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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외이례 Jul 27. 2021

[요리일지] 요리조리 움직여서 여름을 담아내다.

무더운 여름날을 요리로 기록해본다면.

"나는 오늘"로 시작하는 일기를 써본 적이 있는지요?

 아주 오래전, 난생처음 생긴 나의 새 책상에 앉아 빈 공책을 펴고 한참을 고민했었다. 나의 문장은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오늘"을 서두로 잡고 써 내려가야만 비로소 일기가 써질 것 같은데, 반복되는 꾸짖음으로 인해 시작부터 막혀 전전긍긍하며 한 글자도 적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꾸짖음의 이유인즉, 내가 쓰는 일기라는 건 "내"가 주체가 되어 쓰는 "나"의 일기장이기 때문에 생략이 가능하고, 일기의 특성상 "오늘"있었던 일에 대해 서술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실상 잠재적 의미의 반복에 해당되므로 제발 좀 생략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수업이 끝나고서야 나눠주던 일기장을 돌려받고 나면, 빨간색 수성 팬으로 적힌 글씨들이 어찌나 궁금하고 기다려졌는지 모른다. 그날 일기의 말미에는 어떤 표정이 그려질지, 담임 선생님이 직접 달아주는 코멘트는 어떤 내용일지가 몹시 궁금해 집에 갈 때까지 참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읽어봐야 직성이 풀리는 어린이였다. 그럴 때면 도입부부터 빨갛게 그어진 두 줄이 어찌나 야속하던지. 기필코 다음번엔 지적받지 않으리라 다짐했었다.


 그러다 보니 어려움이 생겼다. 쓰지 않아야 한다는 사실에 집착해 쓰면 안 되는 표현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지적을 받았던 단어들로 온통 지배되버린 나의 머릿속은 혼미했고, 특별할 것 없는 하루 일과를 떠올리면 딱히 기록할만한 일들은 없었던 것만 같아 정말 난감했다. 직관적으로만 적어야 할 것 같았던 나의 일기장은 그렇게 숙제가 되었고, 어린 날의 기록이 좀 더 남아있었더라면 더 좋았을 거라는 아쉬움을 남겼다.

 

 이제는 일기를 쓰지 않는다. 다만, 기록에 대한 욕구는 다르게 남았다. 사진과 영상을 매일 별다를 것 없더라도 찍어 남긴다. 같은 공간, 같은 사람이어도 사진에 담기는 공기와 분위기 탓인지 색다른 시각으로 나의 일상을 탐닉할 수 있어 새롭게 느껴질 때도 왕왕 있다. 가끔 코멘트가 달고 싶은 날에는 메모장을 열어 떠올린 것들을 토해내듯 적어낸다. 또는 순간순간 떠오르는 영감들을 키워드 위주로 적어내고, 자기 전 침대에 누워 그 순간을 복기해 문장을 더한다. "00월 00일 0요일"로 시작하면 난 또다시 막막해질 거란 걸 알기에, 자신을 틀에 가두지 않으려 노력한다.

 

 그런 의미에서 요리조리 찍어두었던 사진들을 토대로 나의 좌충우돌 요리 일지를 적어보려 한다. 일이 늦게 끝나 밖에서 외식 한번 하기 어려운 요즘, 배달음식은 지겹고 자극적인 맛도 질려 이젠 제철 음식, 재료 본연의 맛이 그리워 무작정 몸으로 때우기 시작한 나는 지금 요리 전성기를 맞이한 듯하다. 사진첩에 요리한 음식 사진들로 가득한 걸 보면 말이다.



1. 애호박 찰보리 전


엄마가 텃밭에서 기른 호박과 고추 / 부침개 반죽 / 동그랗게 부쳐본 애호박보리전

 엄마의 작은 정원에서 자라난 녀석들이 하나, 둘 모습을 내민다. 갓 따온 연한 애호박의 씨를 제거해 도마에 올려놓고 나무 방망이로 탕! 탕! 내리쳐 단맛을 퍼뜨린다. 여기에 열무김치를 담글 때 쓰고 남은 찰 보리밥을 넣고, 부침가루와 고추를 송송 썰어 반죽한 후 기름을 두른 프라이팬에 부쳐주면 된다. 은근한 불로 한참 익혀주면 보리의 고소함과 호박의 달달함이 어우러져 낯선 맛이지만 꽤 매력이 있다.


