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혼돈백서 07화

대기업 월급으로는 부자가 될 수 없다

by 양독자


"택을 보지 않고 옷을 살 수 있어요"


무명시절을 끝내고 유명해진 인기 연예인들은 나아진 수입에 대해 이렇게 답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치의 잣대인 가격에 연연하지 않는 것. 일종의 경제적 자유를 이룬 게 아닐까. 물건보다 가격표를 먼저 확인하는 나는 한 번쯤 누려보고 싶은 삶이다.


대기업에 입사했지만 부자가 될 거라고 기대하진 않았다. 돈을 많이 버는 수단 중에 월급쟁이는 없으니까. 그래도 나의 소비 수준에는 약간의 발전이 있을 줄 알았다. 한강이 보이는 오피스텔에 살거나 독일산 외제차를 운전하진 않아도, 백화점 3층 여성복 코너에서 원하는 옷 한 벌쯤은 걱정 없이 사는 그런 거?


하지만 현실은 할인매장이다. 인터넷 쇼핑을 주로 해서 종이봉투에 담긴 옷을 받아본지가 언제인지 모르겠다. 월급을 탕진하면 노후가 까마득해지는 직장인에게 부족한 건 돈이 아니라 여유다.



주말 아침에 눈을 뜨면 동네 김밥집으로 간다. 아침밥을 파는 가게는 드물기에 고를 수 있는 메뉴가 다양하진 않다. 나는 참치김밥을 한 줄 포장한다. 학생 때는 주로 기본김밥을 먹었는데 이제 돈 좀 번다고 스페셜김밥도 사 먹는다. 나도 김밥 정도는 가격도 안 보고 주문한다 이 말이야! 주말 저녁에 치킨 한 마리쯤은 고민 없이 배달시키기도 한다. 내가 얻은 경제적 자유는 이 정도다.



모든 대기업 직원이 나처럼 아등바등 사는 건 아니다. 주말 아침을 호텔 브런치로 시작하는 사람도 있다. 푸드코트 마감임박 초밥세트보다 오마카세를 자주 먹는 직원도 많다. 요즘은 상당수 젊은 직원들이 축구공보다 골프공을 자주 만진다. 골프는 더 이상 소수의 부자만 누리던 레저가 아니다.


중견기업 대표 아들내미, 공장 사장 딸내미 등. 드라마에서나 보던 집안의 자녀들이 나와 같은 회사를 다닌다. 이 사람들은 용돈벌이로 회사를 다니는 걸까? 아니면 명함이 필요해서? 생활비와 내 집 마련을 위해 돈을 버는 나와는 전혀 다른 세계의 사람들. 나는 이들에 대한 이해도가 많이 떨어진다. 아마 그들도 나를 공감하지 못하겠지만.


이 정도로 부유하진 않더라도 대기업에는 어느 정도 여유 있는 사람들이 많다. 확실히 그렇다. 살면서 지금까지 속해있던 집단들 중 이곳이 가장 이질감이 드는 장소다. 흔히 말하는 중산층 가정의 자녀들. 학군 좋은 동네에서 적당한 사교육을 받으며 자라서, 가끔 해외로 가족여행을 떠나고, 집에는 준대형 세단이 한 두대정도 있는 흔한 듯 하지만 결코 평범하지 않은 집안. 이들은 스스로를 소시민이라고 생각하지만 진짜 서민인 내가 보기엔 작은 규모의 부자일 뿐이다.




대기업에 부자는 많지만, 대기업에 다녀서 부자가 된 사람은 없다. 같은 회사에서 같은 월급을 받으면 동일 출발선에 서있는 걸까? 전혀 아니다. 시작점은 같지만 앞으로 나아가는데 이용하는 수단이 다르다. 누구는 스포츠카를 타고, 누구는 전동 킥보드를 타며, 누구는 자신의 두 다리로 달린다. 그리고 누군가는 짐이 가득 실린 리어카를 끌고 나아가야 한다.


