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의 산실이었던 간도지역이 바로 연길을 중심으로 펼쳐진 길림성 동남부 지역으로 연변자치주도 결국은 간도의 일부분이다.
간도는 오래전 읍루와 옥저의 땅이었다가 고구려에 흡수되었다가 발행의 영토가 되었다.
고려시대부터 조선 전기까지 여진족이 각지에 흩어져 살았고 조선에 조공을 바쳐 왔으며 그들이 생활 물자를 교역할 수 있도록 북관개시北關開市를 열어 주기도 했었다.
여진족은 농경보다는 유목, 수렵에 종사하였고 간도를 농경지로 개척한 사람들이 우리나라 사람들이었는데 간도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주하기 시작한 것은 철종 말 이후로 학정과 수탈에 지친 농민들이 두만강 너머로 이주했다고 한다.
자치주에 속한 연변은 북간도北間島로 알려진 곳이다. 간도라는 지명의 유래를 찾아보니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에서 이주 금지지역으로 정하고 원래 두만강 대안인 북간도는 청淸나라 태조太祖가 일으킨 곳이라 하여 신성시하고 사람들의 입주를 금한 곳이다. 이것을 봉금령封禁令이라 하는데 청국인과 조선인 모두 입주를 불허하는 일종의 비무장지대로 만들었고 청나라와 조선 사이에 놓인 섬과 같은 땅이라는 데서 유래되었다.
봉금령이 해제된 것은 1870년경 러시아군이 동부로부터 사람이 거주하지 않는 땅으로 침입하여 들어오면서였다. 이러한 러시아의 서침을 방지하기 위하여 관내에서 중국인의 이주와 두만강 대안에 있던 조선족의 유입을 장려한 것이다. 봉금령이 해제될 무렵, 1869년 한국에는 ‘기사기아己巳飢餓’가 일어나 한인들이 대거 연변지역으로 이주하여 농토를 개간하고 정주하였다. 이때부터 이 지역을 북간도라 하였다. 간도란 강에 둘러싸여 있다는 의미에서 부르는 이름으로 두만강 대안對岸을 북간도, 압록강 대안을 서간도라 하기도 한다.
일제가 토지조사사업을 강행하면서 농토를 착취당한 농민들이 간도로 이주하였고 1926년 자료를 보면 간도 지역에 중국인 호수가 9천여, 조선인 호수가 5만천여 호였다.
이처럼 조선 백성들의 한을 품은 항일 터전은 일제 탄압에도 불구하고 대표적인 독립운동 전진기지로 활약하다가 1931년 만주사변을 계기로 주춤거렸고 1945년에는 중공군들에게 점령을 당했고 1952년 연변조선민족자치구가 성립되면서 연길, 훈춘, 화룡, 왕청, 안도, 돈화 등으로 지역을 형성하였다. 그 중심에 연변자치구가 있고 수도인 연길이 있다.
지금 한국에서 활동하는 중국동포들 중에는 적지 않은 숫자가 그 옛날의 개척과 항일의 정신이 있다고 생각하면 그리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최근 중국의 동북공정과 산아제한, 그리고 한국 내 취업활동 등으로 연변자치주 조선인학교가 점점 줄고 있다고 한다.
안타까운 현실이나 부디 일송정 푸른 솔을 바라보며 해란강에서 말을 달리던 선구자先驅者의 후손들임을 잊지 마시라.
나는 지금도 선구자를 듣거나 부를 때면 괜스레 신산하고 장엄했던 그 시절 독립투사들의 비장함이 느껴지곤 한다.
윤혜영 작사, 조두남 작곡인 선구자는 한국인들이 매우 선호하는 가곡이다.
1960년대에 이 노래가 각광을 받자 조두남은 회고하기를 자신이 20세 무렵이던 1933년경 북간도 용정의 여관에 머물고 있을 적에 어떤 동포 청년이 은밀히 찾아와 자신은 독립운동하는 밀사라 하면서 시 한 편을 건네 왔다고 한다. 한참 뒤에 조두남이 곡을 붙였고 그 뒤 그 청년은 독립운동 전선에서 희생됐는지 소식이 끊겼다는 것이다. 곡조가 워낙 장중하고 조국을 위해 한 몸을 던진 독립투사와의 만남을 묘사하기도 하여 국민의 사랑을 받았고 특히 1970년~1980년대 학생운동과 민주화 운동 시기 때 자주 애창되었다.
