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런던으로 여행을 갔다. 런던에는 누구나 아는 유명한 랜드마크들이 있다. 빅벤, 타워브리지, 런던아이. 더 이상의 부연설명이 필요할까. 여기가 바로 영국 그 자체인 걸! 하지만 런던 여행자의 환상은 3일 차부터 깨지기 시작했다.
영국 신사는 어디 가고 길거리에는 당당하게 담배 피우는 사람들이 넘쳐났다. 식당 앞에는 제대로 밀봉되지 않은 쓰레기가 나뒹굴었고, 타워브리지 아래로 흐르는 템즈강은 투명함이라곤 조금도 없는 시커먼 흙탕물이었다. 여기가 런던이 맞나? 그때 깨달았다. 여기도 그냥 사람 사는 곳이구나.
유럽 여행지에 대한 막연한 기대만큼 위험한 것이 대기업에 대한 막연한 환상이다. 평균을 살짝 웃도는 급여와 조금 더 나은 복지만을 바란다면 상관없다. 다만,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을 거라 생각한다면 실망할지도 모른다. 여기가 대기업 맞냐고요? 네, 맞긴 한데요. 여기도 그냥 일하는 곳이에요.
회사는 규모와 매출을 기준으로 대기업, 중견기업, 중소기업으로 나뉜다. 그중 대기업은 10조 원 이상의 자산총액을 가진 곳이다. 법률적 정의에 의거하면 나는 대기업에 다니는 사람이 맞지만 단언컨대 한 번도 그리 느낀 적이 없다. 왜일까?
급여가 문제인가? 그건 아니다. 집세내고 카드값내면 앙상해지는 월급이지만 대한민국 직장인 평균 소득보다는 많은 편이다. 그럼 복지가 별로인가? 그것도 아니다. 유명 프랜차이즈와 협업하여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점심메뉴는 아니지만 서너 가지 선택지를 제공하는 구내식당이 있다. 그 외에 대학생 자녀를 위한 학자금 지원이나 육아휴직 제도도 잘 마련되어 있다. (내가 써먹질 못해서 너무 아쉽다)
테헤란로나 여의도 중심부에 위치하는 화려한 통유리 건물은 아니어도 창문을 투과하는 뜨거운 햇살을 상쇄시킬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나온다. 최고의 피서는 회사라는 말을 할 정도로 쾌적한 사무실에서 일을 하고 있다. 폭염에도 야외 작업을 하는 근로자들을 생각하면 내가 하는 투정은 사치스럽기 짝이 없다. 생각하던 모습과 달라서 실망이라느니, 이게 무슨 남들이 말하는 대기업이라느니. 이런 의문이 웬 말인가.
생각해 보니 내가 런던에 기대한 모습은 화려한 미술관과 맛있는 홍차만이 아니었다. 선진국다운 높은 시민의식과 유럽 특유의 세련된 분위기였다. 비슷한 맥락으로 내가 대기업에 바랐던 모습은 삐까뻔쩍한 건물과 좋은 복지가 아니라 배울 점이 많은 사람들과 생동감 넘치는 분위기였다.
만약 대기업의 기준이 다음과 같았다면 나의 생각은 달라졌을까?
책임감 있는 직원이 전체 구성원의 80% 이상을 차지하는 기업
불필요한 업무를 최소화하는 규범이 존재하며, 매년 수행여부에 대한 감사를 받는 기업
기본적인 규율과 업무상 예의를 제도화하여 이행하는 기업
이런 추상적인 정의는 회사에 적용되지 못한다. 내가 다니는 회사는 자산규모가 10조 원이 넘는 법률상 대기업일 뿐이다.
규모가 클수록 직원이 많다. 그만큼 돌아이도 많다. 요즘은 채용과정에 인적성 검사가 포함되어 있지만 그 테스트에도 허점은 있나 보다. 주변에 이상한 사람이 이렇게 많은 걸 보면.
