣달 그믐날에 가족이 모여 식사를 하는 풍습이 있는데 식사 전에 액막이와 새해 아침 행운을 기원하기 위해 폭죽을 터트린다. 화약이 발명된 당나라 시대(618년~907년) 때부터 대나무에 화약을 채운 현재의 폭죽 스타일이 되었다고 한다.
난방
연길은 추운 지역이다 보니 겨울철 난방이 기가 막히게 잘 되어 있다.
실내 온도가 평균 25도 이상으로 지역난방이지만 동계난방비를 미리 납부하면 아낌없이 난방을 가동하기 때문에 오히려 가을보다 실내 온도가 더 높아서 반팔로 지내는 경우가 많다.
아마도 추운 옛날 겨울에 동사로 얼어 죽는 사람이나 석탄으로 난방을 하던 시절에 가스 사고도 많았을 것이다.
우리나라도 70, 80년대 연탄가스로 생명을 잃는 경우는 그리 드문 일이 아니었다.
예로부터 백성 통치의 최고의 덕목은 <배는 부르고 등은 따습다>가 아니던가?
거기에 좋은 정치라 함은 정의롭고 국민들에게 공정한 기회를 제공하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쯤 되면 지도자들이 앞으로 지켜야 할 주요 항목은 다 들어 있는 셈이다.
그리하여 연길은 실내 난방의 천국이었고 밖에 나가면 영하 20도 수준으로 내려가지만 따뜻한 실내가 있으니 살만 한 곳이다.
심지어 자다가 더워서 창문을 열어 놓고 자는 경우도 있었다.
밖은 영하 20도 실내는 영상 25도면 안 밖의 온도차가 45-50도가 날 수 있으니 겨울철에 중국 동북이나 몽고에 가는 사람들은 참고하시라.
모택동 毛澤東(1893.12.26-1976.9.9) #2
1919년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전달을 받고 고향으로 돌아온 마오는 장사長沙소학교와 중학교에서 역사 교사로 12월까지 재직하면서 <상강 평론>을 주간지로 4회 발행하다가 지역 군벌에 의해 폐간된다.
그는 창간 선언문에서 <바야흐로 인류 해방을 위한 운동이 시작됐으며 모든 낡은 편견에 의문을 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창간호에 모두 26편의 글을 썼고 2,000부를 인쇄해 거리에서 직접 팔았다.
1919년10월 어머니가 사망하자 장례식을 치른 후 12월 다시 양창제楊昌濟 교수를 만나기 위해 베이징으로 갔으나 그도 1020년1월 숨을 거두고 얼마 되지 않아서 아버지가 고향에서 사망했는데불과 몇 달 사이에 부모님과 스승을 잃은 마오는 이대교李大釗와 운명적으로 친해지기 시작한다.
당시 이대교는 <공산당 선언>을 번역하고 있었고 마침내 1920년11월 중국 공산당은 창당이 된다.
마오의 부인들)
마오는 아버지 친구의 딸이었던 나일수羅一秀와 결혼을 했지만 한 3년 후 부인이 사망했으며 두 번째 부인은 양개혜楊開慧로 창사 사범학교에서 만나 베이징대에 오기까지 스승으로 모셨던 양창제의 딸이며 이 둘 사이에 태어난 세 명의 아들인 안영岸英, 안청岸靑, 안룡岸龍인데 막내 안룡은 어릴 적 죽었고 그녀도 1930년 홍군의 공격 당시 모택동과 사이가 좋지 않은 사람의 밀고로 29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세 번째가 하자진賀子珍으로 중국 인민해방군의 모태가 되었던 정강산에서 처음 마오를 만났는데 대단한 명사수였다고 한다. 마오가 1927년 가을 추수 봉기를 일으켰는데 부족한 군사력으로 실패한 후 비적들과 잘 지낼 수밖에 없었고 그녀는 비적 우두머리의 사촌동생이자 비적들의 여장군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네 번째는 강청江靑으로 마오 사후 4인방으로 유명세를 떨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