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춰온 천진을 발산해 당신의 입가를 간지럽힐 수 있다면,
계절은 빠르게 움직인다. 아니, 계절은 꾸준히 바뀌고 있었고 나는 가끔 알아차린다. 도시에서의 일상은 쳇바퀴 돌듯 반복해서 빠르게 돌아간다. 때문에 새싹이 돋아나고 풀잎들이 우거지고 나무의 잎들이 짙은 녹색으로 변해가는 것을 알아차리기란 쉽지 않다. 그저 가벼워지는 사람들의 옷차림을 보거나, 점심시간에 밖에 나갔다 들어온 후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을 보고 나서야 여름이 오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시간은 점점 빠르게 흐르고 하루를 돌아보는 날들은 점차 줄어, 다가오는 날들을 맞이하기에 정신이 없다. 가끔 여유가 생겨 "내가 지금 잘 하고 있는 걸까?"라는 생각이 들 때, 잠시 멈춰야 한다. 지금까지의 발자취를 되돌아 보고, 앞으로의 이정표를 무엇을 삼을지 다시 한번 확인해야 한다. 멀리 가기 위해선 점검이 필요하듯 우리에게도 재정비의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그렇다면 한번 살펴보자. 잘 먹고 잘 사는 일이 인생에 있어서 성공의 기준이 된다면, 혹은 그것이 우리가 향해 가고 있는 종착지라면, 나아가 비유의 미덕을 빌려 부와 가난으로 표현할 수 있다면, 어떨까?
도시에서의 삶이 시간의 흐름을 알아차리기엔 불분명함을 갖고 있다 해도 사계절이 존재하는 나라에 살다 보니, 시간의 흐름을 계절의 변화로 느끼는 게 자연스러워졌다. 올해는 유독 비가 많이 오는 것 같아 여름도 조금 더디게 오는듯해 시원한 5월을 보냈다. 6월이 되면서 해가 더 길어졌고, 일상 시간을 보낼 땐 에어컨을 켜는 곳도 늘어났다. 여름이 오고 있다는 분명한 신호다.
해마다 여름이면 우리 가족은 가장 덥다는 7월 말~8월 초에 열 일 제쳐두고 여름휴가를 떠난다. 이 시기엔 대부분의 회사들도 휴가를 내기 때문에, 도시에서 장사하는 엄마의 식당도 자연스레 손님이 줄어든다. 덕분에 가족들이 함께 몇 박 며칠을 함께 보낼 수 있는 귀한 날이다.
행선지를 정해놓고 떠날 때도 있지만, 우리(언니와 나)가 크면서부턴 자유여행이 많아졌다. 숙소조차 정하지 않은 채로 도시를 탈출해 무작정 피서지로 떠난다.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하여 간단하게 텐트를 하나 챙긴다. 동해에 도착해 해안 도로를 거닐다 보면 어김없이 우리들 맘에 드는 정박지를 발견한다. 숙소를 잡아 가격을 흥정하고 짐을 풀어논 후 바다로 달려가 해수욕을 즐긴다. 바닷물에 풍덩 빠져 수영도 하고, 발에 밟히는 조개를 잡아 건지기도 하고, 물안경을 쓰고 물속을 탐험하다 보면 어느새 한여름의 더위는 잊힌지 오래다.
세월이 점점 흘러 바쁘게만 흘러가도록 인생을 내버려 두어선 안된다는 생각으로, "이제부터 우리의 여름휴가는 가까운 해외를 시작으로 세계 곳곳을 누벼보자!" 라며 마음먹었다. 그리하여 평소엔 엄두도 못 내었을 나흘이라는 시간을 내어 휴가를 다녀왔다.
세계를 누비자던 당찬 포부를 계획한지 겨우 일년이 채 지나기도 전에 코로나가 퍼져 여행을 가지 못하고 있지만, 꽤 괜찮은 시도였고 다음이 기대되는 여행이었다. 생각해 보면, 그때가 아니었으면 시도조차 해볼 수 없었을 일이다. 번뜩 생각이 떠올랐을 때, 그 생각을 공유하고 의견을 나눈 다음, 각자의 일정을 확인한 후 여행을 떠나기로 확정을 짓기까지의 그 과정은 걱정한 것보다 어렵거나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다 함께 시간을 내어 떠나는 일이 무척 어렵게만 느껴졌었는데, "나와 가족들을 위해 시간을 내보자." 하는 마음으로 가게를 쉬기로 결정한 후엔 모든 것들이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그땐 그랬다. 지금이 안되면 안 되는 것처럼 절박했기 때문에 모두 한마음 한뜻으로 서로의 귀한 시간을 내어 떠날 수 있었다. 이 계절이 아니라면 또 언제 쉴 수 있을지 몰랐고, 부모님의 나이를 고려한다면 앞으로 해외여행은 더 어려울 것이었고, 지금이 아니라면 시도조차 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공포도 있었다.
그 덕분에 평생 간직할 수 있는 소중한 추억을 얻었다. 이 추억이 앞으로의 삶에 크나큰 원동력이 될 거란 걸 안다. 이 정도면 나, 잘 살고 있는 것 아닐까?