 2. 오이지 무침과 물오이지


 항상 요맘때쯤 장마를 전후로 마트에는 '오이지 오이'라 칭하며 50개씩 묶어 판매를 한다. 상품가치가 조금 떨어지는 오이들을 묶어놓은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것으로 오이가 많이 나는 계절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트에서 오이지 오이를 50개씩 두통을 사서 엄마와 나눴다. 천일염을 한 대접 붓고, 팔팔 끓는 물을 부어 오이를 삭힌다. 상온에 두고 보관한 후, 그 물을 다시 끓여 한차례 더 붓는다. 오이가 제법 삭혀져 쭈글쭈글해지면 냉장고에 보관해두고, 조금씩 꺼내 무쳐먹거나 물 오이지를 해 먹는다. 오이지무침은 삭혀낸 오이를 찬물에 30분 정도 담가두어 짠기를 빼낸 후 마늘, 고추, 파, 고춧가루, 참기름, 참깨를 넣어 무쳐낸다. 반대로 물 오이지는 짠기를 빼지 않고 흐르는 물에 씻어준 뒤 오이를 썰어놓은 통에 찬물을 붓는다. 마늘, 고춧가루, 파, 고추, 식초, 설탕을 넣고 냉장고에 두어 숙성시키면 오이지에서 나온 짠기가 어우러져 간을 맞춘다. 더운 여름, 뜨거운 국 대신 시원하고 감칠맛 나는 물 오이지 반찬 하나 있다면, 훌륭한 한 끼 식사를 할 수 있다.


3. 시댁에서 보내온 여름감자


 생각해 보면 결혼하기 전엔 감자가 여름에 나오는 채소인 줄도 잘 몰랐다. 마트에 가면 늘 있었기 때문에 재배되는 계절에 대해 별다르게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일까? 감사하게도 농사를 지으시는 시부모님을 만나 선물 같은 재철 재료들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 햇감자를 산지 직송하여 먹게 되다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 아직 감자 삶는 재주는 많이 부족하지만 감자에 분이 나게 삶으려면 물을 넣고 팔팔 끓이다가 젓가락으로 쿡- 찔렀을 때 쑥-들어가면 물을 버리고 불을 아주 약하게 틀어 남은 수분이 증발하게 두어야 한다. 그래야 분이 폴폴 나는 감자 찌기 완성!


4. 한번 만들 때 한대야 정도는 해 둬야 하는 우리집 전통 감자샐러드


박스째 들어온 많은 감자를 해결하기에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감자샐러드를 만드는 것이다. 잘 삶아진 감자와 달걀을 으깨 마요네즈에 버무린다. 그러면 감자샐러드 베이스가 완성이 되는데, 절인 야채들과 섞이기에 너무 뜨겁지 않을 정도로 식혀주어야 한다. 오이, 당근, 양파를 소금에 한참 절여 둔 후 수분이 제법 빠져나오고 숨이 죽으면 짤 보자기에 넣고 꾹-짜준다. 잘게 다진 소고기까지 볶아서 넣어준 뒤 잘 섞어주면 완성이다. 의외로 절이고 짜는 과정이 손이 많이 가, 한번 만들 때 양껏 만들어 놔야 마음이 놓인다. 빵에 발라도 먹고 가끔 반찬으로 식탁에 올라오기도 하는데, 여기저기 나눠서 먹고 나면 막상 먹을 양이 얼마 되지 않아 금방 사라져버린다.


5. 여름의 맛, 문어샐러드


 이탈리안 가정식을 배웠던 적이 있다. 위의 사진과는 사뭇 다른 모양이었지만, 내 식대로 해먹다 보니 입맛에 따라 모양도 조금 변화가 생겼다. 올리브유와 마늘, 바질, 그리고 소금을 베이스로 맛을 내는 샐러드다. 바질의 향은 여름의 향과 닮아있다. 평소라면 어색했을 향이 더운 여름과 잘 어우러져 입맛을 돋운다. 물에 데친 문어를 얇게 썰어 올리브유, 마늘, 소금, 바질을 넣어 재운다. 준비한 채소들은 모두 채칼로 얇게 썰어 준비한다. 오이, 당근, 노란 호박, 비트, 레디쉬 등을 얇게 썰었으면, 양파를 얇게 썰어 찬물에 담가 매운 기를 빼낸 후 꼬옥-짜낸다. 이 샐러드의 포인트는 바로 데친 감자가 들어간다는 점이다. 감자 혹은 푹 익혀낸 병아리콩을 넣어도 좋다. 포슬포슬한 식감과 야채의 아삭함 그리고 문어의 쫄깃함으로 입안에서 식감 잔치가 열린다.


