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 18살에 엄마는 곱창집을 시작했다. 때는 2007년. 올해로 만 14년째다. 새삼스레 몇 년이 흘렀는지 손가락을 접어가며 세어보니 입이 저절로 벌어진다. 그동안 나는 정말 많이 변했다. 대학을 2번이나 갔고, 해외 유학까진 아니지만 짧게나마 외국 생활도 해보았으며,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가정을 이루기도 했다.
엄마가 왜 곱창집을 했는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당시 외할머니께선 마장동 축산시장에서 도소매업을 하고 계셨다. 곱창은 손질이 힘들고 재고관리가 어려워 외할머니와 거래를 하게 되면 여타 동종 식당에 비해 경쟁력이 있었다. "소 곱창"이라는 메뉴는 앞서 말했듯이 관리가 힘들기 때문에 당시만 해도 파는 곳이 많지 않았다. (화사의 곱창 파문이 있고 나서부턴 '한우곱창'의 붐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지만 그땐 접하기 쉽지 않았다.) 한 동네에 곱창집이 몇 개 있는지 한 손으로도 셀 수 있을 정도였기 때문에 입소문은 빨랐고, 흔히 개업빨(?)이라 하는 효과는 1년여 정도 지속되었다.
엄마도 장사가 처음이었다. 개업 초반부터 지금까지 손님들의 조언과 피드백이 없었다면 긴 세월을 견디기 어려웠으리라. 손님 개개인의 모든 취향을 맞추기는 어렵다. 한데 개중에 분명 겹치는 불만이 있다. 반복되는 요구는 이유가 있는 법이다. 불편하다고 느끼는 것에서부터 바꿔나갔다. 초반엔 다른 여느 곱창집처럼 초벌구이를 한 후, 손님 테이블로 옮겨 그 자리에서 익을 때까지 구워드렸었다. 모든 고기가 그러하듯, 굽는 과정에서 절반에 가까운 기름이 빠져나간다. 예를 들어 삼겹살을 먹으러 갔다 치자. 주문을 마치고 다 익은 고기가 접시에 서빙되는 경우는 드물지 않은가.(경북 봉성에 가면 봉성 숯불구이 집이 있는데 이곳에선 솔잎 향을 입혀 숯불에 맛있게 구워 접시에 담아 바로 먹을 수 있게 상이 차려지기 때문에 '없다' 대신 '드물다'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다시 곱창으로 돌아와서, 비교적 굽기가 어렵다는 게 초벌을 해가는 이유다. 하지만 여기서 너무 많은 인력이 소비된다. 20개의 테이블을 홀서빙 직원 3명이 감당하기엔 벅찬 것은 물론이고, 제대로 된 서비스를 받아보기도 어렵다. 그렇다고 직원을 더 채용하기엔 골목상권상 매번 바쁘게 돌아간다고 장담할 수도 없다. 하여 차이점을 두기로 했다. 주방에서 초벌 한 곱창을 홀에 지정된 자리에서 담당 직원이 굽는다. 다 익은 곱창과 각종 곁들일 야채를 한판에 올려 서빙한다. 그렇게 되면 손님 테이블에서 곱창을 굽는다고 온 데 간 데 기름튀기지 않아도 되고, 손님 입장에서도 편해졌다.익혀나가기 때문에 본래 g 수보다 양을 더 잡았다. 손님이 많이 찾아줘야만 살아남는다는 신념으로 적게 남기고 많이 팔았다. 반응은 빨랐다. 이렇게 다 익혀 나와 먹기만 하면 된다니 편리하다는 평이 대부분이었다. 물론 지금까지도 양이 적은 것 같다는 불평은 간혹 있지만, 식사 후엔 늘 배부르고 맛있게 잘 먹었다고 말씀하신다.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가격 변동이 있었다. 경매 입찰가에 따라 매번 매입 가격이 바뀌기 때문에 때에 따라 메뉴판의 수정은 불가피했다. 가격이 내리는 건 크게 문제없었다. 하지만 한번 내린 가격을 다시 올려야 할 땐 굉장히 힘들었다. 손가락 두 마디 되는 글씨 크기로 가격을 올려야 하는 사정을 나열하고 양해를 구하는 문구로 A4용지를 가득 채워야 했다. 모든 식당들이 입찰가에 따라 가격을 변동하진 않는다. 어려운 경제사정에 조금이라도 손님들이 식당 문턱을 넘는 데에 어려움이 없길 바라며 마진율보단 자주 찾아주는 단골들을 떠올렸다.
