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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과 함께라면, 어둠도 두렵지 않아

<슈테판 츠바이크의 마지막 수업>

by 하늘토끼


가영 언니, 그리고 효정아.


있잖아, 좀 웃긴 말일지도 모르겠는데, 한번도 말하지 않았지만, 내가 늘 인생에서 오래도록 품고 있는 질문이 하나 있었어. ‘내가 만약 1900년대 , 그 시절에 태어났다면, 과연 독립운동을 할 수 있었을까?’




용감하게 태극기를 들고 거리에 나섰을 것 같기도 하다가도, 과연 정말 목숨까지 걸 수 있었을까 싶기도 해. 살고 싶다는 건 본능인데, 그 본능을 꺾고 의지 하나로 거리로 나선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잖아. '나 하나 싸운다고 세상이 바뀔까? 내가 던진 조약돌 하나가 강물의 거센 흐름을 바꿀 수 있기나 할?' 국가나 사회의 구조가, 개인에게 얼마나 무력한지를 나는 알고 있고, 또 너무나 쉽게 희생되는 것도 결국은 무고한 이들이라는 걸, 우리는 살아오며 배웠잖아. '살아남아 독립된 조국을 보는 게 진정한 승자라고, 조용히 그 시간을 견뎌내는 것이 현실적인 것일지도 모른다'고 나이 먹을수록 그런 생각이 드는 나 자신을 볼 때면 괜히 부끄럽고 스스로가 작아졌었어. 답변이 늘 만족스럽지 않아서인지, 이 질문은 늘 내 안에서 풀리지 않은 채, 답도 나지 않은 채, 살아있었던 것 같아.


그렇다보니, 내가 아닌 또 다른 누굴가를 보며 이 질문을 투영하곤 했어. 가끔은 영화 속 정의로운 주인공 옆에서 '어우 나는 안 되겠다...'하고 관찰하는 시민2 정도의 관점으로 말이지. 근데 있지, 언젠가 당신들을 보면서 '이들이라면 독립 운동을 했겠다' 는 생각이 든 적이 종종 있었어. 그게 언제였는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당신들이 인간과 삶의 핵심과 가치, 영혼에 대해 누구보다 치열하고 애틋하게, 때로는 냉정할 만큼 깊이 있게 들여다보는 모습을 봤던 때였던 것 같아. 어쩌면 꽤 자주 그런 생각이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스스로를 냉정히 검열하면서도, 다른 사람의 모습을 보며 때론 감탄하고, 때론 비판하며, 또 결국 스스로의 배움으로 연결하는 그 눈빛 때문었을까. 그 진심 때문이었달까. 당신들의 영혼이 살아 숨쉬고 있다는 걸 느꼈어. 살아 있을 뿐만 아니라, 나이를 먹을 수록 더 단단하고, 더 빛나고, 더 잠잠히 깊어지는 걸 보며 문득 내 안의 질문에 당신들을 대입했던 것 같아. '언니랑 효정이라면, 했을거야. 독립을 위해, 인간의 자유를 위해 했을지도 몰라.' 나보다 훨씬 용기있고, 나은 사람들 같은 당신들이 엄청 존경스럽고 막 부러워지기도 했어.




오늘 <슈테판 츠바이크의 마지막 수업>이라는 책을 읽었어. 2차 세계대전 즈음의 기록인데, 그 혼란 속에서도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에 대한 신념을 잃지 않으려 했던, 한 인간의 내면 일기 같은 글이었어. “어두울 때에야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라는 문장이 책 맨 앞에 적혀 있었는데, 그 말이 참 오래 남더라. 정말이지, 가장 어두운 때에야 인간다움이 무엇인지, 우리가 지켜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더 또렷하게 빛을 발하는 것 같아.


글 중에 작가가 프라하에 깨져있는 실험실과 사라진 친구를 떠올리는 장면이 있었어, 그리고 대학에 감금되어 있을 친구도. 그 부분을 읽다가 갑자기, 뜬금없이 당신들이 생각났어. 어쩌면 지금의 우리도 각자의 자리에서 치열하게 인간의 영혼을 위해 싸우고 있을 것 같다고 말이지. 그리고, 우리가 함께 있다는 사실에 이상한 위로가 생겼어. 결국, 내 마음 깊은 곳의 그 질문으로 이어졌어. 과연 나는 독립 운동을 했을까. 어쩌면 독립 운동은 조국을 위한 싸움이기도 했겠지만, 개인의 자유와 존엄, 삶의 본질을 위한 싸움이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러고 나니 이런 답에 이르렀어. '당신들과 함께라면, 나도 할 수 있었을 것 같아'




갑자기 2025년 5월 한 일요일 아침에, 독립운동 타령을 해서 웃기겠지만, 그래도 이 생각을 전하고 싶었어. 우리의 이 짧지만 긴 인생에서, 적어도 우리 자신의 영혼을 위해,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영혼을 위해, 함께 고민하고 울컥하고 때로는 말없이 견디는 그런 시간을 함께 나누고 있다는 게 너무 고맙고 소중해서. 그리고 왠지 앞으로도 쭉 당신들과 함께 이러고 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어쩜 그렇게 둘 다 똑같이 '인생책이라 너 생각났다'면서 책 선물을 하고, 또 똑같이 편지를 잔뜩 써서는 '언제든 나에게 기대'라며 나를 울컥하게 하는지... 새삼 당신들과의 인연에 감사하고, 마음 깊은 존경과 애정을 전해.


이 글을 보며 '야, 우리가 무슨 독립운동이냐, 살아남는 자가 승자야- 각자 알아서 잘 살아남고 꼭 다시 만나' 하면서 호들갑스럽게 손사래를 칠 걸 알아. 그치만 결국 여기저기서 태극기 들고 서 있다가 만나고, 혹은 어디 지하 굴이라도 파서 김치찌개 끓이면서 독립 신문 돌리고 있을 우리 모습이 괜히 상상되어, 그런 상상만으로도 괜히 웃음이 난다. 그런데 진심으로, 그래도 난 당신들과 함께였다면, 그 어둠 속에 들어갈 수 있었을 것 같아. 그저 옆에 서 있기만 해도 덜 무서울 것 같아서. 두렵기보단 너무 희망차고 찬란할 것만 같아서.


요즘은 죽음에 대해서도 가끔 생각해. 언젠가 내가 할머니가 되어 죽을 때, 그 즈음에 당신들하고 마주 앉아서 따뜻한 차 한잔 놓고 이렇게 말할 것만 같아. “야, 이 정도면 우리 진짜 잘 살았다. 근데 오늘도 시간이 없어서 아직 수다가 덜 끝났으니, 하늘나라에서 마저 얘기하자.” 써 놓고 보니, 좀 웃기네. 진짜 그럴 것만 같아서. 내 인생에 와줘서 고마워, 진심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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