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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무지에서도 꽃은 피어난다

<노인복지혁명> 마지막 이야기

by 이진순

몸이 불편한 이들이 자긍심을 갖고 사는 사회는 노인들이 자긍심을 갖고 살 수 있는 사회이고, 정신적 장애가 있는 이들이 존중되는 사회는 치매가 시작되어도 존중되는 사회이다. 지적 장애인들의 취향과 결정과 능력이 존중받는 북유럽을 돌아보며, 저자는 일본의 대다수 지적 장애인들은 “어디서 살고 싶으십니까?” “무엇을 하고 싶은가요?”라고 진지하게 질문을 받아본 경험이 단 한 번도 없다고 말한다.


일본의 전직 여성 경제기획청장은, ‘여성은 세 번 노년을 산다’고 여성의 숙명을 표현했다. 즉 시부모, 남편, 자신의 노년을 산다는 이야기이다. 또 어느 여성 평론가는, 일본의 재택 복지는 ‘가정’이라는 이름의 밀실에 수발하는 사람과 수발 받는 사람이 하나로 묶인 채 감금당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고령의 부인을 간병하던 고령의 남편이 부인을 죽이고, 아들이 부모를 죽였다는 이야기가 뉴스에 심심찮게 나오던 시기의 이야기이다.


또 일본에서는 복지시설에 들어가는 사람은 세 번 죽음을 맞는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들어가기 전 ‘나 죽었다’는 기분으로 입소를 결심하고, 들어가서 ‘자신을 죽이고’ 지내야 하고, 마지막 ‘생물로서의 죽음’을 맞는 것이다.


그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으니, 지금의 일본에는 맞지 않는 이야기들일 수 있다. 지금 우리의 상황은 어떨까? 완전히 같지도 않지만, 전혀 다르다고도 할 수 없을 듯하다. 노노돌봄, 간병살인 등의 문제는 줄지 않고 오히려 늘어가고 있다. 불행 중 다행이라 해야 할지, 제도와 문화가 뒷받침해주지 않더라도 척박한 토양에서 꽃을 피워내고야 마는 사람들이 있다. 일본에서도 그 시절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


IEKxFaoggGp.jpg 2019년 애처가인 할아버지가 암투병중인 아내를 죽인 사건이 일어났다. 오랜 간병 생활이 힘들었고, 아내가 너무 고통스러워 보였다고 할아버지는 말했다.


일본의 ‘쇼난학원’은 부모에게 버림받은 아이들이 살아가는, 우리나라의 보육원과 같은 곳이다. 여기에서는 희한하게도 아이들의 웃는 얼굴과 발랄한 태도를 볼 수 있다. 1982년에 이곳에 다도 사범이며 케이스 워커(장애인을 위한 사회복지사) 경력을 가진 원장이 부임했다.


그는 기존에 있던 110개의 규칙을 점검했고, ‘어른에게만 편리한’ 규칙을 지우다 보니 규칙 전부가 없어졌다. 구성원 모두가 함께 이야기하며, 직원들과 아이들 양쪽이 지킬 규칙 하나를 만들었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범하지 않는다.’ 기숙사의 재건축에도 아이들이 직접 참여했다. 여러 집을 보러 다닌 결과, 러브호텔 설계의 명인인 건축사가 선택되었고, 프라이버시를 존중하는 건물이 만들어졌다.


“‘하기 싫으면 하지 않아도 된다’는 선택이 없다면 참된 선택이 아니지요.”라고 생각하는 희한한 원장이 희한한 보육원을 만들었다. 군대처럼 기상 소리에 일제히 기상하고, 네 살 어린아이가 경례도 잘하고, 강한 아이가 약한 아이를 구박하고 때리고, 다수가 담배를 피우고, 반수 이상이 시너를 몰래 흡입하는 곳, 이것이 ‘보육원다운’ 모습이고 그곳 역시 그랬다. 그런데 차츰 아이들의 거친 행동이 사라졌고, 보육원은 아이들의 학교 친구들이 방과 후 놀러 오는 장소이자, 인근 주민들의 육아 상담이나 취미와 모임의 장이 되었다.


1960년 후쿠오카 현 가스가 시에서 가스가사회협동조합이 이끌어가는 ‘걱정거리 상담’ 모임이 시작되었다. 마을 사람들이 모여 각자의 걱정거리를 나누는 과정에서, 배식, 노인하숙, 노인별장이 탄생했다.


배식 서비스는 저자가 본 중 ‘세계 제일’이다. 1975년 시작되어 하루도 거르지 않고 주야로 2회 배달된다. 같은 메뉴가 한 달에 두 번 나가는 일은 없다. 살림을 해 본 사람 대부분은 ‘어떻게 그게 가능하지?’하고 놀랄 것 같다.


요리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은 사람에게는 식사 배달보다 더 싼 반찬 재료 배달로 바꾸지 않겠는지를 묻는다. 월 1회 회식 날에는 평소 배달이 어려운 음식을 준비해서 나들이를 간다. 먹고 마시며 의견이나 불평을 나눈다. 노인, 신체 부자유자, 부모가 자주 집을 비워야 하는 가정의 자녀들까지 혜택을 받는다.


1984년에는 집에서 생활하는 것이 불안한 이들을 위해 ‘노인하숙, 행복한 고장’을 만들었다. 19세대분 방에는 모두 비상용 마이크가 설치되어있고, 호출하면 숙직 직원이 밤중에도 달려온다. 야간 귀가 시간이나 기상 시간 등의 규칙은 없다.


‘노인별장’은 고부간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탄생한 아이디어이다. 잠시 자신이 살던 집에서 나와 숙식을 할 수 있는 말 그대로 ‘별장’으로, 어디든 휠체어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설계되어있다.


이 외에도 주민들의 다양한 걱정거리와 필요를 아주 싼 값에 해결해주는데, 궁색한 티는 전혀 나지 않는다. 북유럽을 꼼꼼하게 살핀 저자는 가스가를 ‘일본식 노멀라이제이션’의 현장으로 꼽는다. 일반적인 조건이 유럽에 한참 뒤처져 있더라도, 그것이 가능성 제로를 말하는 것은 아니라고 가스가의 사례는 가르쳐주는 것 같다. 옥토가 아닌 황무지에서도 애써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워내는 것이 생명의 본질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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