마감하다 문득 같이 늙어간 집기들이 대견해 #shot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사에는 수많은 고비가 닥친다. 시민 정서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크고 작은 것들이 장사에 반영되어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어 갑자기 날씨가 추워진다거나 갑자기 날씨가 무척이나 더워질 경우, 그날은 길에 지나다니는 사람이 눈에 띄게 줄어든다. 또한 불안을 일으키는 큰 이슈가 터지는 경우도 그렇다. 전쟁에 대한 이슈가 크게 발발했을 때 한시적으로 정말 손님이 없었다. 이것 말고도 가장 힘들었던 시기 중 하나는 '광우병이 터졌을 때' 와 일명 '화사의 곱창 대란'을 꼽을 수 있다. 전자는 그야말로 버텨야 했다. 찾아주시는 한 분 한 분이 감사했고 소중했다. 이 시기만 버티면 괜찮아지리라 믿고 이겨냈다. 정말 힘든 시기였기에 버티지 못한 가게들도 꽤 되었다. 그중에 살아남았다는 걸 인정이라도 받는 듯이 많은 분들이 찾아주었고, 크고 작은 역풍에도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단단해지고 있었다. 어느덧 먹자골목의 ‘터줏대감’격으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얼마 안 가 '곱창대란'이 벌어졌다.
이번엔 문제가 달랐다. 말 그대로 곱창을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가 되어버렸다. 거래처마다 물량 확보에 힘썼고, 수요를 따라가지 못해 큰 도매시장을 찾아가 맨땅에 해딩하는격으로 곱창을 구하러 다녔다. 어렵게 구한 한보의 곱창마저 다른 상인의 눈치(서로 각자의 거래처를 챙기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있었다.)로 인해 구하지 못했다. 다른 곱창집들도 마찬가지였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곱창집에서 곱창'만'을 시키는 걸 지양하기 시작했다. 한정된 양으로 하루치 장사를 하기엔 한계가 있었다. 하여 한 테이블당 몇 인분 이상은 팔지 못한다고 양해를 구해야 했다. 손님 입장에서 생각하면 정말 아이러니했을 일이다. 아니, 곱창집에서 곱창을 한정 판매한다니.
지칠 대로 지쳤다. 곱창을 구하기 위해 구걸을 마다않고 두발로 뛰었지만 돌아오는 건 없었다. 할 수 있는 모든 걸 했다고 느낀 엄마는 '넘어진 김에 쉬어가자'라며 연중무휴로 열어오던 가게를, 주말도 아닌 주 중에 3일을 쉬기로 결단을 내렸다. 엄마의 결정에 우린 박수를 보냈다. 그동안 가족여행을 가더라도 새벽에 출발해, 만 하루를 쉬지 못하고 다시 돌아와 장사를 해야 했던 터였기에 3일을 내리쉰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가족들이 모두 휴가를 내 남해여행을 다녀왔었다. 정말 갑자기 즉흥 여행을 가게 되어 당일마다 숙소를 예약해야 했지만, 그 모든 게 특별하게 느껴졌고 신비로운 자유와 행복감에 3일은 무척이나 짧게 느껴졌었다.
다시 돌아온 후에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할 수 있는 만큼만 영업하기로 했다. 조기 영업종료와 주말에 문을 여는 건 꿈도 꿀 수 없었지만, 영업시간 내에 무척이나 많은 손님들이 찾아주어 '예약 시스템'을 만들고 웨이팅 장소를 제공하기도 했었다. 이후에 곱창 집들이 굉장히 많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곱창'이라는 메뉴는 사람들에게 좀 더 친근감 있게 다가갔고, 쉽게 접할 수 있는 대중적인 음식이 되었다.
그리고 2020년, 코로나바이러스가 퍼졌다. 아직까지 우리 가게에 확진자가 방문하진 않았지만 긴장을 늦출 순 없다. 감염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곳은 없기에 감염에 대한 불안의 공포는 빠르게 퍼졌고 먹자 거리엔 사람들의 발길이 점차 잦아들었다. 저마다의 가게를 들어가기 위해선 본인인증을 위해 QR코드 인식 또는 인적 사항을 기입하여야 하고, 온도를 재어 37도 이상의 체온이 나오면 입장이 불가하다. 입장 후엔 거리두기 테이블을 피해 다른 손님과는 떨어져 앉아야 하고, 음식을 먹을 때를 제외하고 이동할 때나 대화할 땐 마스크로 입을 가려야 한다. 잘 지켜지는 부분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부분도 분명히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익숙해져 잘 지켜지고 있는 추세다. 손 세정제를 비치해두고 소독제품으로 테이블을 닦는다. 각자 있는 곳에서 바이러스 확산 방지를 위해 애쓰고 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바램은 바람일 뿐이었나. 확진자 수가 늘어남에 따라 거리 두기 강화로 인해 밤 9시에 모든 식당이 문을 닫아야 한다. 모두 알다시피 확진자 1000명 도래 후엔 5인 이상은 모일 수조차 없다.
