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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학점이 더 높아야 돼"
대학교 4학년. 취업 준비에 갓 입문한 나에게 선배들의 조언은 한줄기 빛과 같았다. 저 말이 조금은 의아했지만 마냥 흘려보낼 수는 없었다. 그들은 많은 부분이 나와 비슷했다. 같은 학교 출신이었고, 같은 과정을 경험했고, 같은 여성이었다. 낮진 않았지만 눈에 띄게 높지도 않았던 내 학점. 슬슬 걱정이 되었다.
정말로 여성은 취업 시장에서 약자일까? 의심을 누르고 구직활동을 시작했다. 4학년 1학기, 상반기 인턴 모집공고가 올라왔다. 대부분 채용연계형 인턴십이었다. 경쟁률이 공채 못지않게 높았다. 주요 기업들에 모조리 지원서를 넣으… 려고 했으나 포기했다. 당시 졸업프로젝트를 병행하고 있었는데, 기업별로 자기소개서와 인적성 시험을 대비하기엔 시간이 부족했다. 지금 내게 필요한 건? 선택과 집중! 가장 큰 회사에 올인하기로 했다. 결과는 합격. 어라? 이게 된다고? 생각보다 할만한데? 대단한 오만과 착각의 시작이었다.
두 달 가까이 지속된 인턴 실습이 끝났다. 긴 여름 방학은 통째로 사라졌다. 곧바로 4학년 2학기가 다가왔다. 이제는 본격적인 취업 전선에 뛰어들 시간. 기다렸다는 듯이 하반기 대졸신입 채용 공고가 뜬다. 맛집 앞에서 줄 서있다가 우르르 들어오는 손님처럼 하루에도 몇 개씩 모집요강이 쏟아진다. 그런데 내 안의 정체 모를 여유로움이 감지되었다. 이게 대체 뭘까. 아니… 너 뭐 돼?
‘인턴 근무도 별 탈 없이 마무리했고, 정규직 전환율도 절반이나 되니까!’라는 속마음이 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큰 위기감 없이 최종 면접을 봤다. 결과는 불합격. 근자감이 아닌 자만심이었고, 안도감이 아닌 안일함이었다. 잠시 뒤, 함께 인턴 생활을 했던 사람들이 모여있는 단체 카톡방에 합불 소식이 올라왔다.
"전 운 좋게 됐네요. 다들 고생 많았습니다."
"전 떨어졌네요. 그동안 모두들 감사했습니다."
몇 명이나 붙었지? 합격자 수를 세어보았다.
하나, 둘, 셋, 넷...
사전에 공지된 대로 거의 절반이 최종 합격을 했다. 그중 여성지원자는 단 한 명. 당연히 전환될 거라 생각했던 언니도 불합격이었다. 저 사람도 상심이 크겠지? 지금 누굴 걱정하는 건지. 이제부터 내 코가 석자다.
나도 단톡방에 마지막 인사말을 남겼다. 합격자들은 하나같이 똑같은 위로를 전한다.
“아마 더 좋은 곳에 붙을 거예요!”
여유로움에서 나오는 진심인 걸까. 덕담을 주섬주섬 챙기고 '방 나가기'버튼을 눌렀다. 다시 0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사실에 막막함이 밀려왔다.
뒤늦게 하반기 공채 지원에 박차를 가했다. 발등에 불똥이 떨어진 상황. 상반기보다 더 열심히 준비했다. 어라… 이전과 분위기가 다르다. 맨 처음 관문인 서류전형부터 막힌다. 인턴 합격은 초심자의 행운이었을까? 슬슬 조급해졌다. 나랑 스펙이 비슷한 남자 선배들을 보면 서류까지는 무리 없이 통과되던데. 심지어 자기소개서 글자수도 다 채우지 않고 합격한 사람도 있었다.
자격증, 대외 및 교내활동, 외국어, 인턴 등등. 뭐 하나 채우지 않은 게 없는데… 나에게 뭐가 부족한 걸까. 뭘 더 해야 하는 거지. 학교 선배들이 해준 충고에 대한 의심이 풀리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다. 엇비슷한 역량으로는 부족했다. 남들보다 압도적인 무언가가 필요했다. 나에겐 한방이 없었다.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는데. 나는 다홍치마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다행히 한 곳에 합격이 되어 지금까지 밥벌이를 하고 있다. 그러나 여성에게는 취업의 문턱만 높은 게 아니었다. 진짜는 지금부터였다.
유리천장(Glass Ceiling)
충분한 능력을 갖춘 구성원, 특히 여성이 조직 내 일정 서열 이상으로 오르지 못하게 하는 ‘보이지 않는 장벽(invisible barrier)’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미국의 경제 주간지에서 1970년 만들어낸 신조어로 여성 직장인들의 승진 최상한선을 말한다. 또한 최근에는 여성뿐만 아니라 소수민족, 성 소수자와 같은 소수자들에게도 대상이 확대되었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유리천장. 회사원이 되기 전부터 저것에 대한 소문은 익히 들어왔다. 과연 유리천장은 실존할까? 사실 입사 초에는 관심이 아니었다. 임원까지 올라가겠다는 원대한 목표도 없었을뿐더러, 아주 먼 미래에 닥칠 일이라고 생각했다. 수습도 떼지 않은 신규직원. 언젠가 만날 장애물보다 당장 처리할 업무가 더 중요했다.
