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35, 여자의 시간 (커리어를 고민하는 후배에게)
"난 나중에 국회의원이 되고 싶어.
엄청 잘 나가는 국회의원 있지, 완전 떵떵거리며 지역구를 다니는 사람.
내가 어느 책에서 읽었는데, 야망을 숨기지 말고 많이 표출하라고 하더라.
얘기하고 다니다 보면, 언젠가 그 꿈이 이루어진대.”
15년 전이었나,
스물 무렵에 한 친구가 했던 말은 나에겐 충격이었다.
묻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다가와서는,
갑자기 본인의 큰 꿈을 숨김없이 이야기하고,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야망’이라고 표현하는 배포란!
‘야망’이라는 말은 왠지 부정적인 느낌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 말이다.
(지금도 그 친구는 항상 성장하고 도전하는 삶을 사는, 내가 좋아하는 친구다!)
그로부터 15년이 흐른 지금, 나와 친구들의 현재를 생각해본다.
회사의 멋진 커리어우먼이 된 친구도 있고,
검사, 변호사 등 전문직 여성이 된 친구도 있다.
외교관이나 공무원, 선생님이 된 친구도 있다.
작은 회사를 만든 친구도, 카페를 운영하는 친구도 있다.
결혼하고 여전히 일을 열정적으로 하고 있는 친구도 있고,
임신을 한 친구도, 또 출산 후 육아에 집중하기 위해 일을 그만둔 친구도 있다.
꿈과 야망을 이야기하던 우리의 수다 주제는 이제
결혼과 육아, 여성으로서 힘든 사회생활, 언제까지 일을 해야 할까,
속 썩이는 남자 친구 또는 남편 등의 주제로 바뀌었다.
사회가 많이 좋아졌지만
여전히 여성들에게는 회사 생활은 쉽지만은 않다.
여전히 입사 면접에서 남성을 우대하기도 하고,
입사를 해보니 남성 중심적인 문화에 벽을 느끼기도 하고,
승진이 누락되기도 하고, 차별적인 말을 듣기도 한다.
그 언젠가 20대엔 유명한 젊은 여성 리더가 되고 싶었지만,
나도 어느 순간 “회사는 월급 받으러 다니는 거지!”
“아, 힘들다. 그냥 때려치울까?”
“안 돼, 나의 소중한 월급. 저는 성실한 회사 노예입니다, 오늘도 출근합니다.” 하는 말을
입에 달고 살기도 한다.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전철 안에서,
‘참, 남의 돈 벌고 살기 힘들다’ 싶다가도
언젠가 대학 시절 ‘나 야망 있는 여자야.’라고 하던 친구의 말이 떠오른다.
그래, 우리 모두 야망이 있었지. 아니, 지금도 꿈이 있지.
힘든 회사 생활, 그리고 결혼과 육아의 고충 스토리들 속에서도 나는 여전히 꿈을 꾸려고 노력한다.
엄청나게 거창한 꿈은 아니더라도, 소소한 커리어적인 꿈과,
또 정말 죽기 전에 할 수 있을까 싶은 마음속 큰 꿈을 차곡차곡 쌓아본다.
한번 컨은 영원한 컨이라더라
나의 첫 번째 커리어는 글로벌 컨설팅 회사의 ‘경영 컨설턴트’였다.
기업의 여러 가지 전략적, 또는 운영 이슈에 대해 자문 서비스를 제공하여 개선방안을 도출하는 직업이다.
어쩌다 컨설팅의 세계에 발을 들였냐 하면,
대학교에서 경영학을 복수 전공하고, 빡센 경영학회 생활을 하며
자연스럽게 컨설턴트에 로망을 가지게 되었고,
소위 스카이 대학이 아니면 입사하기 어렵다는 한 선배의 얘기에
(스카이가 아닌 나는) 오기가 생겨서 더욱 도전하게 되었다.
(자세한 직업 선택의 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하겠다.)
7년 가까이 컨설턴트로 참 빡세게 살았다.
주말 출근도, 새벽까지 하는 야근도 익숙했고,
보고서에 대해 소위 ‘까임을 당하는 경험’에도 익숙해졌고,
어느새 나도 후배의 보고서를 ‘까고 있는’ 꼰대라떼가 되었다.
(나는 스스로 ‘까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싶지만, 누가 증명해줄 수 있으랴.
나라고 엄청 다른 멋들어진 선배는 아니었을 거다.)
매니저 직급이 되고 나서는 그래도 내가 조금은 고객사에 도움이 된다는,
전문성이 생긴다는 느낌이 들었고, 나는 내 일을 좋아했고, 꽤나 행복했다.
걸어서(?) 진짜 세계 속으로
컨설팅 생활 5년이 넘어가던 즈음에, 나의 관심이 다른 곳으로 돌아가기 시작했었다.
기업을 돕는 데 나의 노력과 열정을 들이는 것도 뿌듯하고 좋은 일이었지만,
사회와 사람들에게 좀 더 도움이 되고 싶어서
컨설턴트 7년이 되던 바로 그 해에,
‘국제개발협력(ODA)’이라는 분야로 용감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연봉을 반절 가까이 깎고 완전히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는 것이라, 주변 사람들이 참 많이 놀랐었다.