다른 기업에서 일하는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대기업은 상대적으로 비정상인의 비율이 낮은 편이다. 하지만 표본이 많은 탓인지 낮은 비율임에도 불구하고 높은 수치를 보인다. 10명 중 3명이 돌아이인 것과 1000명 중 200명이 돌아이인 것. 어디가 더 별로인 집단인가? 대기업은 다양한 인간상을 접하기 좋은 장소다.
회사 화장실에는 양치도구를 올려두는 선반이 있다. 나는 더 이상 그곳에 개인소지품을 두지 않는다. 그곳은 좀도둑들의 놀이터다. 그들은 생리대를 훔치는 건 기본이고 남이 쓰던 립스틱을 가져가기도 한다. 심지어 다른 사람의 치약과 칫솔을 몰래 쓰는 사람도 있다. 누군지 모르지만 알고 싶지도 않다. 그런 사람들과 함께 일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
탕비실에 놓인 냉장고는 더 심각하다. 훔쳐 마시기에 편리한 병음료는 기증할 목적으로 넣어두는 게 좋다. 포스트잇에 이름을 써서 붙여두면 되지 않냐고? 소용없다. 책상 위에 있는 음식도 몰래 먹는 놈들이다. 간식실명제를 도입한다고 달라질 건 없다.
귀여운 좀도둑만 있는 건 아니다. 이곳에는 기겁할만한 간 큰 도둑도 있다. 기사에 나오는 횡령 소식은 실제로 내 주변에서도 일어난다. 잡범을 넘어 횡령꾼과도 함께 일하고 있다. 여기가 대기업인지 대검찰청인지 모르겠다.
대기업에서는 최적의 방식으로만 일할 줄 알았다. 비효율적인 방식으로 최상의 결과물을 만들어내야만 하는 곳, 그게 바로 대기업이다.
회의 시작하겠습니다.
모든 직원은 1 회의실로 모이시기 바랍니다.
갑자기 회의가 생겼다. 회의라는 것은 본디 사전에 참석자들에게 주제와 장소를 고지하는 게 예의 아닌가. 전시상황에 예비군을 호출하듯 허구한 날 긴급 소집이다. 이런 상황이 익숙하여 이제는 무슨 일인지 묻지도 않는다. 주섬주섬 수첩과 볼펜을 들고 회의실로 간다.
직원들이 도착하자 회의실 문이 닫히고 회의 소집자의 연설이 시작된다. 부서에서 진행 중인 프로젝트에 대한 애로사항과 직원들을 향한 당부의 말을 전하기 위함이었다. 회의를 가장한 꾸지람 타임이다. 한 사람의 독백에 20명이 넘는 직원이 묵언수행을 하고 있다. 누구는 고개를 숙이고 핸드폰만 쳐다보고, 누구는 수첩을 펼쳐서 무언가를 끄적인다. 아마도 고양이 그림이나 그리고 있겠지.
업무를 위한 회의에서도 회의감을 느끼긴 마찬가지다. 회의 시간은 30분을 넘기지 말자며 설치된 타이머는 고장난지 오래다. 서로 자기 일이 아니라고 우기고, 각자 힘든 부분만 하소연하며 얼굴을 붉힌다. 애들도 없는데 징징거리는 소리가 회의실을 가득 메운다. 원래도 애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회사를 다니면서 더 싫어졌다. 떼를 쓰는 애기들을 보면 꼭 그 직원들을 보는 것 같았다.
- 혹시 B형 간염 예방접종 했어요?
- 어... 아니요! 그건 왜요?
- 입사하면 그거부터 해야 돼요. 하하.
