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사 후 가장 적응되지 않았던 조직문화. 바로, 사내정치다. 이걸 문화로 분류하는 게 맞나? 아직도 의심스럽다. 회사가 국회도 아니고 말이야. 정치는 왜 생기는 걸까. 꼭 참여해야 하나. 피할 수 없다면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 거지?
부끄럽지만 나는 국정에 큰 관심이 없는 국민이다. 이런 내가 사내정치에 적극적일 리 없다. 일보다 정치질이 우선되는 주객전도의 상황. 처음에는 한심해 보였다. 하지만 최고 권력자 앞에서 태연한 사람은 없었으니(있다 해도 아주 드물었다). 그의 말 한마디는 모두를 잔뜩 긴장하게 만들었다. 내 몸도 고장 난 장난감처럼 굳어버렸다. 나는 역시 보통의 인간이었다.
정치 문외한이라도 대통령 혹은 국회의원 선거는 빠짐없이 참여한다. 회사 내 정치도 그래야 할까? 가담하지 않더라도, 조용히 지내고 싶은 사람이라도 투표는 해야 하는가.
“당신의 상사에게 투표하세요”
투표용지가 우리 손에 들려있다.
사람이 2명 이상 있으면 '갈등'이 생기고, 3명 이상 있으면 '파벌'이 생긴다. 학교에서 친구들 무리만 봐도 그랬다. 셋이 함께하면 애매한 순간이 많다. 체육시간에 연습을 할 때도, 수학여행을 가는 버스에 앉을 때도. 전부 2명이 기준이다. 어쩔 수 없이 둘, 하나로 나뉘게 된다. 고작 3명인데도 분열이 생긴다. 대기업에는 훨씬 많은 사람들이 있다. 무리가 생기는 게 당연하다. 사내정치는 생길 수밖에 없다.
학교에는 교장선생님이 있다. 교내의 총책임자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학생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사람들은 따로 있다. 일진 무리다. 조직도 마찬가지 아닐까? 회장, 사장, 행장 등 최상위 결재자가 있지만, 우리의 회사생활에 밀접한 사람은 이들이 아니다. 실세 무리다.
"쟤내 왜 저렇게 막 나가?!"
소위말하는 좀 노는 친구들을 항상 꼴불견이다. 하지만 대적하진 못한다. 영웅심리가 존재할 자리에 소심함이 자리 잡은 나란 인간. 언제나 뒤에서 수군거리기만 한다. 면전 앞에서 불만을 드러낼 용기는 항상 부족하다. 대부분 회사 직원들도 그렇다. 뒷담은 하지만 앞에선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모두가 알고 있다. 그들이 인사에 큰 영향력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이 문화(?)를 뿌리 뽑을 사람은 없다. 결국, 지속될 수밖에 없다.
드라마 <미생>에도 사내정치는 어김없이 등장한다. 사장라인과 전무라인으로 나눠진 파벌싸움. 또렷하게 흑과 백이 되는 직원들. 그리고,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회색빛 그림자 같은 사람들. 개개인의 참여도는 다르지만, 이를 완전히 외면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피하기만 한다고 능사가 아니야.
정치가 회사에만 있나?
인생 자체가 정치야.
익숙해져야지.
그래야 조금은 쉽지.
- <미생> 천과장의 대사 -
익숙해져야 한다. 받아들여야 한다. 어쩌면 내가 정치질을 폄하하는 이유는 노련하지 못하기 때문 아닐까. 정치는 인간관계에서 시작한다. 원만한 대인관계는 사회생활의 필수 아이템이다. 그럼 사내정치도 업무의 일부인가. 그렇다면 정치에 대응하는 능력도 키워야 할까?
입사 후, 부서에 배정되기 전. 나는 정체불명의 단체 카톡방에 초대되었다.
OO대학교 동문 모임방입니다.
신입 분들 초대했습니다!
내 번호는 어떻게 알았는지, 내가 이 학교 출신인 건 어떻게 알았는지. 아니? 나를 어떻게 알았는지!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 반갑다며 인사를 해준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낯선 회사. 같은 학교 선배들은 생각보다 든든한 힘이 되었다.
“정문 앞에 OO돈가스 아직 있어요? 와 대박이네!“
학교 근처에 있던 유명한 식당 하나로도 공감대가 형성된다. 재학시절 한 번도 마주친 적 없는 사람들. 하지만 정체 모를 연대감이 훅 생겨난다.
지방에서 올라온 동기들은 향우회까지 초대된다. 머나먼 서울에서 타지 생활을 하는 사람들. 같은 지역 출신 직원은 묘한 동질감을 불러일으킨다. 이곳에선 사투리가 곧 표준말이다. 출신지의 크기가 작아질수록 결속력은 높아진다. 마치 옆집에 살았던 이웃사촌 같달까. 지연도 학연 못지않은 끈끈함이 있다.
혈연은 학연이나 지연이 비해 흔하진 않다. 그러나 연결 강도는 최상이다. 피는 물보다 진하니 말이다. 형제가 같은 회사에 입사하는 경우도 있고, 부모님이 계열사에 근무하는 경우도 있다. 한 다리 건넌 혈연관계는 조금 더 흔하다. 예를 들면, 누구의 조카 혹은 누구의 사위 정도? (직계 가족은 입사를 제한하는 기업도 있다)
업무는 등한시하고 정치질만 하는 직원들은 눈엣가시다. 그들에게서 내동댕이 쳐진 일은 다른 직원에게 고스란히 넘겨진다. 회사를 휘젓고 다니는 게 꼴불견이다. 하지만 이들이 지닌 힘을 외면할 수 없는 내가 애석하다.
모두가 얄미운 건 아니다. 실세라 부르는 무리에는 업무까지 잘하는 사람도 많다. 일과 정치,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사람은 그저 존경스럽다. 배우고 싶은 부분도 많다. 김연아 선수가 예술성과 기술성을 모두 갖춘 것처럼, 손흥민 선수가 스피드와 노련함을 겸비한 것처럼. 업무능력과 사교능력을 모두 갖춘 직장인. 사실 부럽다.
사내정치의 영향력은 어디까지 허용 가능한가? 적당한 선은 있는 걸까? 항상 애매하고 매번 어렵다. 나는 어느 한쪽의 줄도 잡지 않는다. 그저 어느 방향으로도 떨어지지 않기 위해 아슬아슬 줄을 탄다. 앞서 말한 회색빛 그림자가 바로 나다.
사내정치에도 투표는 해야 할까? 그저 지나가는 ‘직원 1’이고 싶다. 있는 듯 없는 듯 지내고 싶은데, 그렇다고 없는 사람처럼 보이고 싶진 않다.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하고 이중적이다. 그래도 기권표는 안 되겠지? 오늘도 투표용지를 들고 고민한다.
#이건 TIP인가 TMI인가
비위를 맞추려는 목적으로 내뱉는 속 보이는 말은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하지만 진심을 전하는 말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꼭 필요하다. 도움에 대한 감사, 업무 노고에 대한 칭찬, 개인적 관심에 대한 감동들. 혹시 쑥스러운 말을 못 하는가? 혹은 아부로 보일까 봐 걱정되는가? 그래도 해야 할 말을 감추진 말자. 건강한 표현은 기본적인 예의니까.
* 사진 출처 : tvn <미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