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양독자 Sep 12. 2024

대기업은 입사보다 퇴사가 더 어렵다

 

"들어올 땐 마음대로지만 나갈 땐 아니란다"


이 대사를 어디서 들어봤더라. 영화 <곡성>? <쏘우>? <곤지암>? 생각나는 작품의 장르가 죄다 스릴러와 공포다. 출입의 제한은 굉장한 심리적 압박감을 준다. 이 압력을 가장 잘 느끼는 곳이 어딜까. 외지인 악마가 사는 동굴? 잔인한 게임을 시작하는 밀폐된 방? 폐업한 정신병원? 아니다. 우리가 매일 출근하는 회사다.



마음대로 들어올 수 있다 했지만, 사실 회사는 그렇지 않다. 우리의 자유는 입사지원까지만 허용된다. 기업의 문턱을 밟기 위해서는 승인이 필요하다. 반대로 나갈 때는 누구의 승낙도 필요하지 않다. 퇴사는 누구의  제지도 받지 않는다. 그저 통보만 하면 된다. 그럼 앞서 말한 대사는 이렇게 바꿔야 하지 않나?


“나갈 땐 마음대로지만 들어올 땐 아니란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왜 이곳을 떠나지 못할까. 바로 마음을 먹지 못해서다. 우리의 퇴사는 계속 반려당하고 있다. 누가 계속 결재를 거부하는가. 회사 부장도 아니고, 함께 사는 부인도 아니고, 낳아주신 부모도 아니다. 전결권자는 나 자신이다. 나만 허락하면 되는데 내가 허가하지 못한다. 우리는 회사를 쉽게 탈출할 수 없는 미로로 만들었다.




힘들게 들어왔는데 왜…

올해도 어김없이 최악의 취업난이라고 한다. 내가 구직활동을 할 때 얼어붙어있던 취업시장은 아직도 해동되지 않았다. 항상 작년보다 더 힘들어졌다고 말한다. 매년 리즈 갱신이다. IMF가 터지기 전에는 신입사원들을 데려가려 난리였다는데. 과연 그런 세상을 직관하는 날이 올까.


대기업의 입사 경쟁률은 적게는 몇 십대 일, 많게는 몇 백대 일까지 이른다. 물론 허수인 지원자들도 있지만 대부분 스스로를 열심히 가꿔온 사람들이다. 그 안에서 1이 되어야 한다. 이런 인재들을 제치고 내가 선택받아야 한다.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서류전형, 인적성, 필기시험을 통과해야만 면접의 기회가 주어진다. 면접은 또 얼마나 많은가. 토론면접, 실무자면접, 임원면접 등등. 한 줌의 영혼까지 탈탈 털어 바쳐도 운이 도와주지 않으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렇게 힘겹게 사원증을 목에 걸었것만. 지금은 왜 이 목걸이를 반납하고 싶을까. 취업만 하면 야근도 불사를 것 같던 간절함은 어디 갔나. 내 자리에는 올챙이 시절을 새까맣게 잊은 개구리 한 마리가 앉아 있다.



여길 나가면 무얼 할 수 있을까

흔히 대기업에서 일하는 직원들을 부품에 비유한다. 슬프지만 인정한다. 아프지만 동감한다. 내가 아니어도 회사는 잘 돌아간다. 아니, 잘 돌아가야만 한다. 여기에 일하는 사람이 몇 명인데! 나 하나 없다고 차질이 생긴다면 그게 더 큰 문제다. 나를 대신할 부품들은 항상 존재한다. 대체제의 많고 적음에 대한 문제는 있지만, 대체불가한 상황은 발생하지 않는다.


처음에는 쓸모가 없는 여분의 부품이었다. 이름도 없는 그냥 '부품 1'. 시간이 흐르자 내게도 어엿한 역할이 생겼다. 회사는 나에게 ‘볼트 1’이라는 호칭을 붙여주었다. 수많은 볼트들과 열심히 일했다. 그 모습을 좋게 봤는지 상사가 나에게 새로운 제안을 한다. 이제부터 ‘너트 1’을 하는 게 어떻겠냐고 묻는다. 볼트를 해봤으니 너트는 수월할 거라나? 일단 시키는 대로 한다. 어느덧 연차가 제법 쌓였다. 회사는 나에게 더 높은 직급을 부여해 주었다. 그렇게 나는 막중한 책임감을 가진 ‘어댑터 1’이 되었다.


처음에는 어엿한 부품이 되는 게 나의 정체성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점점 회의감이 들었다. 이런 식으로 성장한들 온전한 기계가 될 수 있나? 누군가의 도움 없이 스스로 동력을 만들어 나를 가동할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안 될 것 같다. 이 생활에 너무 익숙해져서 부품이 아닌 삶은 자신이 없다.


다른 회사를 가도 마찬가지다. 주어진 역할만 바뀔 뿐, 또다시 부품이다. 결국 도돌이표다. 나는 조직을 벗어나면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될 것 같다. 이런 두려움으로 우물 안 개구리를 자처한다. 대기업의 높은 벽은 입사의 관문이기도 하지만 퇴사의 장애물이기도 하다.



회사를 다닐수록 바보가 된다

몇 해 전, 신입사원 채용과정 면접도우미로 참여한 적이 있다. 회사에서 일이나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싶은 앳된 모습의 취준생들. 나도 저런 시절이 있었는데. 잠시 올챙이 적을 추억했다. 검은 정장을 입은 모습은 어색했지만, 칙칙하기는커녕 그들의 얼굴에는 생기가 돌았다.