이게 무슨 말이지? 신규직원이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이 B형 간염 항체 만들기라니. 첫 회식에서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신규직원답게 준비해 온 건배사를 마치고 시원하게 잔을 들어 올렸다. 첫 잔은 꺾어마시지 않는 게 예의라지? 쓰디쓴 소주를 최대한 목구멍으로 밀어 넣는다. 잔에 든 술을 비우자마자 또 다른 잔이 내 눈앞을 서성거린다. 소주인지 물인지 정체 모를 물기가 흥건한 저것. 팀장님은 자신이 마시던 잔을 탈탈 털어 내게 건네주신다. 어리둥절한 나는 두 손으로 그것을 받아 든다. 그 위로 소주가 콸콸 채워진다. 아… 이게 듣도 보도 못한 ‘잔 돌리기’ 구나. 최대한 액체가 묻지 않은 부분을 찾아보지만 작은 유리잔에 사각지대란 없다.
연거푸 잔을 비우고 정신을 챙기려는 찰나. 옆자리 과장님이 나를 툭툭 친다. 이번에는 내가 드려야 한단다. 내 소주잔을 휴지로 박박 닦아 팀장님께 드린다.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술을 따른다. 내 잔을 돌려주시면 나는 또 휴지를 몇 장 뽑아 뽀드득 소리가 날 때까지 닦는다. 회식만 하면 테이블 위에 젖은 휴지가 가득하다. 당장 보건소에 가서 예방접종부터 맞아야겠다.
저녁 회식에서만 술을 마신다고 생각하면 크나큰 오산. 점심에도 알코올 섭취는 간간이 일어난다. 어느 날 오후, 옆자리 직원의 얼굴이 벌건게 눈에 띈다. 살짝 소주 냄새도 나는 듯하다. 혹시 술 마셨냐고 사내 메신저로 물으니 답장이 왔다.
"티 많이나? 부장님이랑 점심 먹었는데 술을 주셔서..."
근무시간에 술이라니. 예전에는 흔한 일이었다며 자기 합리화를 하는 사람도 있다. 저녁 회식 대신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점심 회식을 하는 회사들도 있다는데. 평범한 점심시간에도 반주를 곁들이는 이곳. 여기가 일하려고 모인 곳이 맞는가?
물론 대기업에는 좋은 점도 많다. 이건 부정할 수 없다. 일단 웬만한 체계는 갖춰져 있는 편이다.(무조건 지키는 건 아니다) 보고체계, 장애대응체계, 인수인계체계 등. 업무 관련 매뉴얼이 정형화되어 있어 많은 사람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수 있다.
좋은 것은 먼저 적용하려고 노력한다. 자체적으로 제도를 개선하기보다는 정부의 지침으로 도입되는 게 대부분이지만, 그게 어디인가. 알게 모르게 법을 어기며 운영되는 회사도 많다. 성희롱이나 직장 내 괴롭힘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정기적인 교육을 통하여 개선하려는 시도를 어느 기업보다 열심히 한다.
너무 간헐적으로 마주쳐서 아쉽지만, 대단하다고 느끼는 직원들도 종종 있다. 롤모델과 함께 일하며 서로 으쌰으쌰 하는 드라마 같은 경험은 아직이지만. 언젠가 그런 날이 오면 그때는 이렇게 느끼려나. ‘아 이런 곳이 바로 대기업이구나‘. 나 역시 누군가의 본보기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크다고 해서 대단한 것도 아니고, 작다고 해서 보잘것없지도 않다. 중소기업의 처우는 더 개선되어야 하고, 대기업은 행실을 더 철저히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큰 대’ 자가 포함된 단어답게 커다란 포부로 건강하고 멋지게 일하는 곳이 되길 기원한다. 어린애도 아닌데 아직도 이런 꿈을 꾸는 게 철이 없는 건가.
#이건 TIP인가 TMI인가
- 혹시 무슨 일 하세요?
- 네, 그냥 회사원이에요!
- 회사가 어디예요?
- 아, OO역 근처예요!
what의문문에 where로 답한다. 회사가 부끄러운 건 절대 아니다. 생각만큼 멋지게 일하지 못하는 내가 부끄러워서 동문서답을 할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