6. 잡생각 떨칠땐 탕탕 돈가스


 신나는 일이 없을까? 최소한의 재미만을 느끼며 사는 것도 지친다. 그 좋아하던 영화관도 못 가고, 그 좋아하던 수영도 못한 지 2년이 다 돼간다. 미친 척 훌쩍 떠났던 동해 여행은 돌아오는 길이 마치 지옥 같았다. 2시간이면 바다에 도착할 수 있는 서울-양양 고속도로가 서울로 돌아오는 차량들로 인해 꽉 막혀버린 것이다. 결국 5시간가량이 걸려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무도 없는 곳으로 훌쩍 떠나는 것마저 쉽지 않아졌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언제까지 이 상황이 계속되는 걸까? 이런 상황에서 아이를 가지려 하는 게 과연 아이에게도 좋은 일일까? 지금의 밥벌이가 언제까지고 밥벌이가 되어줄까? 등의 생각들은 꼬리의 꼬리를 물어 끝이 나지 않는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될 고민까지 사서 하게 될 때, 뭔가 해야 한다. 몸을 움직여 생각의 고리를 끊어내려 한다.


마트에서 커다란 등심 한 덩이를 사와 적당한 크기로 자른다. 언제 사두었는지 모를 요리용 망치로 고기를 탕! 탕! 내리친다. 혹시 모를 층간 소음에 대비해 도마 아래에 행주를 여러 겹 깔아도 보고, 무릎 위에 올려놓고 쳐보기도 한다. 이렇다 할 방법들을 동원해 반복해서 내리치다 보면 손바닥 만했던 고깃덩어리가 얇고 넓게 늘어나있다. 이제 밀-계-빵 순서로 튀김옷을 입혀주면 된다. 밀가루에 카레와 후추를 섞어 준비하면 고기의 잡내를 없앨 수 있다. 왼손으로 밀가루를 묻히고 계란 물에 빠뜨린 뒤 오른손으로 계란 물에 들어간 고기를 건져내 빵가루를 꾹꾹 눌러 입혀준다. 이런 식으로 반복되는 과정을 거쳐서 만들어진 돈가스가 한쪽에 수북이 쌓인 것을 보면 꽤 뿌듯한 마음이 든다. 냉동실에 얼려두면 한동안은 반찬 걱정 없이 간편하게 꺼내 튀겨먹을 수 있다.




멋에 민감한 시기인 질풍노도의 사춘기 시절,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이 늘 고민이었다. 송골송골 이마에 땀이 맺히는 여름이면, 이른 아침 고데기로 열심히 펴놓은 머리도 오래가지 못했다. 늘 한쪽 머리칼이 구불구불 말려 올라가는 게 어찌나 열불이 터지던지! 덕분에 꽤 오랫동안 여름을 좋아하지 않았다. 무더위에 에어컨도 없는 우리 집은 집에 오자마자 찬물 샤워를 해야만 시원해졌다. 등굣길 버스 안은 에어컨을 켜도 어찌나 찜통인지, 게다가 출근시간도 겹쳐 버스 안은 늘 사람들로 꽉 차있었다. 더워 땀이 난 팔이라도 서로 닿으면 불쾌감은 하늘을 찔렀다. 그땐 그랬다. 지금은 사람들과 피부가 닿을 일은 매우 드물어졌지만, 그때의 그 살갗이 닿는 끈적거림은 당시 예민한 시기와 더해져 여간 미간을 찌푸릴만한 일이 아니었다. 뭐하나 좋아할 만한 구석이라곤 하나도 없다고 느껴지는 여름이었다.


점차 나이 들어감에 따라 곱슬거리던 머리칼도 좋아지기 시작했다. 구불구불 제멋대로 뻗쳐버리는 머리카락을 만지고 있으면 재미난 놀이를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가끔 사진에 우스꽝스럽게 나오기도 하지만, 훗날 보면 또 추억이 되어있더랬다. 자연스러움을 사랑하게 되면서 여름이 좋아졌다. 이제는 이토록 더운 날 뜨거운 고데기를 머리에 갖다 대지도 않거니와, 습한 날씨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나의 머리칼은 모자를 씌워주면 그만이었다. 더군다나 여름은 공짜 수영을 할 수 있는 계절이 아니던가? 넓게 펼쳐진 아무 바다나 찾아가 풍덩 빠지면 그 자리에서 몇 시간이고 물속 구경을 할 만큼 자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그래서 더욱이 여름은 나의 마음을 부자로 만들어주는듯하다. 자연이 선물해 준 나의 자유는 거친 삶도 이렇게 유영하듯 살아내도록 마음 먹게 만든다.


앞으로 나에게 몇 번의 여름이 남아있을지 모른다. 게다가 요 며칠 계속되고 있는 무더위는 제발 끝났으면 좋겠는 마음이다. 하지만 여름은 미워하지 않기로 한다. 그동안 몰라줘서 미안한 여름의 아름다움을 몇 주간의 무더위를 이유로 놓치고 싶지 않다. 여름아, 내년에도 잘 부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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