북방지역의 명칭을 만주어로 음차 하였는데 해란강의 해란海蘭은 여진어로 느릅나무이다.
이름과 마찬가지로 해란강이 흐르는 용정에 가면 느릅나무가 많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연변인민출판사판 『당대중국조선족연구』에 따르면 이런 설화가 쓰여 있다.
“강변에 '해'와 '란'이라는 조선인 오누이가 살았는데 두만강 건너 외가에서 볍씨를 가져와 어른들에게 심게 했다. 그 뒤 강변은 논으로 개척되었다. 어느 해 가뭄이 들자 오누이가 산기슭을 헤쳐 샘물을 찾아내고 물길을 내니 그것이 강이 되었고 그래서 해란강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1919년 5·4 운동 발발 후 후난 학생연합회를 설립하고 샹장평론湘江評論을 펴냈으나 곧 금지를 당하자 베이징으로 도망쳐 러시아 혁명에 관한 책을 많이 읽었다. 1920년 상하이에서 천두슈陳獨秀를 만났으며 다시 창사로 돌아와 1924년까지 창사 제1사범학교의 부속 소학교 교장 겸 사범부의 어문語文 교사가 되었다.
1920년 11월 중국 공산당이 창당되고 1921년 7월 23일 상하이에서 중국 공산당 제1차 당대회가 열렸다. 상하이의 중국 공산당 창립대회에 참가하였으며, 후난성 대표로서 중국 공산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에 출석하였다. 이 대회에서 마오는 후난에서 당을 건설하라는 지침을 받고 1921년 8월 창사로 돌아왔다. 이후 마오의 활동 범위는 급속하게 넓어졌고 당 조직 사업에 박차를 가했다. 또 마오는 정신적 아버지였던 양창지 교수의 딸 양카이후이와 동거를 시작했다. 그리고 1922년 10월 장남 마오안잉毛岸英이 태어났고 1923년 11월에는 둘째 아들 안칭岸靑도 태어났다.
1924년 국공합작國共合作이 되자 공산당 중앙위원, 국민당 제1기 후보, 중앙집행위원, 선전부장 대리, 중앙농민운동 강습소장, 정치주보 사장 등을 겸임하였다. 1926년 장제스蔣介石의 숙청으로 상하이에 갔다가 1927년 우한武漢으로 가서 중국 공산당 중앙 농민부장이 되었고 국공분열國共分裂 뒤 농홍군農紅軍 3,000명을 조직하여 징강산井岡山에 들어가 근거지로 삼고 주더朱德의 군대와 합류하였다. 이듬해 공농홍군工農紅軍 정치위원이 되었고 1930년 홍군 제1방면군 군사위원, 중국 공농혁명위원회 주석에 올랐다.
