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일기 : 탄생과 성장 2

by 제이킴

사촌들


작은 집 형들은 5월에, 나는 11월에 태어났는데 반년이 빠르다고 평생을 형이라고 불러야 한다.

안 그러면 사촌 간에 질서가 잡히지 않는다.

아버지 형제가 10남매, 어머니 형제가 5남매였고 당시 출산아동 평균이 5명 이상 시절이었기에 15명이 최소 3명만 낳아도 45명이었다. 실제로 우리 친척들도 3-4명은 가뿐하게 낳아 기르던 시절이었다.

아버지 형제들이 많아서 동갑인데 생일이 빠르다고 형이라고 불러야 할 사촌 형들이 작은 집에 2명, 고모 집에 1명이 있었고 한 살 위, 한 살 아래도 촘촘하게 포진되어 있었다. 아버지가 막내 쪽 이어서 위 쪽 형님들과 누나들의 자손들도 번창하여 나보다 나이가 많거나 또래들의 조카들이 많았다.

수많은 사촌 형들과 누나들 그리고 동년배 조카들이 즐비하다 보니 자주 보지 못하는 친척들은 부족한 기억력으로 이름과 얼굴이 혼동되었고 명절만 되면 자손이 많음에 다소 불편함을 느끼곤 했다.

출가한 고모들의 가족들과는 접촉이 상대적으로 적어서 어쩌다가 만나면 형제 순서와 자손들의 서열 그리고 이름의 암기가 또다시 뒤죽박죽이 되어버렸다.

사촌들이 많다 보니 아버지가 학생 시절에 가족대항 배구대회를 나가서 준우승을 했다고 한다.

그때는 9인제 배구였으나 자체 수급이 가능했고 아버지가 배구, 작은 아버지는 핸드볼, 사촌 형님이 농구 등 운동을 하던 재능들이 있었으니 오히려 우승을 하지 못한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할머니와 강아지


어머니가 장녀였고 첫 손주였던 나는 외가에서 최초 외손자의 특권을 누리며 귀염둥이로 성장했다. 특히 7살 정도밖에 차이가 안나는 형 같은 막내 외삼촌이 있었고 나를 동생처럼 귀여워했다. 내가 외가에 놀러 가면 외할머니는 나와 함께 시장을 보러 갔는데 나는 시장의 다양한 볼거리를 즐겼고 할머니는 할머니 대로 즐거움이 있었는데 바로 젊은 할머니가 누릴 수 있는 호사였다.

“아따. 이게 아들여 손주여?”

“오메. 그럼 손주지 아들이것는가?”

“이렇게 큰 손주가 있었소? 아줌씨는 도대체 나이가 얼마요? 아직도 젊은데 이렇게 큰 손주가 다 있으셨소?”

사실 내가 국민학교 시절부터 제일 키가 크지는 않았지만 큰 축에 속했고 할머니는 40십대 중반에 내가 태어나면서 빠르게 할머니 반열에 올랐으니 손주가 아들로 보이는 것도 그리 무리는 아니었다. 그래서 내가 외가에 놀러 가면 나를 데리고 시장에 가는 것을 소소한 즐거움으로 여기셨다.

나는 할머니의 즐거움에 일조를 했고 시장을 따라다니며 어린 눈으로 이것저것 호기심을 채웠다.

당시 할머니는 나를 강아지라고 불렀다.

시장을 졸졸 따라다니던 ‘강아지’가 내 별명이었고 그러한 별명을 듣는 나는 기분이 좋았다.

지금도 할머니가 나를 보며 미소 띤 얼굴로 부르시던 내 별명이 듣고 싶다.

“내 강아지 왔는가?



우수한 자손들

어릴 때부터 명절이나 집안 모임이 있다 보면 자연스럽게 자녀들 성적이나 상장을 받은 것이 자랑거리가 되었는데 워낙 공부나 다양한 재능이 있었던 친척들이 많아서 문제였다.

나는 국민학교 3학년을 정점으로 성적이 조금씩 하락했다.

성적 하락의 이유를 적당하게 골라서 변명을 하고 싶지만 학생이 무슨 이유가 있겠는가?

노력 부족.

국민학교 동창들을 지금도 만나지만 1-3학년을 같이한 친구들을 나를 우등생으로 기억하고 4-6년 친구들은 나를 대충 상위권이지만 그리 특출하지 않은 학생으로 기억한다.

사실이 그랬다.

예전의 영광을 멀리하며 점점 집중력이 떨어지고 끈기가 부족한 학습태도가 문제였다.

특히나 여동생은 성적과 피아노에서 뛰어난 실력을 유지하여 명절에 친척들이 모이면 여동생은 우리 집 자랑거리 대표선수가 되었고 나는 후보선수 수준이었다.

잘 되면 내 탓이고 잘 안되면 조상 탓이라는 말이 있지만 자손들이 전반적으로 오롯하게 잘 성장할 수 있었던 기반은 할아버지와 작은할아버지의 노력이라고 아버지는 강조하셨다.

할아버지가 세워 놓은 교육에 대한 전통과 가풍은 실제로 넓고 바람직하게 작용했다.



냉동차 수송작전


명절이 되면 최소 아이들만 15명 이상이 모이게 되고 설날 세배를 가거나 추석에 성묘를 다니면 최대 30명이 단체 행동에 들어간다. 아이들이 많아서 이동수단의 문제를 이렇게 해결한 적이 있었다.

아이스크림 대리점 운반용 냉동차가 있었는데 안에 기다란 의자들을 장착하고 우리들이 들어가서 약 1시간 남짓 되는 거리를 최소한의 통풍구만 확보한 채 이동한 적이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안전 등 여러 문제가 되겠지만 당시의 내 정서로는 신기하고 재밌는 경험이었다.

출입구 문을 제한적으로 열어 놓았기 때문에 차 안은 자연광 20% 수준의 동굴 같은 분위기가 만들어져 암굴 환경에 대한 적응이 힘든 아이는 토하기도 했다. 경사진 도로를 가다 보면 문이 열리는 간격도 달리 움직였고 도로의 회전 상황에 따라 차 안의 조명은 달리 변했으며 차량의 속도감은 놀이동산 같은 분위기를 만들었다.

가냘픈 조명과 회전에 따른 쏠림으로 차 안은 어떤 아이에게는 놀이터가 되었고 어떤 아이에게는 고통의 공간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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