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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틱, 틱... 붐!』감상 이후

by WHYLL

좋아하는 영화이자 뮤지컬, 『틱, 틱... 붐!』에 관하여 쓸 일이 있었다.

이신혁 감독이 커버한 '30/90'과 '롱 테이크'에서도 영감을 받았다.

지난한 과정이 무엇인지 작게나마 밝혀 보는 글을 언제든 꺼내볼 수 있도록 여기에 남겨야겠다.

장문 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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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가 떠돌고야 말 정보의 바다는 결코 투명하지 않다. 우리가 접할 수 있는 정보는 어떤 이유에서든 편향된 것인데, 특히 결과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결과는 과정에 비해 관측이 쉽다. 그건 결과가 퍼 나르고 싶은 속성을 지녔기 때문일까. 세상사를 수집하여 언론과 방송사가 전달하던 시대를 지나 이제는 사연자 스스로 자신의 서사를 소개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어쩌면 타인의 과정이란 결코 알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떤 이의 처절한 수험 일지를 매일 읽는다고 해도 이미 그것은 지나가 버린 하루에 가깝기 때문이다. 따라서 감히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이미 결정되어 버린 결과라고도 하겠다. 그리고 그렇게 수집된 결과는 정보가 되어 우리 삶에 스며든다. 이는 타당할까?


2

『틱, 틱... 붐!』은 동명의 뮤지컬을 원작으로 하는 뮤지컬 영화로, 뮤지컬 작가 ‘조너선 라슨’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그는 브로드웨이의 낡은 아파트에 살며 8년째 ‘수퍼비아’라는 작품을 쓰고 있다. 물론 데뷔하지 못했고 가난하여 식당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는 분명 성공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 과정은 지난하다. 무용수였던 여자친구 ‘수잔’은 현실적인 삶을 꾸리기 위해 이직과 이사를 권유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조너선과 끝내 헤어진다. 둘도 없는 친구이자 배우였지만 지금은 훌륭한 사회의 부품이 된 ‘마이클’의 삶은 조너선이 곁눈질하게 만든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작품이 쉽게 쓰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어떤 작품이 술술 써지겠냐마는 투자를 받기 위한 작품 공개 하루 전까지 여주인공의 테마곡을 쓰지 못하고 있는 조너선은 다소 한심해 보이기도 한다. 『틱, 틱... 붐!』은 이러한 조너선의 창작, 관계, 현실과 미래의 중심과 주변을 숨김 없이 보여준다.


이토록 투명해 보이는 영화에서도 조너선에 관해 드러나지 않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그가 작품을 쓰기 어려워하는 이유이다. 우선 그가 재능이 없기 때문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미 브로드웨이의 거장 ‘손드하임’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은 적이 있고, 주변 인물 또한 그의 재능이나 실력을 인정한다. 또한 그가 노력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너무 몰입해서 문제라면 문제일까. 수잔과 포옹하는 단 몇 초 동안에도, 식당에서 주문하는 손님 앞에서도 곡을 생각하는 조너선이다. 작품 공개 하루 전 단전 단수가 되기 전까지는 돈도 문제가 아니었고, 30살 청춘답게 건강했으며, 정신이 피폐한 예술가도 아니었다.


하나 유추해 볼 수 있는 이유는 그가 과정 위에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손실 없는 과정이란 원체 고단한 것이다. 예술가 조너선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누구의, 어떤 도전이든 마찬가지다. 틱, 틱, 소리를 내며 흘러가는 시간 위에서 과정을 밟는 것은 확실하게도 알게 모르게 진행된다. 당장은 어디까지 왔는지 알 수 없고, 결국에 성공을 이루게 될지는 더욱 막연하다. 하지만 무엇인가 진행되고 있다고 믿고, 그래서 한다. 때론 애써 기록과 평가받기를 자처하여 과정을 관측하려 시도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또한 도달하고자 하는 최종 목표가 아니기에 무지와 무기력을 어떻게든 다뤄 보려는 인간이 조금 서글퍼진다. 하지만 우리는 조금 시선을 비틀어 볼 필요가 있다. 조너선을 포함한 타인과 자신의 과정이 드러나지 않는다고만 말할 것이 아니라 알게 모르게 진행된다고 인식해야 한다.