作为独立运动摇篮的间岛地区,正是以延吉为中心展开的吉林省东南部地区,延边自治州最终也是间岛的一部分。
间岛很久以前是挹娄和沃沮的土地,后被高句丽吸收,又成为渤海的领土。
从高丽时代到朝鲜前期,女真族散居各地生活,向朝鲜进贡,朝鲜还开设北关开市让他们可以交易生活物资。
女真族从事游牧、狩猎而非农耕,将间岛开垦为农耕地的是我国人民,我国人民开始移居间岛是在哲宗末年之后,据说是因苛政和掠夺而疲惫的农民移居到了图们江对岸。
属于自治州的延边是被称为北间岛的地方。查找间岛这个地名的由来,丙子胡乱之后清朝将其定为禁止移居地区,原本图们江对岸的北间岛被视为圣地,因为是清朝太祖起家之地,禁止人们入住。这被称为封禁令,将清国人和朝鲜人都不允许入住的一种非武装地带,因其是位于清朝和朝鲜之间如同岛屿般的土地而得名。
封禁令解除是在1870年左右,俄罗斯军队从东部侵入无人居住的土地。为了防止俄罗斯的西侵,鼓励关内中国人移居和图们江对岸朝鲜族的流入。封禁令解除前后,1869年韩国发生了"己巳饥饿",韩人大举移居延边地区开垦农田定居。从那时起这个地区被称为北间岛。间岛这个名字源于被江河环绕的意思,图们江对岸称为北间岛,鸭绿江对岸也称为西间岛。
日帝强行土地调查事业,被剥夺农田的农民移居间岛,1926年的资料显示,间岛地区中国人户数为9千余户,朝鲜人户数为5万1千余户。
如此这般承载着朝鲜百姓怨恨的抗日根据地,尽管受到日帝镇压,仍作为代表性的独立运动前进基地发挥作用,1931年以九一八事变为契机有所停滞,1945年被中共军队占领,1952年延边朝鲜民族自治区成立,形成了延吉、珲春、和龙、汪清、安图、敦化等地区。其中心有延边自治区,首府是延吉。
现在在韩国活动的中国同胞中,如果认为有相当数量的人具有当年开拓和抗日的精神,这话也不算错。
最近由于中国的东北工程和计划生育政策,以及在韩国的就业活动等,据说延边自治州的朝鲜人学校正在逐渐减少。
虽然是令人惋惜的现实,但请务必不要忘记,你们是仰望一松亭青松、在海兰江纵马奔驰的先驱者的后代。
我现在每当听到或唱起《先驱者》时,总会无端感受到那个时代独立斗士们悲壮而庄严的气概。
尹海英作词、赵斗南作曲的《先驱者》是韩国人非常喜爱的艺术歌曲。
1960年代这首歌受到瞩目时,赵斗南回忆说,在自己20岁左右的1933年前后,住在北间岛龙井的旅馆时,有位同胞青年秘密来访,自称是从事独立运动的密使,递给他一首诗。很久以后赵斗南为其谱曲,之后那位青年是在独立运动战线上牺牲了还是怎样,音讯全无。曲调格外庄重,也描述了与为祖国献身的独立斗士的相遇,因而受到国民的喜爱,特别是在1970年至1980年代学生运动和民主化运动时期经常被传唱。
北方地区的名称用满语音译,海兰江的"海兰"在女真语中是榆树的意思。
正如其名,去海兰江流经的龙井,可以看到有很多榆树。
据延边人民出版社版《当代中国朝鲜族研究》记载了这样的传说:
"江边住着名叫'海'和'兰'的朝鲜族兄妹,他们从图们江对岸外婆家带来稻种让大人们种植。此后江边被开垦成稻田。某年遭遇干旱,兄妹俩在山麓寻找泉水并引水成渠,那就成了江,所以被称为海兰江。"
1919年五四运动爆发后,成立了湖南学生联合会,创办了《湘江评论》,但很快被禁,于是逃到北京阅读了大量关于俄国革命的书籍。1920年在上海见到了陈独秀,再次回到长沙,直到1924年担任长沙第一师范学校附属小学校长兼师范部语文教师。
1920年11月中国共产党创建,1921年7月23日在上海召开了中国共产党第一次代表大会。他参加了上海的中国共产党创立大会,作为湖南省代表出席了中国共产党第一次全国代表大会。在这次大会上,毛泽东接到在湖南建党的指示,于1921年8月回到长沙。此后毛泽东的活动范围迅速扩大,加快了党组织工作。此外,毛泽东开始与精神导师杨昌济教授的女儿杨开慧同居。1922年10月长子毛岸英出生,1923年11月次子岸青也出生了。
1924年国共合作后,兼任共产党中央委员、国民党第一届候补中央执行委员、宣传部代部长、中央农民运动讲习所所长、《政治周报》社长等职务。1926年因蒋介石的清洗去了上海,1927年去武汉担任中国共产党中央农民部长,国共分裂后组织了3000名农民红军进入井冈山作为根据地,与朱德的军队会合。次年成为工农红军政治委员,1930年升任红军第一方面军军事委员、中国工农革命委员会主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