비상이 걸렸다. 보통 오후 7-9시가 피크타임이고, 밤늦게 오는 손님들도 왕왕 있었다. 식사와 안주의 성격을 동시에 갖기 때문에 시간의 연속성을 배제할 수 없는데, 9시에 홀 마감을 해야 한다는 건 막대한 손실을 가져왔다. 이를 매우기 위해 가장 먼저 불필요한 일손을 없애야 했다. 오픈을 맡아 이른 시간대에 일하는 직원을 제외하곤 다른 직원들의 입지가 불투명해졌다. 또한, 업종의 특성과는 무관하게 대부분의 식당들은 배달 및 포장 판매를 시작했다.
우리도 발 빠르게 움직였다. 먹고 남은 음식만 포장했었기 때문에 제대로 된 포장 용기가 필요했다. 여러 군데 식자재마트를 돌며 용도에 맞는 용기를 찾았다. 용기를 고르는데 있어 고려했던 점이 있다면 환경문제와 편리성이었다. 배달과 포장이 많아지면서 일회 용기 사용이 끝도 없이 많아졌다. 방대한 쓰레기의 양도 문제지만, 어떻게 처리하느냐도 중요한 과제였다. 오염된 플라스틱은 재활용이 되지 않는다. 때문에 재활용기는 깨끗하게 닦아 버려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세대들도 꽤 많아 문제가 되고 있는 모양이었다. 대체할 수 있는 용기가 있다면 비용이 좀 더 들더라도 나쁘지 않은 선택일 것이라 생각해 종이 펄프 재질의 용기를 골랐다. 한 용기가 세 칸으로 나누어져 있어 일일이 뚜껑을 열어야 하는 수고를 덜었다.
오랜 고민 끝에 배달대신 홀 손님과 포장주문만을 받기로 결정했다. 홀 중심의 식당이기 때문에 홀에 손님이 올 경우 배달 주문까지 함께 소화해 내기가 쉽지 않다. 무엇보다 가장 큰 이유는 맛이다. 지글지글 불판 위에서 익혀가며 야채도 함께 얹어 구워 먹을 때 가장 맛이 잘 어우러진다. 가장 맛있는 골든타임을 놓치면 먹을 때 감동이 반감이 된다. 또한 배달을 하기 위해선 지금의 가격을 받을 수가 없다. 배달대행업체 수수료와 포장 용기 + 보냉 백까지 하게 되면 값이 많이 오른다. 이 모든 것을 감내할 만큼의 시스템을 현재로선 갖출 수 없기 때문에 과감히 포기했다.
집으로 포장해온 #모듬곱창 (feat. 직접담근 대파김치, 부추)
거리두기 2.5단계 초반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취지'를 지키고자 노력했다. 9시까지만 활동하라는 메시지라고 받아들이기보단, 웬만한 대외활동을 자제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던 것 같다. 하지만 장기간 지속됨에 따라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약속 또는 관계들이 있었으리라. 꽤 오래 지속되었기 때문에 이에 적응하여 남녀노소 모두 지침을 따르는 데에 서투른 모습이 많이 사라졌다. 우왕좌왕 헤매지 않고 능숙하게 QR코드를 찍는다. 거리 두기 테이블을 피해 앉고 잠시 일어나는 것일지라도 마스크를 착용하고 움직인다. 침체되었던 매출도 다시금 질서정연하게 되돌아오고 있다. 꽤나 불편할 터인데 규칙들을 잘 지켜나가는 모습을 보면 그래도 희망이 조금 보인다.
취기가 오른 사람들로 북적이던 밤 9시 먹자골목 거리를 떠올려본다. 잠들지 않는 도시의 불빛은 어둠 속에서 더 밝게 빛났었다. 얼마 전 엄마를 도와 마감을 하던 중 가게 밖으로 가로등불만이 얇게 새어 나오는 깜깜한 거리가 어색한 듯 핸드폰 카메라를 꺼내들고 풍경을 담아내는 한 중년을 보았다. 매일 걷던 길이 낯설어지는 순간이었으리라. 그러나 이내 익숙해질 것이다. 지난날 우리가 화려한 밤거리에 익숙했듯이. 그리고 다시 되찾을거다. 복잡한 걱정거리없이 친구와 저녁한끼먹고 술한잔 기울이는 일상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