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라는, 우리 모두의 미래

아버지의 죽음, 그리고 나의 귀향

by 이진순

젊었을 때부터 아버지는 갑자기 발작하듯 쓰러지는 경우가 간간이 있었다. 그때마다 마을에서 응급처치와 치료를 해주시는 용한(?) 분의 도움도 많이 받고, 병원 신세도 지면서 고비를 넘겨오셨다. 아버지는 삶이 굴곡진 만큼 심신의 고난을 견뎌내는 힘 또한 만만치 않은 분이었던 것 같다.


내가 어리거나 젊었을 때는 아버지가 아픈 것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또 쓰러지셨구나’ 라고 생각하는 정도였다. 조금 크고 나서는 특별히 아버지가 과로하거나 신경 쓸 일이 많을 즈음이면, ‘혹시 또 쓰러지는 거 아닐까?’하고 미리 짐작이 될 때도 있었다.


쓰러지고 또 회복되는 것이 당연한 과정처럼 여겨졌고, 보통 죽음과 연결되어 생각되지는 않았다. 쓰러진 아버지를 보며 죽음을 상상했던 경험이 영사기의 필름처럼 기억에 남아있기는 하다. 내가 고등학생 때 쯤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버지가 쓰러져서 몸이 마비되고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고, 어머니는 이웃에게 도움을 청하는 전화를 하고나서 아버지 몸을 주무르며 기도하는 중이었다. 나는 그 옆에서 담담하게 아버지를 보고 있었다. 이런 나를 보고 어머니가 너는 왜 기도하지 않느냐고 했었다. ‘혹시 아버지가 죽으면, 슬플까?’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앉아있었던 것 같다. 그다지 슬프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에 대한 이러저런 불만도 많았고, 빨리 어른이 되어 집을 벗어나고 싶었던 시절의 이야기다.


그저 당연했던 고향 제주의 풍경이 언젠가부터 내 눈과 마음속으로 훅 하고 들어오기 시작하던 때가 있었다. 부모라는 존재 역시 그랬던 것 같다. 내 ‘부모’라는 틀에서만 그들을 보던 시절에는 그저 나와 관계된 요소 중 일부일 뿐이었다. 나는 부모의 품에서 몹시 벗어나고 싶어 하면서도, 그들의 존재는 오래도록 ‘부모’라는 틀에 가두어놓고 생각해왔던 것 같다. 그런 상황에서는 그들이 살아왔을, 그리고 살고 있는 삶의 모습들이 제대로 눈에 들어오질 않았다.


그러다 언제부턴가 아마도 30살이 가까워서야 한 인간으로서의 그들의 모습이 조금씩 천천히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희노애락애오욕을 가진 인간으로서의 그들의 삶이 언뜻언뜻 보이기 시작하면서 외로웠겠구나, 속상했겠구나, 불편하겠구나 등 그전에는 느껴보지 않았던 감정들이 조금씩 꿈틀거렸다.

그렇게 조금씩 그리고 천천히 부모의 삶을 알아가고 있을 때 그들은 내 생각보다 빠르게 늙어가고 있었다. 늙어서 굽고 왜소해진 등으로 딸의 택배 짐을 지고 앞서가는 아버지를 뒤따르며 울컥하던 순간들이 떠올라 다시 또 울컥거린다.


내 기억 속 사진 몇 장 그리고 아픔, 연민, 존경 등의 감정들로 마음 속 어딘가를 흐르는 아버지는 이제 여기에 없다. 당신이 20년 넘게 가꾸던 자그맣고 예쁘던 마당은 금세 정신이 없어졌다. 마당이 예뻤던 것은 원래 그런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손길과 마음 덕분이었음을 뒤늦게 깨닫는다.

4년전 추석을 맞아 어머니가 마당에 풀을 뽑고 계신다. 1년 전만 해도 아버지가 팔을 걷어부쳤을 텐데, 아프신 아버지는 오랫만에 마당에 나와 앉으셨다.

아버지는 길게 보면 3~4년 정도 노환을 앓으시다가 작년 초에 93세의 나이로 삶을 마무리하셨다. 마지막 2달 반 정도는 일반 병원과 요양 병원에서 보내셨다. 노환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던 시기에 나는 마침 직장생활을 접고 시간적으로 자유로워져서 한 달 넘는 시간을 제주의 부모님 집에서 함께 지냈다. 아마도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늙음, 아픔, 치매, 죽음 등에 대해 생각하게 된 것 같다.


이때 읽었던 책이 우에노 치즈코의 『누구나 혼자인 시대의 죽음』이었다. 책을 읽으며 이 시대의 삶과 죽음의 풍경에 대해, 내 늙은 부모의 삶과 죽음에 대해, 그리고 나의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는 죽음이라는 것에 대해 제대로 대면해보지는 않았던 것 같다. 내가 경험한 것이 아니므로 너무도 낯선 죽음, 그러나 선택의 여지없이 누구에게나 주어진 미래인 죽음을 비로소 조금씩 마주하기 시작했다.


이런 와중에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셨다. 가끔씩 요양병원에 계신 아버지를 찾아뵐 때마다 이 시간들을 견뎌낸다는 것이 어떤 것일까 하는 생각으로 자꾸만 마음이 무너지려 했다. 책을 보며 바래왔던 대로 익숙한 집에서 편안한 마음으로 지내시다 마지막을 맞는 것은 현실에선 불가능했다. 안타까움이나 연민, 머릿속에 머무르는 문제의식 정도로는 조금 다르게 죽을 수 있는 가능성은 없었다.


그래서 귀향을, 어머니와 함께 하는 삶을 결정했다. 아버지의 마지막을 보며 느꼈던 안타까움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다. 어머니의 여생과 죽음의 순간이 어떠할지, 아버지를 보낼 때처럼 안타깝지 않을 수 있을지 아직 나는 모른다. 다만 그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적어도 지금 어머니의 삶이 예전보다 조금은 편안하고 다채롭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이것만으로도 내 귀향의 목적은 이루어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어머니와 함께 살면서 나는 어머니라는 존재를 통해 삶과 죽음을, 인간을, 우리 사회를 생각하게 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어머니는 내가 삶을 바라보는 ‘창’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이 창을 통해 조금 더 깊게 조금 더 따뜻하게 나와 세상을 바라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이전 02화우리 부모님이 달라졌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