특히 생각해보면 엄마는 ‘언제까지 할 거야?’ 하는 말을 주기적으로 하곤 했다.)
동남아시아, 아프리카, 중남미 개발도상국에 학교도 지어주고,
교육 정책도 시스템도 만들어주고,
교사들 교육도 시켜주는 등
정말 국가와 사회에 보탬이 되는 일이었다.
2년 반 동안 콩고 민주공화국, 니카라과, 미얀마, 스리랑카 등 참 많은 해외 출장을 다녔다.
한 나라 국가의 장차관들도 직접 만나고,
한국을 대표한 출장단으로서 참 우리나라가 자랑스러웠고, 내 일에 보람이 있었다.
한 번은 니카라과에서는 갑작스러운 내전 때문에 긴급 대피를 하기도 했는데,
참 다이내믹한 직업이었다.
그런 과정에서 건강이 조금 상하기도 했고,
여러 가지 다른 이유로 나는 다시 기업 사회로 돌아왔다.
이번엔 '우리 회사'를 위해
사실 지금 나의 세 번째 직장은, 처음 몸 담았던 친정, 컨설팅 회사이다.
다시 돌아온 것이다.
그러나 이번엔 고객을 위한 것이 아닌, ‘우리 회사’를 위한 내부 글로벌 프로젝트를 하고 있다.
내부 프로젝트가 쉽지만은 않지만, 좋은 팀원들과 함께 나름 재미있게 일하고 있다.
내가 하루에 쏟는 시간과 열정이, '우리 회사'의 발전으로 갈 수 있다는 사실이 뿌듯하다.
나는 여전히 꿈을 꾼다.
대통령이든 국회의원이든 국가 대표든,
예전처럼 엄청나게 멋진 꿈은 아니더라도,
언젠가 그 비슷하게라도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꿈을 꿔 본다.
언젠가 기업과의 협력을 통해 사회 약자들의 자립을 도울 수 있는
혁신적인 프로젝트를 만들기를,
또 그 후엔 내 이름으로 된 재단을 만들어
계속 사회에 환원할 수 있는 일을 만들 수 있기를 꿈꾼다.
여자의 야망은 커야 한다. 포기할만한 요인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여자의 야망은 지켜져야만 한다. 너무나 쉽게 잊히고 현실에 안주하기 쉽기 때문이다.
야망을 실현하는 ‘여성의 커리어’는 그래서 중요하다.
내가 여성의 커리어에 관심이 많은 이유는,
7할은 다른 사람에 대한 오지랖이고, 3할 정도는 나 스스로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과 응원이다.
나는 참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많다.
특히 회사 동료와 후배들에게, 또 특히 고민이 많아서 나를 찾는 사람들에게 관심이 많다.
그들의 커리어에 대한 고민과, 일에 대한 고민과,
개인사에 대한 걱정은 고스란히 나의 고민이 된다.
엄청난 도움은 못 되지만, 그저 함께 나눌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또한, 나는 참 나에게 관심이 많다.
아직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겠고, 나에 대해 알고 싶다.
그래서 회사 동료나 선배들에게, 또 가끔은 후배들에게 고민을 털어놓는다.
나의 2535기(25세-35세) 시절의 치열한 고민과 번뇌의 내용들을
개똥철학처럼 정리해보고 싶어졌다.
정답은 아니지만, 나는 이렇게 생각했었노라고, 이렇게 경험했었노라고, 정리를 잘해 두면,
언젠가 ‘이런 고민을 해봤던 사람이 있을까?’ 하고
외롭게 인터넷을 뒤지고 있는 어느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
또, 그때의 고민들을 정리하며 나 스스로도 용기와 기운을 얻고 싶어서.
(‘여성의 2535기’라는 말은 혼자 지어낸 말인데,
요즘 유행하는 드라마와 웹툰 ‘며느라기’에서 따와 보았다.
며느라기의 뜻은 사춘‘기’처럼 한 시기를 의미하는데,
“제가 다 할게요”, “저한테 주세요”하며 시댁 식구들에게 예쁨 받고 칭찬받고 싶은 시기라고 한다.
여성의 2535기에는 많은 경우 직장 생활을 시작하고,
중간 직급으로 승진을 하며, 본격적인 연애와 결혼, 육아가 시작되는 시기이다.
수많은 인생의 변화가 한 번에 몰아닥치며, 정체성과 자아의 혼란이 오는 시기이다.)
지금 2535기를 지나고 있는 후배들에게, (꼭 여성이 아니더라도),
우리 꼭 포기하지 말고 꿈을 꾸자고,
야망을 가져보자고 말하고 싶다.
나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리고 아무도 답을 모르고,
그렇다고 뚜렷한 롤모델도 찾기 어려운,
커리어적인 고민과 일적인 고민을 함께 나누고 싶다.
각자 먹고살기도 바쁜데 누가 나를 챙겨주겠나,
내가 나를 챙겨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