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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외이례 Feb 22. 2021

세 살 버릇이 여든까지 가진 않겠지만,

서른세살의 나쁜버릇은 여든까지 나를 온전케 살게 하지 않을수도 있으니까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늙어지면은 못 노나니'


대학생 때는 학생의 본분이 있기 때문에 죄책감 없이 놀기 위해선 때때로 명분이 필요했다. 개강을 기념으로 새내기들과 복학생들이 어우러지는 '개강 총회'를 빌미로 다 같이 한데 모여 술을 퍼부었던 3월을 시작으로, 각종 스터디 모임 혹은 동아리 친구들과의 마무리는 늘 술자리로 이어졌고 한 학기가 종강할 때까지 갖은 이유를 붙여가며 노는데 진심을 다하던 우리였다.


너무 잦은 모임에 핑곗거리가 떨어지게 된 어느 날, 이 노랫가락을 빌미로 자주 가던 술집에 모여서 담소를 나누던 중 한 친구 녀석이 이런 말을 했다.


"그거 알아? 원래 이 노래가 하고 싶었던 말은 젊을 때 맘껏 놀아두라는 게 아니라,

한 살이라도 어릴 때..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내려놓을 수 있을 때 '내려놓자'의 '노세'란 뜻 이래"


이 말을 듣고 나선 외마디 비명만이 세어 나왔다. 이토록 철학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노래를 그저 마시고 취하기 위해 입에 올렸었다니. 나의 무지함에 창피했다. 흥건하게 취했던 분위기가 가라앉고 저마다의 진지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자리가 파한 후 이 노랫가락에 대해 다시 찾아보았다. 가수 황정아가 1962년 발표한 노래로 '젊어서 놀아'라고 가사가 명시되어 있었다. '노세 노세 젊어서 놀아 늙어지면은 못 노나니'라고. (간단히 첨언을 하자면, 가사 내용은 언뜻 노는데 혈안이 된 것처럼 실컷 놀아두자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발표된 시대로 미루어 보아 놀고 싶어도 놀 수가 없었던 당 시대의 애환을 품고 있다고 한다.)


원효대사가 밤사이 자신의 갈증을 해결해 준 물이 해골물이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유학길에 오르다 되돌아온 것처럼, 그 물이 어떤 물이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위의 한 구절만이 후세에 전해진다면 얼마든지 이중적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으리라. 이미 그 친구의 대사가 뇌리에 깊이 박혀버린 후였다. 당시 버리는 것보다는 가지기 위해 애쓰고 있던 나 자신에게 필요했던 말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두 손 가득 더 쥐려 하면 할수록 손가락 사이로 세어나가는 것들에 어찌나 많은 회한들이 묻어있었을까.


한데 내려놓아야 한다니. 하나는 알고 둘은 알지 못했다. 더 많이 쌓으려고만 했지, 이미 쌓인 것들을 보지 못했다. 당시의 난 지식이 됐든 스펙이 되었든 간에 닥치는 대로 경험을 쌓음으로써 갈증을 해소하려 했다. 그뿐만 아니라, 정말 많은 사람들을 가리지 않고 만났다. 무언가 하지 않고 있음은 미래에 대한 불안을 증폭시켰고, 누구도 만나지 않는 주말은 사회로부터의 도태로 느껴졌었다. 그저 젊기에 당연히 딸려오는 고민쯤으로 여겼다. 편입학으로 들어갔던 두 번째 대학생활은 바삐 흘러갔다. 학과 학술 동아리와 토론 동아리에 가입했고, 학교 내에 통합 동아리 활동도 병행하였다. 기존에 재학 중인 학생들보다 학교 내에 알고 지내는 친구들이 많아졌다. 흔히 말하는 '인사이더'의 대명사가 될 정도로 활발히 인지도를 높이는데 애썼다. 학교 근처 자취방에서 토막잠을 겨우 자고 덜 떠진 눈으로 나서는 아침이 반복되었지만, 발걸음만큼은 무겁지 않았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바쁘고 정신없이 사는 하루하루가 마음에 들기까지 했었다. 갑작스럽게 다가오는 행복들이 당황스럽지만 반가웠고, 스스로의 추진력에 감탄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며 시간을 쪼개어 쓰는 계획성을 갈망하고 있었다. 가끔씩 찾아오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잡기라도 하게 되면 주어진 상황을 감사히 여기고 열정을 태웠다. 또래들보다 시기상 조금 늦은 대학생활 탓에 아등바등하며 그간 쌓아온 땔감들을 맹렬히 태우던 나였다.


