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수증 붙이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무한도전 경매 특집 <무도드림>에 나온 영화제작사 직원의 한 마디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의 웃음이 빵 하고 터졌다. 소싯적 딱풀질 좀 해봤다는 업계 선배들의 격한 공감 반응이었다. 영화사에서 일하면 연예인 실물이나 영접하며 루테인 없이도 맑은 눈을 장착할 줄 알았는데. 현실은 영수증과 장부에 적힌 숫자를 대조하느라 눈알이 빠질 지경이다. 어딜 가든 이상과 현실은 멀고, 막내의 삶은 고달프다.
드라마 <미생>은 완벽에 가까운 현실 고증으로 직장인의 환호를 받은 작품이다. 여기에도 말단 직원의 애환을 담은 에피소드는 어김없이 포함된다. 당장 수출해야 하는 쭈꾸미에 꼴뚜기가 섞여있는 문제가 발생했다. 공장에서는 확인이 어려운 상황. 사무실에 있는 직원들이 손수 찾아내야만 한다.
역시나 만만한 인턴 직원들이 호출됐다. 부모님이 사주신 곱디고운 양복 위에 씌워진 촌스러운 진달래색 고무장갑이 미관을 해친다. 창고는 너무 춥고 손은 점점 굳는다. 머리카락 한 올까지 젓갈 비린내가 배긴다. 이것이야 말로 리얼 짠내다. 꼴뚜기를 찾는 우리네 ‘꼴’이 말이 아니다.
"내가 이런 일 하려고 비싼 등록금 내면서 학교 다니고, 교환학생에 어학연수에, 토익이랑 제2 외국어도 모자라, 공모전이랑 대외 활동까지 한 거야?"
유감이다. 당신은 이런 일을 하려고 회사에 들어왔다. 더 정확히 말하면 당신은 이런 일'도' 하려고 회사에 입사했다. 누칼협?(누가 칼 들고 협박함? 의 줄임말) 싫으면 나가면 된다. 누구도 우리에게 제발 이 회사에 다녀달라고 협박하지도 애원하지도 않았다. 온전히 우리가 선택한 결과다.
회사는 다니고 싶지만 이런 일은 하기 싫다면? 방법이 하나 있다. ‘신입사원’이 아니라 ‘신입사장’으로 입사를 하면 된다. 하지만 대졸 공채에서 뽑는 건 일개 직원이 아닌가. 그것도 서열 최하위 직원. 역시나 우리는 방법이 없다. 다음 생에 이건희 회장의 아들, 딸로 태어나는 수밖에.
회사는 우리의 잠재성을 보고 합격시켰다. 물론 그 안에 잡일을 하는 능력까지 포함되진 않았다. 그냥 회사에 들어온 이상 잡다한 것도 해야 하는 사람이 된 거다. 이런 시답지 않은 일이 영원히 계속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불만은 적당히 접어둬도 된다.
나도 그랬다. 왜 맨날 나만 이런 일을 해야 하는지 억울하고 짜증 나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 혼자 상상해 봤다. 내가 아닌 과장님이 하는 모습을, 차장님이 하는 그림을. 아… 역시 아니다. 내가 하는 게 맞다. 언젠가 들어올 후배님을 간절하게 기다렸다.
그나마 힘 좀 있다는 메인 부서는 계약직 주임님이 있어 잡일을 도맡아 해 주시는 경우도 있지만, 요즘은 계약직 직원이라고 스펙이 모자란 것도 아니다. 정규직 입사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지원하는 경우도 많다. 잡다한 일을 해야 마땅한 사람이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다. 계약직뿐 아니라 고졸사원이나 인턴사원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생각하는 일 다운 ‘일’을 하기 위해서는 파생되는 일거리가 많다. 간단하게 회의를 진행하는 상황을 상상해보자. PT자료를 만들고 발표를 하는 사람도 필요하지만, 자료를 복사하고 회의 중간에 마실 음료수를 준비할 사람도 필요하다. 생각하는 업무의 범위를 넓히는 것이 스스로의 정신건강에 좋다.
소위 말하는 대기업이라는 기준에 속하는 우리 회사만 봐도 그렇다. 장마철이 되면 수혜복구 봉사를 가고, 농번기가 되면 일손 돕기 봉사를 간다. 이런 건 의미나 보람이라도 있지… 상사 자녀의 수능 선물 사기, 팀 간식함 채워 넣기, 탕비실 냉장고 청소하기 등.(더 구차한 일은 언급하지 않겠다) 이런 것까지 해야 하나 싶은 것까지 해야 한다.
(지금 다니는 회사는 아니지만) 인턴 교육을 받을 때, 선배와의 대화에서 모 과장님이 말해준 면접 일화가 기억난다. 당시 면접관이 이렇게 물었다고 했다.
"상사가 커피 타는 것만 시키면 어떨 것 같아요?"
면접관은 강단 있어 보이는 과장님의 얼굴에서 똥고집의 냄새라도 맡은 걸까. 질문의 맵기 수준이 마라맛이다. 나였으면 어버버 거리다가 답하지 못했을 것 같은데… 과장님은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월급도 주시는데 그런 일만 하면 좋을 것 같은데요?"
자칫 놀고먹겠다는 뜻으로 비칠 수도 있지만 나는 다르게 느꼈다. 저는 시키는 일은 물론이고 예상하지 못한 일까지 받아들일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그것도 아주 긍정적인 마인드로요! 아마 면접관에게도 괜찮은 인상을 남기는 답변이었으니 과장님이 저 자리에 계신 거겠지?
회사 동기들을 보면 가끔 속으로 놀랄 때가 있다. 언뜻 보면 다행히 인생 잘 풀려서 밥 벌이 하고 사는 사람 같은데, 과거에 했던 활동을 들어보면 생각지도 못한 이력이 툭툭 튀어나온다. 역시 회사에 그냥 들어오는 사람은 없다.
당신도 마찬가지다. 회사는 뛰어난 지원자를 선택하고, 당신은 선택받은 사람이다. 다만 이 무리에서, 아직까지는 ‘직원 1’로 불리는 엑스트라일 뿐이다. 잡일에 회의감을 느끼는 것도 신입 때만 느끼는 특권이다. 곧 업무의 중압감이 덮쳐올 테니 너무 우울감에 빠지지 말자. 곧 비중 있는 배역을 받아낼 테니 말이다. 한탄만 할 시간에 후배 직원 받는 것에 집중하는 게 더 효과적이다.
#이건 TIP인가 TMI인가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지만,
막내 생활이 3년 넘어가면 독이 쌓인다.
절대 3년은 넘기지 말자!
나는 그때 쌓인 독이 아직도 빠지지 않았다.
* 사진 출처 : MBC 무한도전, TVN 미생,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