영화에서 조너선은 ‘수퍼비아’를 완성한다. 하지만 영화 내내 그 작품이 창작되는 과정은 하나도 보여주지 않는다. 뮤지컬 작가를 주인공으로 내세웠다면 우연한 사건으로부터 영감을 받거나, 조력자가 등장하거나, 스스로 한계를 극복하고 각성하여 천재적으로 작품을 완성할 것이라 기대할 만하다. 하지만 이 영화가 오히려 보여주는 장면은 창작 외의 그의 일상이고 고뇌이다. 이는 예술가의 삶을 현실적으로 조명하기 위한 목적도 있겠지만, 흥미로운 효과를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조너선이 영화 장면 사이나 뒤편에서 작품을 썼으리라고 믿게 된다. 그리고 이 믿음은 인간이 과정을 인식하는 독특한 태도가 된다.


전문직 시험을 준비하다가 이제는 취업을 준비하는 친구에게 물었다. 어떤 마음으로 해당 진로에 진입하고, 공부하고, 또 다른 선택을 했는지 말이다. 그 친구는 명료하게 답했다. 누구나 성공할 것이라고 믿고 시작하고 버티는 것이라고. 그리고 진실로 하고자 하는 사람은 계속 시도하고, 아니다 싶은 사람은 다른 길을 찾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같은 시험을 준비하던 다른 친구도 구구절절 동의한다고 했다. 나도 마찬가지다. 마음은 지난한 과정도 버티게 하는 한편, 쉬운 과정에서 벗어나게 할 수도 있다. 절대로 알 수 없는 미래를 두고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세련된 숫자나 훌륭한 예측이 아니라 결국 그렇게 될 것이라는 진부하고 인간적인 믿음인 셈이다.


3

인간은 때때로 남과 비교하며 자신을 이해한다. 그때 타인의 삶은 결과로 내 삶은 과정으로밖에 경험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는 애초에 정정당당한 대립이 아니다. 하지만 타인이 존재하는 한, 어쩌면 그가 역사 속 숨진 인물이라 해도, 우리는 일정 수준 이상 타인의 삶과 관계 지어 스스로를 이해할 때가 있다. 롤모델, 라이벌, 적, 동기, 스승과 제자 등 몇몇 관계에서는 이러한 대립과 연관이 더 선명하게 보인다. 그리고 『틱, 틱... 붐!』에서는 조너선과 마이클의 삶이 그러하다.


마이클의 삶은 성공적인 타협이었다. 조너선과 달리 자신을 그저 그런 배우였다고 자평하는 마이클은 뮤지컬 판을 떠나 마케팅 회사에 취직한다. 그 지위가 자세히 언급되지는 않지만, 회사의 프로젝트에 조너선을 참여시킬 만한 위치에 올랐으며, 그 비싼 뉴욕에서 발렛파킹을 해주는 아파트 로얄층에 입주하게 되었으니 단기간에 가파른 성공을 이룬 것이라 유추할 수 있다. 조너선과 마이클은 여전히 평등한 관계로 서로를 존중하지만, 조너선은 마이클을 종종 부러워했다. 이것이 열등감이 되었는지 그는 마이클이 주선해 준 프로젝트에서 회사의 가식을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와 불평하고, 투자 유치에 실패한 자신을 위로하는 마이클을 쏘아붙인다. 자신은 시간을 허비하였고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하지만 정작 시간이 없는 쪽은 HIV 양성 판정을 받은 마이클이었다. 그에겐 정말 시간이 없었기에 조너선은 뉘우치고 삶이란 무엇인지 고민한다. 조너선이 그저 부러워하던 마이클의 삶은 결코 조너선이 경험할 수 없는 것이었고, 언제나 그랬다. 물론 조너선도 자신의 삶을 비관하고 마이클처럼 살고 싶었던 건 아니다. 단지 마이클이 누리는 풍족한 삶과 깔끔한 모습이 자신의 삶보다 마냥 좋아 보였을 뿐이다. 말 그대로 보이는 결과는 마이클의 삶 자체와 다른 차원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인데 말이다.