나는 PT면접장으로 지원자들을 인솔하는 역할을 맡았다. 면접의 절차는 다음과 같았다. 먼저 응시자들에게 문제가 주어진다. 회사가 추진하려는 신규 프로젝트에 관련된 가상의 내용이다. 20분 안에 현상을 파악하고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야 한다. 이후 면접관들이 앉아있는 부스에 들어가 한 명씩 발표를 한다.


문제지를 받자마자 면접자들이 분주하게 내용을 도식화하기 시작한다. 처음 보는 제시문일 텐데 조금의 막힘도 없다. 꿈속에서 본기라도 한 걸까. 도대체 내용이 어느 정도 수준이길래 이렇게 술술 풀지? 남은 문제지 하나를 슬쩍 쳐다봤다.


와... 이게 뭐지... 이걸 어떻게 20분 만에 하라는 거야.  얘네 천재인가? 아니면 내가 바보인가? 문제지에 적힌 내용이 머릿속에서 빙빙 맴돌기만 했다. 내가 지금 저들과 같은 입장이었다면, 아마 나는 합격자 명단에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물론 입장이 바뀐다면 초인적인 힘으로 어떻게든 풀어내겠지만)


회사에는 점점 똑똑한 직원들이 들어온다. 창업 경험이 있는 친구도 있고, 소규모 프로젝트는 안 해본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다. 하지만 과거의 우리도 그랬다. 선배들과는 달리 각종 대외활동, 졸업작품, 인턴경험들을 쌓아왔다. 면접장에서는 내가 생각해도 똑 부러지게 발표를 했다. 긴장은 했지만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다. 그런 내가, 지금은 바보가 되었다. 회사일 밖에 할 줄 모르는 바보.


말을 하지 않으니 발표 능력은 퇴화되었고, 글을 쓰지 않으니 어휘력은 멸종되었다. 총기 넘치던 모습은 어디로 사라진 걸까. 오랜만에 만난 대학 동창이 이런 말을 한다.

"점점 멍청해지는 것 같아"

일단 안도했다. 아 다행이다... 나만 그런 건 아니구나... 그리고는 불안했다. 다들 그렇다는 건 개인이 아니라 시스템이 문제라는 거다. 회사를 탈출하지 않으면 이 상태를 벗어나긴 어렵단 소리다.


회사에서 큰 프로젝트를 하면 몇 백 명이 사업에 달려든다. 그 안에서 내가 차지하는 비중은 티끌에 불과하다. 실패하면 죄책감이 들지만, 성공한다고 뿌듯함이 생기진 않는다. 온전히 내가 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 업무를 깊이 파악하는 것에 익숙해져서 점점 다른 분야에 대한 무지함이 늘어간다. 유명한 톱스타가 제 손으로 공과금도 낼 줄도 모르는 느낌이랄까. 여기서 난 바보가 될 수밖에 없다. 마법에 걸려 개구리가 된 왕자처럼, 지금 나는 바보가 되는 요술에 걸렸다.

 



잘난 건 회사다. 내가 아니다. 조직 안에서 매번 깨닫는다. 회사는 우리에게 계속 주입시킨다. 너는 생각보다 대단하지 않은 사람이란 걸. 너는 이곳이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대기업 안에서 직원들은 계속 가스라이팅을 당하고 있다.


어딜 가든 자신만의 아이덴티티가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러려면 독자적인 무언가가 필요하다. 이래서 어른들이 기술을 배우라고 하나보다. 유튜브에서 회사를 그만두고 도배사가 된 20대 여성을 봤다. 직장이 아닌 직업을 갖고 싶었다는 그녀의 말이 가슴을 후벼 팠지만, 그 뾰족함마저도 내 마음속 사직서를 들춰내진 못했다.


회사 선배들은 말한다. 나가면 개고생이라고. 여기는 전쟁터지만 밖은 지옥이라는 <미생>의 명대사를 들먹이며 겁을 준다. 이들에게는 퇴사가 실패의 아이콘이어야 한다. 이곳을 나가는 선택이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되어선 안된다. 그래야만 회사에 남아있는 사람들의 삶이 당당할 수 있으니까.


지금 다니는 회사에서 영원히 일 할 수 없다. 정년을 임종직전으로 정해놓는 기업은 없으니까. 하지만 지금 내 능력을 가장 후하게 쳐주는 곳은 여기다. 그래서 나갈 수가 없다. 아직까지는 안정된 급여와 반듯한 명함이 모든 걸 앞서니까. 나의 효용가치에 대한 불안감을 앞서고, 깊게 잠들어있는 나의 꿈을 앞서고, 진정한 행복을 찾아 나설 욕구를 앞선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이직이나 퇴사에도 적절한 시기가 있겠지. 하지만 인생에는 정답이 없듯이 사직서에도 정해진 순간은 없다. 내가 나를 허락하는 때가 적기다. 나는 언제쯤 나의 사표를 수리할 수 있으려나. 마법이 풀리면 어떤 모습의 내가 나타날까. 대사를 다시 써야겠다.


"들어올 때도 나갈 때도 네 마음대로 할 수 없단다"



#이건 TIP인가 TMI인가

퇴사보다 어려운 게 해고다. 대기업에서 직원 한 명을 해고하려면 굉장히 많은 절차가 필요하다. 엄청난 잘못을 한 게 아니라면 해직이 아닌 퇴직 절차를 밟는다. 심지어 회사에서 먼저 퇴사를 권유하기도 한다. 혹시 주변에 해고당한 사람이 있다면 일단 경계하라. 어떤 중범죄를 저질렀을지 모른다.


* 사진출처 : 뉴스1, 조석 <마음의 소리>

이전 07화 대기업 월급으로는 부자가 될 수 없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