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evil is in detail. - 나는 페미니스트 인가?
"The devil is in detail./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 (사전적 의미) 문제점이나 불가사의한 요소가 세부사항 속에 숨어있다는 의미의 속담. 어떤 것이 대충 보면 쉬워 보이지만 제대로 해내려면 예상했던 것보다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아부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언가는 해낼 때는 철저하게 해야 한다. 세부사항이 중요하다.
난 말하기를 좋아한다. 이따금씩 "왜 귀가 두 개이고, 입은 한 개 인지 아느냐? 말로는 실수를 낳기 쉽고, 주워 담을 수도 없다." 등의 뼈를 후려치는 글을 보면 뜨끔 하기도 한 1인이다. 하지만 세월이 조금 더 귀를 열게 만들어 주었다고나 할까? 실수로 인한 반성들이 나로 하여금 두 개의 눈으로 다름을 보려 하고, 두 개의 귀로 담으려 하고, 다양함에 대한 이해로 걸러진 것들을 한 개의 입으로 내보내려 노력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작가-
우선 이 브런치 작가 섭외가 왔을 때 '익명이라는 것에 기대 내 목소리를 내어봐? 아니야, 글이라는 것은 말과 달리 길이길이 남을 테고, 신중하게 생각해봐야 할 것 같아.' 그런데 맘 한편에 어떤 지속적 두드림이 던져진 주제에 대한 자연스러운 메모로 이어졌다.
첫 프로젝트가 "페미니즘"이라 바로 드는 생각은 '굉장히 할 말이 많겠군'.
"욕 좀 꽤 들을 각오로 임해야 하겠군." 어떤 식으로 풀어내든 다양한 사람들 살아가는 그 틈에 나 또한 살아가고 있고, 생각이 충돌할 때 나이스 하지만은 않은 피드백을 듣게 될 수 도 있음을. 참으로 무겁다.
그 참으로 무거운 마음을 가지고도 왜 이야기하려는 것이 많을까?라고 묻는다면 내 어린 시절로 돌아가 차별인지도 모르고 당해내야만 했던 것들 그리고 성으로 인해 차별을 느낀 순간들이 강산이 한두 번 바뀌는 세월을 지나고 나니 많이 개선되었더라. 누군가는 그 불편한 진실들을 위해 싸워내고 당연한 권리들을 조금씩 찾아오지 않았나 해서이다. 적어도 난 내가 겪어온 일련의 일들이 페미니즘을 외치는 이들로 인해 제도적인 면에서도 그리고 인식적인 차원에서도 많이 달라졌다고 생각한다. 분명 여전히 개선되어야 할 부분들이 존재하며, 세세한 부분들까지도 무시가 아닌 관심으로 세상 밖으로 꺼내려는 이들에게 일말의 감사를 표하며 나 또한 다음 세대들을 위해 관심을 내비쳐야겠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나의 탄생-
나는 84년생이다. 남아선호 사상이 이어져 오던 80년대, 태아 성별 식별이 가능한 초음파 기기가 국내에 상용화되면서 여아 낙태가 빈번히 이뤄지는 그 시대에 태어났다. 성비 불균형이 사회적 문제로 떠오르기 전까지 많은 여자아이들은 세상의 빛조차 보질 못했다. 그리고 그 불균형에 대한 지속적인 우려로 인해 관련 의료법이 제정되었지만 면밀함이나 세심함의 부족함으로 인해 추가적인 개정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내가 중학교 3학년이 된 해에 남녀차별을 금지하는 법안이 제정되고 이후 여성부가 출범하였다. 성평등을 위한 제도적 장치가 마련됐음에도 불구하고, 제도적 차별이 사라진 시대에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성차별적 요소를 그린 "82년생 김지영", 나 역시 한 때 대한민국을 달군 그 작품이 보여주는 한국 여성들의 보편적인 일상을 완벽히 체감한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시절 여자로 태어난 난 보편적임을 가장한 차별적인 일상들을 태어남과 동시에 감당해내야만 했다. 그때는 단지 불편하다고만 느꼈던 경험들이 왜 지금에 와서야 성차별이었다고 인지하게 된 것인지 그 씁쓸함을 시작으로 곰곰이 생각해 본 시간들이 있었다. 이처럼 잊히지 않는 어릴 적 불편한 기억들에 대해 이제는 차별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어쩌면 시대적 변화를 자연스럽게 겪으면서 학습된 결과인 것 같다.
학습을 통한 깨우침과 그 씁쓸한 현실-
우리가 흔히들 말하는 "여성성 강조" 이 것조차 하나의 성차별이라고 느끼게 된 것은 어느 날 미디어에서 성평등에 관련한 프로그램을 시청한 후였다. 내가 차별이라고 생각조차 하지 않았고, 당연한 것들이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는 허탈함과 분노가 천천히 밀려왔다. 그리고 그 쌓인 분노들은 어느새 나에게 불편한 기억을 심어준 이들을 곱씹게 만들었다. 친척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반찬을 나르는 시중은 꼭 여자아이들에게만 시키던 어른들, 꼭 티가 나게 남자아이들에게만 더 세뱃돈을 많이 쥐어주던 할아버지 할머니, 엄마의 성을 따르고 싶다는 말에 참 희한한 놈을 다 보겠다는 식으로 핀잔을 주던 어른들, 치마 교복이 불편해 체육복 바지를 입고 있노라면 엉덩이나 뺨을 내리쳤던 선생님, 암묵적으로 약속이나 한 듯 성적 수치심을 자아내는 행동을 요구한 교수님들, 단지 신체적으로 약한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기회조차 주지 않았던 회사 대표. 이들은 과연 왜 그랬던 것일까? 나의 결론은 그들이 무지해서이다.