"이 정도면 잘 살고 있는 것 아닐까?" 하는 마음에서 시작해, "이쯤 되면 나 성공한 것 같아!"싶은 경험들을 떠올려 본다. 마치 마음이 부자가 되는 순간이 있다. 이때만큼은 억만장자 안 부럽고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어있다. 그러한 순간들에 대해 나눠보면 어떨까? 부끄럽지만, 감춰온 나의 천진을 발산시켜 당신의 입가를 간지럽힐 수만 있다면 기꺼이 그리하려 한다. (당신은 어떤 순간에 마음이 꽉 찬 기분을 느끼는지 궁금하다.)
봄이 오자 시골에 계신 할머니께서 손주 손녀들 왔다고, 기쁜 마음에 갖은 봄나물들을 챙겨주셨다. 덕분에 두릅이며 엄나무순, 돌나물, 냉이, 쑥, 부추, 머위나물 등등을 부족함 없이 식구들과 나눠먹을 수 있었다. 사실, 마트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는 것들이지만 파는 것과는 확연히 맛이 다르다. 식감이 훨씬 부드럽고, 향이 강해 입안 가득 봄 내음을 맛볼 수 있다. 또, 머위나물을 다듬는 일은 여간 귀찮은 게 아니다. 이 귀찮은 일을 손톱 아래가 시꺼메질 정도로 하고 나면 껍질 벗은 반질반질한 머위나물이 소복이 쌓인다.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니라, 오랜 시간 지지고 볶아 들깨가루로 마무리해 줘야 우리가 먹을 수 있는 나물 반찬이 된다. 곳곳에 나눠주고도 큰 반찬통만큼 남아 우리 집 냉장고에 있는 모습을 보면, 그렇게 뿌듯하고 마음도 빈틈없이 꽉 찬 느낌이 든다. 한편, 최근 알게 된 경상도식 콩가루 부추 찜과 콩가루 마늘종 찜은 부산에서 나고 자란 엄마와 외할머니의 입맛에도 잘 맞아 뿌듯함이 배가 되었다.
명절이나 집안의 경사가 있는 날이 아니면 구경하기 힘들었던 한우 갈비찜. 가격도 가격이지만, 갈비 핏물을 빼고 불순물 제거를 위해 한번 데쳐내고, 손질된 야채를 넣고 정성껏 오랜 시간 끓여내야 하는 어마어마한 시간과 노력이 들어가기 때문에 더 차려내기 힘들었던 소갈비찜을 한솥 끓여놓고 상에 차려낸다. 서로 양보하느라 못 먹지 않고, 앞사람의 빈 갈빗대를 보고도 경쟁심리를 느끼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은 느껴본 사람만이 알 것이다.
김장철이 되면 배추 가격이 금값이라 칭할 만큼 올라간다. 김치가 금(金) 치가 되어도 걱정이 엎을 만큼 김치냉장고 안에 묵은지가 그득그득 쌓여있다면, 그때만큼은 김치찌개가 제일 값진 음식이 된다.
바쁘다는 핑계로 빨래 바구니 안에 빨랫감들이 잔뜩 쌓여있어도, 내일 입을 옷 걱정은 안 해도 될 만큼 기본 티, 편한 바지쯤은 여유 있게 준비되어 있는 나의 옷장은 든든하다.
내가 좋아하는 걸 할 수 있는 시간을 나에게 주는 것. 예를 들어 저녁 6시부터 두 시간 동안은 주파수를 맞춰 내가 좋아하는 '배철수의 음악캠프'를 틀어놓고 할 일을 한다든지, 하루 중 가장 좋아하는 시간인 자기 전 샤워 후 로션을 바르는 순간을 즐긴다든지 등의 지극히 일상적이면서 다분히 취향 저격인 시간을 보내는 것이 좋다.
내일에 대한 걱정 없이 혹은 기대를 안고 잠자리에 드는 것.
눈치챘을지 모르지만, 메인으로 쓴 사진은 친구네 자두밭에 달린 자두 사진이다. 작년 이맘때 즈음 찍어둔 것인데, 날이 점차 더워져 따가운 햇살을 잔뜩 받으면 자두가 빨갛게 익는다. 먹음직스럽게 익어 갓 딴 자두를 한 입 베어 물면 진한 자두 향이 퍼진다. 제철에 나온 과일을 바로 그 자리에서 먹을 수 있는 소중함이란.
이렇게 적다 보면 내가 세상 제일 부자가 된 것 같다고 느낄 때는 '정성껏','귀한','걱정 없는','소중한 사람과 함께', - 대체적으로 이러한 단어들로 문장을 이루는 것 같다.
이번 글을 마치며 하고 싶은 말은, 이 글을 쓰고 지우는 지금 이 순간에도, 지나간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붙잡을 수 없는 시간을 후회로 채우지 않기 위해선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
최근 여러 가지 많은 일들이 엎친 데 덮쳐 최소한의 잠을 자며 버텨왔다. 그러던 중, 같이 일하시는 분께서 돌아오는 주말 이틀을 다 못 나오신다는 연락을 받았다. 평소라면 걱정이 앞섰겠지만, 오히려 잘 됐구나 싶었다. 이 기회에 우리도 좀 쉬자 싶어, 엄마와 언니를 꼬드겨 내일 당장 바다가 보이는 곳을 떠날 것이다. 이렇게 훌렁 떠날 수 있을 날이 얼마나 더 있을지, 한 치 앞을 모르는 세상 아닌가. 이번만큼은 오늘의 행복을 내일로 미루지 않는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되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