위의 서사에서 시간의 유한함, 예측 불가능한 불운 등의 주제를 추출할 수도 있겠지만 조너선과 마이클의 관계에 주목하면 인간의 폐쇄성과 유일함을 떠올리게 된다. 나는 그로 살 수 없으며, 그 또한 나로 살 수 없다. 우리가 지니고 살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영혼이 담긴 이번 생의 신체 그리고 정신뿐이다. 아주 당연하고도 합리적인 이 사실을 우리는 종종 잊는 듯하다. 따라서 비교가 유해하다는 주장은 단순히 정신건강이나 인간관계 측면에서 검토되는 데에 그치면 안 된다. 그보다는 우리 존재를 지켜야 하는 모든 상황에서 지니고 살아야 할 생각에 가깝다. 우리가 절대적으로 폐쇄된 상태이기에 나는 그를, 그는 나를 함부로 논할 수 없음을 알고 실천해야 한다.


이와 관련한 흔한 실수가 질투다. 조너선이 마이클의 경제 상황을 질투했고 마이클이 조너선의 순수함을 질투했듯, 우리는 자주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과 이르지 못한 상황에 대하여 질투한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것을 질투했는지 모른다. 또 부러움, 시기, 질투는 얼마나 인간적이고 보편적인 감정인지 모른다. 때론 경쟁심으로 승화되어 스스로에게 긍정적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러한 사실이 타인의 삶을 논할 수 있는 당위를 부여하는 것은 아니다. 질투와 마찬가지로 연민도 함부로 휘둘러서는 안 된다. 연민과 조력은 구분되는 것이다. 타인의 삶을 우월하거나 열등한 것으로 설정하고 이에 자신의 삶을 대립시켜 이해하는 것은 일종의 비합리다. 유일하고 유한한 생을 살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누구나 존엄하다고 한다. 단지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가치가 있으며, 이 가치는 어떤 요인에 의해서도 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여기에는 너무나 당연하여 생략된 전제가 하나 있다. 인간은 언제나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와 내일의 나도 다르다고 볼 수 있는데, 따라서 우리는 과거와 화해하고 미래를 단정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다시, 인간은 각자 유일한 시간을 살아낼 수 있다는 조건 아래에서 존엄하다. 내 삶에서는 진실이었던 것이 그의 삶에서는 거짓이거나 무가치한 것일 수 있다. 조건부이기에 만약 온전히 같은 삶을 사는 인간이 등장한다면 재검토되어야 하는 것이 인간의 존엄성 개념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줄곧 자기만의 프랙탈을 그리며 살아간다. 그래서 서로를 존중하고 속단하지 않으며 도움을 주고받는다. 유일함은 그렇게 사회를 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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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은 물질이라기보다 정보라고 한다. 하긴 생명이 물질이라면 곰탕이라든가 오돌뼈가 성장기 아이를 위한 글로벌 보양식이 되었을 것이다. K-껍데기가 차세대 뷰티 산업을 선도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생명을 이루는 정보가 언제나 투명하고 충만하게 다가오는 것은 아니며, 우리네 삶과 역사는 언제나 달라 함부로 비견할 수 없다니. 도대체 무엇을 규범으로 삼고 살아가라는 말인가.


앞서 언급하였듯 조너선은 ‘수퍼비아’를 완성하였고, 평은 나쁘지 않았으나 제작에는 실패한다. 브로드웨이에 올리기에는 지나치게 예술적이고 오프브로드웨이에 올리기에는 제작비가 많이 든다는 것이 이유였다. 뮤지컬 작가가 되기로 한 지 어언 8년, 30살이 넘어버린 조너선은 무엇을 해야 할까. 그는 자신의 에이전시. ‘로자’에게 전화를 건다. “전 이제 뭘 하죠?” 뮤지컬계에서 잔뼈가 굵은 로자는 이렇게 답한다. “다음 작품을 써. 그게 끝나면 또 쓰고. 계속해서 써. 그게 작가야. 그렇게 계속 써 재끼면서 언젠가 하나 터지길 바라는 거고.”


우리 살아온 시간이 비싸게 책정될지, 예술적이라고 평해질지 모르지만, 비평은 감상자의 몫으로 두고 당신은 줄기차게 살자. 어김없이 흘러갈 시간을 빠뜨리지 않고 촬영하는 CCTV로서의 삶만이 고작 허락된 것이니 하이라이트는 어느 정도 찍고 난 다음에나 생각하기로 하자. 다음 하루를 살고, 그 하루가 저물면 또 하루, 몇 주, 몇 달을 보내자. 그게 삶일지도 모른다. 언제나 하나씩 터지는 웃음과 울음을 느끼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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