예전과 달리 남자아이도 핑크색을 입히고, 여자아이도 파란색 셔츠를 입혀보내며 성역할을 구분 짓지 않고 다양하게 경험하길 바라는 오늘날의 젊은 부모님들처럼 교육되지 않았던 그들은 그들이 아는 것이 전부고 행해야 하는 순리 같은 것으로 믿었던 것 같다.
변화 속의 나-
하지만 지금은 많은 것들이 변화했다. 성역할을 구분 지어서 아이들을 가르치지 않으며, 까다로운 과정이 있긴 하지만 엄마의 성을 따르는 제도적 장치도 생겨났고, 치마였던 교복을 바지로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이 있고, 직업군에 있어서도 성별로 제약을 두는 경우는 많이 사라졌다. 가령 교과서에서 조차 직업군을 그림으로 설명하려 할 때 남자 간호사, 여자 변호사, 여자 경찰, 남자 승무원 등등 일반화시키지 않으려는 노력이 엿보인다. 초창기 페미니즘이 나아가는 방향과 맞닿게 여성의 권리를 남성의 권리와 동등하게 끌어올리기 위해 노력한 결과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는 단순 남녀평등을 위한 운동을 넘어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어날 수도 있는 역차별도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견들이 분분하고, 공공연히 자유로운 토론의 장이 마련되기도 한다. 하여 이러한 변화들 또한 나로 하여금 일련의 케이스들 다시 돌아보게 만들었다.
다행스럽게도 어릴 적 부모님은 나에게 여성성을 강조하진 않았지만, 오빠에게는 남성성을 강조하곤 하였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오빠 입장에서는 역차별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만한 부분이다. 2022년 현재 대한민국 여성 국회의원은 전체의 20% 밖에 되지 않으며, 국회와 입법은 오랫동안 기득권층이었던 남성 중심의 리그이다. 그 구성원들이 성범죄 관련 제도적 처벌을 솜방망이질 하고 있는 동안 여자는 범죄의 대상이 되어 밤늦은 시간 거리에서 피해를 입어도, 그러게 여자가 왜 늦은 시간에 돌아다니느냐며 핀잔을 받기 일쑤였다. 그리고 가해자에게 주어지는 처벌은 사회적 인식과 괴리가 커, 여성은 스스로 조심하지 않으면 그 누구도 나를 지켜주지 않는다 생각하게 되고, 스스로의 활동에 제약을 거는 피해자가 된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하지만 과연 여성만이 피해자가 되는 것인가? 여성들이 밤거리를 돌아다니기 너무 무서워서 여성만을 위한 경비대를 세워달라고 한다면, 늦은 밤 한 여성과 같은 버스에서 하차한 남성은 “앞으로 앞질러가야 오해받지 않으려나? 조금 더 기다렸다 천천히 가야 하나?” 로 머릿속이 복잡한 와중 힐끗힐끗 돌아보는 두려운 시선 앞에서 존재 자체만으로 여성을 불편하게 한 것에 대한 미안함과 당황스러움을 감내해야 하는 피해자가 된다. 이와 같이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고, 모든 것에 있어서 단순하게 접근하여 여성차별이라고만 할 문제는 아닌 것이다. 모든 문제에 있어서 양면이 존재하고, 더 나아가 구체적으로 접근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분명 알게 모르게 생활 곳곳에 스며든 부조리한 것들이 여전히 존재하는 것은 틀림이 없다고 생각한다. 남녀평등을 외치는 이들도 모든 것들이 똑같이 평등해야만 한다고 고집한다면 가령 "남녀 성비", " 남녀차별", "남남북녀" 등등 단어에서만 찾아보듯 왜 남자가 항상 먼저이냐고 이것조차 바꾸자고 하면 어떻게 바꿀 것인가? 녀를 앞으로 두면 역차별이 될 테고, 그럼 글을 세로로 세워 함께 나란히 할 것인가? 그럼 하늘이 되는 글자는 누가 가져갈 것인가? 이렇듯 모든 것을 이분법적으로 나누어 극으로 평등을 외치는 데에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페미니스트 되기-
갑자기 이 글을 쓰면서 궁금해졌다. 대한민국에서 80년대에 태어난 나, 남녀평등에 대한 인식의 변화 중심에서 나만 이렇게 힘든 기억들이 많은 것일까? 그래서 친한 친구들에게 성차별당했다고 느낀 순간이 있었냐고 물으니, 3초도 안돼서 바로 답변들이 날아온다. 동시대를 살아온 여성들이라면 백번 공감할 수 있는 말들이었다. 이상한 오해의 소지가 있는 상황에서 바로 잡으려 반문하거나 잘못된 부분을 지적하려 한다면 괜히 나만 이상한 사람이 될 것 같고, 예민하다는 소리나 들으며 괜히 분위기 망치는 사람이 되어 버린다. 부정적 의미의 "니 페미니스트가?" 줄임말로 " 니 페미가?" 혹은 "메갈이가?", "워마드가?" 등등 내가 잘 알지도 못했던 은어들이 조롱하듯 나에게 꽂혔다. 나는 남들로 하여금 페미니트스가 되어 있었다.