별만큼 많은 꿈들이 나의 길을 밝혀줄 것이라 믿었던 찬란한 20대의 나였다. (사진 속 오리온자리 有)


대학생활이 끝나갈 무렵 취업을 했고 학교 수업과 회사 생활을 병행하며 서서히 배터리는 방전되어갔다. 잠은 버스에서 쪽잠을 자고, 틈틈이 과제를 제출해야 했으며 회식은 빠지지 않았다. 회식 때 마신 술이 다 깨기도 전에 알람 소리에 일어나 출근을 했고, 지하철로 환승할 때면 화장실을 찾아 못다 깬 술로 인한 구토를 해야 했다. 스스로 방전되었다고 알아챈 건 직장 생활 2년 차 정도에 들어갔을 때다. 제일 먼저 몸이 아팠다. 일주일 중 어느 한날도 쉴 수 없었다. 오히려 갑자기 쉬는 시간이 주어지면 무얼 해야 할지 감도 안 와 밀린 잠을 자는데 급급했었다. 한 시간 가량 되는 출근 혹은 등굣길을 차를 몰고 다녔다. 세 시간의 학교 수업을 마치고 회사로 돌아오는 길은 대낮의 강렬한 태양빛을 반사하는 새하얀 시멘트가 깔린 고속도로였다. 이 도로는 나에게 고속도로 위의 졸음운전이라는 아찔한 경험을 안겨주었는데,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살아있음에 감사함을 느낀다. 졸음이 밀려와 졸음쉼터가 나오기를 기다리며 허벅지를 꼬집고, 고래고래 소리치며 노래를 불러도 잠이 달아나질 않았다. 한여름의 뙤약볕 아래 달리는 차마저 몇 없는 도로 위에서 잠깐 눈이 감겼던 거 같다. 반자율 주행 자동차도 아니었기에, 15년 이상 탄 하얀 카니발(가끔 도로 한복판에서 엔진이 꺼지기도 하는)과 함께 생을 마감할뻔했다. 이지경에 이르니 주변에선 하나둘 걱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맘때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너 그러다 죽어."였다.


대학시절부터 꾸준히 가져온 잦은 술자리가 분명 몸을 망가뜨리는데 큰 몫을 했다고 자조적으로 말하곤 했었다. 이유를 알면서도 사회생활의 희로애락을 나누기 위해 술자리는 빠지지 않았다. 적당히 마셨으면 좋았을걸, 다음날 한껏 게워낸 후 살겠다고 먹던 국밥은 허한 속을 달래주었지만 금방 허기가 졌다. 이러한 굴레가 계속해서 일상을 지배하도록 두었더니, 몸에서도 신호를 보냈다. 역류성 식도염이었다. 가슴이 타들어갈 듯이 속이 쓰렸고 속이 비거나 차면 어김없이 쓰라림을 감내해야 했다.


충분치 못한 수면시간도 문제가 되었다. 하루 3-4시간에 족하는 수면시간으로 시력은 급격히 나빠졌고, 면역력은 바닥을 치고 있었다. 한날은 열이 무섭게 올라 한쪽 귀에서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혼자 있는 자취방의 공기는 겨울의 한기와 바닥난방의 열기가 뒤섞여 하염없이 눈물을 쏟아내도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잃어버린 퍼즐을 찾아야 했다. 할 수 있는 것부터 하나둘 정리를 시작했다. 다행히 학교는 졸업했지만 직장이 집에서 너무 멀었고, 주말엔 엄마 가게 일도 도와야 했다. 엄마가 지내는 서울로 거취를 옮겨 함께 지냈다. 퇴근 후 집에 오면 조금 쉴 수 있었고, 쉼 덕분에 새벽의 가게 마감을 돕는 일도 크게 버겁지 않았다. 스스로 버겁다 느끼는 것들의 무게를 줄이니, 쉬이 지치거나 작은 일에 짜증을 내는 일도 적어졌다.