학자금 대출을 갚느라 1년 가까이 월급을 모으지 못하는 직원이 있는가 하면, 입사 선물로 자동차를 받는 직원이 있다. 집에 생활비를 드려야 해서 적금을 넣기도 빠듯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오히려 부모님께 용돈을 받는 사람이 있다.(연예인처럼 부모님께 돈관리를 맡기고 용돈만 타 쓰는 그런 걸 말하는 게 아니다)



아파트 분양공고를 보면 호수마다 분양가가 각기 다르다. 넓은 고층일수록 비싸고, 좁은 저층일수록 저렴하다. 창밖으로 보이는 뷰에 따라서도 가격 차이가 난다. 똑같은 단지 안에 있는 집인데도 다른 취급을 받는다. 회사 안의 직원들도 그렇다. 같은 회사에 다니지만 누구는 펜트하우스, 누구는 복도식의 1층집이다.




억대 연봉을 받으면 역전은 못해도 어느 정도 비슷해질 수 있을까. 돈은 돈이 번다고 했다. 사람이 버는 돈은 자산증식용이 아니라 생계유지용이다. 이미 벌어진 격차는 웬만한 노력과 기적으로 좁혀지지 않는다.


연봉 1억은 백화점 수입코너에서 파는 과일세트 같다. 포장을 벗겨보면 벌 것 없다. 겉보기에는 고급스럽고 실해 보이지만 정작 알맹이는 마트에서 파는 과일과 큰 차이가 없다. 분명 낮은 소득은 아닌데 억대연봉자라는 수식어가 민망할 만큼 실수령액이 소박하다. 물론 이보다 낮은 연봉의 월급보단 많겠지만 '억'이라는 단위가 붙은 것만큼 억 소리 나는 급여는 아니다.



일정 과세구간을 넘으면 세율이 확 높아진다. 연봉이 올라도 실수령액은 크게 차이 나지 않는다. 오른 급여만큼 그대로 나라에 돌려주는 느낌이랄까. 매달 떼어가는 세금을 보면 우리 회사가 참으로 정직하고 준법정신이 뛰어난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연예인들이 왜 그렇게 탈세를 하는지 살짝 이해가 되기도 한다.(물론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나라에서 지원하는 정책사업에 신청하고 싶지만 소득기준에 막혀 아무런 혜택도 받지 못한다. 대출이자 할인? 청년주택? 그림의 떡이다. 차라리 돈이라도 왕창 벌면 억울하지나 않지. 뭐든 애매한 게 문제다. 애매한 재능, 애매한 학벌, 애매한 월급.


여유로운 월급쟁이가 되려면 연봉이 3억 이상쯤 되면 가능하려나. 그런데 어떤 기사에서 3억을 버는데도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댓글을 보았다. 어이가 없음과 동시에 기운이 쑥 빠졌다. 억 소리가 아니라 헉 소리가 날 정도로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이 되어야 하나. 그렇다면 대기업 직원으로는 택도 없구먼.




대한민국에서는 얼마가 있어야 부자일까? 우리나라의 시중은행은 10억 이상의 금융자산을 소지한 사람을 부자라고 정의했다. 부동산을 제외한 예/적금, 주식, 펀드, 채권 등을 합친 액수다. 평생 번 돈으로 서울에 있는 집 한 채 살까 말까 한데. 그걸 제외하고도 10억이나 더 있어야 한다니.


기업의 노비로 살아온 근성 때문인지 선뜻 사업을 할 용기는 없다. 그렇다고 회사만 다녀서는 미래가 없다. 대기업도 마찬가지다. 주변에 아쉬운 소리 하지 않고 적당히 먹고살 만큼은 벌지만, 정말 딱 그 정도다. 그 이상의 여유로움은 물려받은 재산이 아니면 생기지 않는다. 결국 우리들은 눈을 돌린다. 주식, 코인 그리고 갖가지 파생상품들로 수익을 올리거나 부업으로 부수입을 만든다. 부자가 되려는 노력이라기보단 거지가 되지 않으려는 몸부림이랄까.



#이건 TIP인가 TMI인가

몇 해 전, 신종 전염병 덕에 주식과 코인장에는 위기를 동반한 기회가 찾아왔다. 나보다 한참 늦게 입사한 후배가 투자에 성공했다는 소문이 들린다. 듣자 하니 그동안 내가 일해서 모은 돈보다 더 많은 수익을 냈단다. 지금까지 내가 일한건 뭐지? 배가 살짝 아프다. 열받아서 그런가 이마도 조금 뜨겁다. 분노를 느낀 건지 몸이 부르르 떨리는 것도 같다. 코로나 양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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