페미니즘/페미니스트 속 다양한 색이 만들어 낸 변질-
장난이 조금 섞인 형태로 페미니스트가 되어 버린 난 과연 페미니즘이 정확히 무엇인지 그리고 그 역사는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찾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서구에서 여성의 선거 참여권을 위해 시작된 운동을 시점으로 성별로 인해 발생하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차별을 없애야 한다는 취지의 운동이 확대되어 왔다. 그리고 실제로 이러한 운동들로 인해 많은 인식의 변화를 가져왔고, 나아가 여성의 권리는 많이 신장되었으며, 더 나아가 오직 여성의 권리신장만이 아닌 평등" Equality"을 외치는 운동으로 확대되었다. 하지만 그 속에서는 아직 여성의 권리만을 외치는 소극적인 페미니즘도 존재하고, 차별받았던 역사에 분노하며 남성 혐오로 까지 발전하여 페미니즘의 탈을 쓰고 혐오를 조장하여 본질적인 의미의 페미니즘을 퇴색시키는 자들도 분명히 존재한다. 문제 해결을 하는 과정에서 디테일한 부분들을 간과한 것이 시작이었을까? 혐오라는 형태로 뭉친 집단들이 우후죽순 생겨나며, 반페미들이 만들어가는 페미의 이미지는 더 이상 우리들이 생각한 페미니스트들이 아니었다.
이상과 현실의 조화-
오직 여성이 여성의 인권신장만을 외치며 남성 혐오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이해하며 불평등과 부조리함을 바로 잡을 수만 있다면 초기의 페미니즘 정신으로 많은 변화를 이룩했던 것과 같이 또 다른 기분 좋은 변화를 맞이하게 될지도 모른다. 모든 것을 이분법적으로 나누어 극단적으로 다뤄갈 문제가 아님을 알고 있는 이들이 분명히 있음에도 종종 눈을 찌푸리게 하는 일들은 우리로 하여금 " 나는 페미니스트다."라고 말하기 꺼려하는 상황을 조장한다. 하지만 " 나는 만인 앞에 모두가 평등하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하기는 쉽다. 나는 후자가 가진 개념과 전자가 가진 기본적 개념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인간 존엄과 만인의 평등이라는 이상을 버리고 살 수 없듯이 같은 맥락에서 성평등(이분법적 나뉜 남녀뿐 아니라 LGBTQ포함)에 대해서도 이상과 현실의 조화를 이루기 위한 노력을 멈추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래서 왜?라는 질문을 계속해서 던지고 답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는 응원한다. 이상과 현실의 조화를 반기는 이들을 말이다.
언뜻 보아서는 같은 성별이며 같은 한 곳을 응시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악마는 디테일에 있듯이 천천히 들여다보면 달리 보이게 마련이다. 여장을 한 남자 일수도 있고, 트랜스 젠더 일 수도 있고, 여성의 외모를 가진 제3의 성일 수도 있다. 그리고 한 곳을 바라보는 것처럼 보여도 한 목소리를 내는 것은 아닐 수도 있으며 다양한 시각으로 접근해 볼 수 있다. 이처럼 남녀 성차별 문제도 언뜻 보아서는 안되며, 그 안에는 다양한 의견들이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인식을 시작으로 조금은 달리 보는 시각을 가졌음 한다.
번외의 내용이기도 하지만 덧붙이자면 이제는 성을 남녀로만 나누어 얘기하는 것조차도 편견이 될 수도 있다. 미국과 캐나다에는 이미 non-binary 인 사람들 ( 남자도 여자도 아닌 제3의 성별)을 위한 폭넓은 이해로 관공서 서류에 성별 표기란을 남과 여로만 나뉘지 않고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이 제공되며, 이 제도적 변화는 다양하게 녹아든 부조리의 틀을 깨고 확대되어 가고 있다. 물론 이 같은 활동들은 우리가 남녀평등만을 외칠 때 그림자 안에 있던 소외받는 이들의 또 다른 쟁취일까 한다. 이처럼 이런 변화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역사와 사회가 만들어 놓은 어떠한 문제에 대해서 조금은 더 디테일하게 들여다보고 다양함을 받아들여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https://news.gov.bc.ca/releases/2022HLTH0002-000056)
소개글의 내용처럼 너무 할 말이 많은 나는 앞으로 주어지는 주제에는 다양한 시각으로 해석해서 어떠한 디테일이 있는지 찾아보고 내 생각을 간단히 정리해 갈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