회사도 어느 정도 적응을 했기 때문에 모든 회식을 내가 반드시 참여해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여 필요에 따라 혹은 희망 시에 참여했고, 퇴근 후 남는 시간을 이용해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귀한 인연들을 다시 만났다. 그렇게 인연의 실타래를 되감아 졸업 후 만남이 뜸했던 고등학교 친구들과도 활발히 연락했고, 잃은 것 투성이라고 생각하던 내 모습들도 차츰 되찾아갔다.


엄마와 함께 지내다 보니 식습관이 자연스레 변화했다. 짜고 매운 자극적인 음식들 위주로 식사를 했었던 전과 달리, 재료 본연의 맛을 느끼는 음식들로 배를 채웠다.(예를 들면 슴슴한 배추전과 냉이된장국 같은 집 밥 st의 밥상) 시간이 흐를수록 엄마의 입맛을 닮아갔다. 매운 음식이 먹고 싶을 땐 매운 떡볶이를 찾는 대신 청양고추를 한 움큼씩 넣어 알싸한 매운맛을 내었고, 엄마가 좋아하는 맛을 내기 위한 요리를 했더니 서서히 짠 기가 줄어갔다. 다 먹고 난 후의 불쾌한 포만감이 줄었고, 소화도 훨씬 잘되어 기분 좋게 식사가 마무리되었다. 제때 잘 챙겨 먹은 끼니는 불필요한 야식을 줄일 수 있게 도와줬다. 더불어 식사 후의 기분까지 좋아지게 만드는 '맛'에 대해 흥미가 생겨 요리에도 재미를 붙이기 시작했다. 긍정적인 변화의 시작이 어디였는지 정확히 알 순 없지만, 확실한 건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것이다.



진정 내려놓는 행위를 피부로 느끼게 해 준 건 배낭여행을 떠났을 때였다. 최소한의, 꼭 필요한 물건들로 짐을 꾸린다는 게 처음엔 쉽지 않았다. 미지를 향한 불확실함은 필요할지도 모를 물건으로 자꾸만 가방의 무게를 늘게 했다. 여행지에 가서도 평소대로라면 닥치는 대로 사들였을 기념품들도 신중에 신중을 기했다. 내가 사는 물건들이 고스란히 내 어깨를 짓누른다는 게 마치 내 삶의 무게같이 느껴졌었다. (길지 않은 날들이었지만 하루를 꼬박 내 몸 반만 한 배낭을 메고 다녔기 때문에 인생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무언가 깨닫기 위해 떠났던 여행길에서 배운 건 1. 내가 감당할 정도의 짐만을 짊어질 것. 과 2. 걷도 또 걸으며, 수많은 풍경들을 지나치며, 수없이 많은 내 안의 나와 대화할 것. 이었다. 감사히도 하루의 마무리로 휘갈겨 쓴 일기는 훗날 방황하며 헤매는 나의 중심을 잡아주는 훌륭한 자양분이 되어주었다.


정신없이 살아온 지난 20대를 돌이켜본다. 당시의 내가 지금의 나와 대화를 나눌 수 있다면 나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두려워하지 말고, 아직 늦지 않았으니 더 망설이지 말고 많이 부딪혀 보라"라고. 여기저기 부딪히고 뭐든 다 짊어지려 했던 그때의 내가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내려놓기'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이리라. 올랐기에 내려갈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격렬한 회한의 감정들이 몰아친 후 반드시 자신을 되돌아보고 격려해 주자. 끝내 내가 이루고자 하는 경지에 도달하게 될 테니 조바심일랑 잠재우고 우리, 속으로 하이파이브를 외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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