입사 후 10년이 흘렀다. 시간이 참 빠르다. 벌써 과장 승진이 코앞이라니. 곧이어 나를 포함한 진급 대상자들을 비교하는 말이 사무실 벽을 타고 들려온다. 부서 직원들은 인사담당자가 된 마냥 자기들끼리 순위를 매긴다.
"영수씨가 1순위겠지? 연차가 제일 높잖아"
"그렇긴 한데 현숙씨가 부서에서 제일 오래 일했잖아. 그간 프로젝트도 많이 했고"
"아직 어리고 결혼도 안 해서 밀리지 않을까? 나이 많은 광수씨를 먼저 밀어줄 듯“
“나이로 따지면 옥순씨가 제일 많은데… 육아휴직을 다녀와서 올해는 힘들겠지?"
눈앞이 살짝 뿌옇다. 안 보이는 건 아니지만 뚜렷하지 않은 느낌. 지문이 뭍은 것 같기도, 빗물 자국이 남은 것 같기도 하다. 지금 내 머리 위에 있는 게 바로 유리천장인가. 분명 그것은 '고위직'을 제한하는 장벽이라 했는데. 벌써부터 느껴진다고? 누구도 남자가 먼저 승진을 한다는 말을 하진 않는다. 중간관리자 승진의 우대조건에 성별은 없다. 하지만 불리한 조건의 대부분은 여성이 가질 수밖에 없는 것들이었다.
첫 번째, 나이. 입사는 어릴수록 좋다고 했다. 특히 여자는 그렇다고 그랬다. 어쭙잖은 휴학 생각은 접으라는 말을 수도 없이 들었다. 빠른 졸업만이 취업으로 연결되는 지름길이었다. 이제는 상황이 바뀌었다. 어린 나이가 문제다.
회사에서는 나이를 경력처럼 인정해 준다. 어리니까 앞으로 남은 기회가 많지 않냐는 말 같지도 않은 말을 한다. 남자는 대부분 군대를 다녀와서 취업을 한다. 평균적으로 여자 동기들보다 두 살 이상 나이가 많다. 입사 전에는 군 가산점이 있다면, 입사 후에는 나이 가산점이 있다. 동일한 연차의 남직원 사이에서도 어린 직원은 불리한 편이다.
두 번째, 결혼 및 자녀유무. 책임질 할 가정이 있는지, 외벌이로 혼자 가장 역할을 하는지, 딸린 식구는 몇인지. 가족관계가 무시할 수 없는 고려대상이 된다. 회사에서는 업무 능력으로만 판단해야지 왜 사적 영역을 끌어들이는 거지? 승진이 무슨 주택청약인가. 자녀가 많다고 가점이 높다니. 미혼 직원에게 신혼부부특공, 다자녀특공은 그림의 떡이다. 이런 식이면 계속 승진가점이 오르지 않겠군.
사내부부 중에서는 주로 남성이 먼저 승진이 되는 경우도 봤다. 동일한 연차의 직원이었고, 심지어 여자 선배의 평이 훨씬 좋았다. 남편의 승진을 조건으로 아내의 진급은 뒤로 밀렸다는 소문을 들었다. 과연 여자 선배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세 번째, 공백기. 휴직에는 여러 사유가 있다. 본인이 아파서, 가족을 돌봐야 해서, 배우자가 외국으로 파견근무를 가서 등등. 그중 가장 일반적인 것은 육아휴직이다. 대부분 휴직은 경력으로 계산해 주지만, 서류상 인정이 현실까지 반영되지 않는 경우도 많다.
2년간 육아휴직을 마치고 온 14년 차 여직원
vs 2년 동안 빈자리를 메꾼 12년 차 남직원
이 사례는 지인으로부터 들었던 실화다. 나는 여성이지만 미혼이라 나름 중립의 입장에 서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밸런스게임은 너무 어렵다. 양측의 입장이 십분 이해된다. 결과는 어땠을까? 실제로는 남직원이 먼저 승진을 했다. 아무래도 휴직은 마이너스 요소가 된다. 그리고 육아휴직은 남편보다 아내가 주로 사용한다. 아직까지는 그렇다.
예전보다 여성의 사회진출이 많아졌다고 한다. 실제로도 그러함을 느낀다. 이공계열 출신 직원이 많은 부서임에도 여성의 비율이 점점 늘어나는 게 보인다. 어떤 신입 기수에서는 여직원이 남직원보다 많기도 했다.
현재 회사 임원중에는 여자가 거의 없다. 오죽하면 <유퀴즈>에서 ’OO그룹 최초 여성 임원‘이라는 타이틀로 게스트를 소개하겠는가. 제한된 사회활동 때문일까, 제한된 장벽 때문일까. 전자라면 앞으로 나아질 여지가 많다. 후자라면 생각보다 많은 개선의 노력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아직은 중간관리자 급이라 약간의 노력만 더하면 충분히 역전 가능한 상황에 놓여있다. 하지만 앞으로는 어떨까. 내 동기들 중 여성 임원이 나오긴 하려나. 지금 내가 느끼는 것들이 착각, 망상, 피해의식일지도 모르겠다. 오히려 그런 것이라면 좋겠다. 나의 생각만 깨면 되니 말이다.
#이건 TIP인가 TMI인가
힘든 기피 업무는 남자 직원의 몪이라는 자세는 버리자. 야간 근무를 하거나, 무거운 짐을 나르거나, 어려운 사람들을 상대해야 하는 일들. 이런 태도가 천장을 단단히 만드는 원인이 되기도 하지 않을까? 장벽에 대한 부당함을 이의제기하기 위해서는 먼저 당당하게 일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