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수화물, 단백질, 지방은 인간에게 필요한 주영양소다. 이를 3대 영양소라 한다. 그런데 직장인에게는 추가로 요구되는 3요소가 더 있다. 카페인, 니코틴, 알코올이다. 이것들은 근로자의 필수영양소다. 주기적으로 섭취하는 카페인, 습관적으로 흡수하는 니코틴, 간헐적으로 수용하는 알코올. ‘영양소’는 아닐 수 있으나 ‘필수’ 임은 확실하다.
술, 담배, 커피는 어쩌다 직장인의 소울푸드가 됐을까? 모두 우리네 영혼을 토닥여주는 기호식품들이다. 종교인에게 믿음, 소망, 사랑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는데. 세 가지 중, 당신의 사랑은 무엇인가. 술? 담배? 커피? 아니면 셋다?
출근 전, 사무실보다 먼저 들러야 할 곳이 있다. 목적지는 회사 근처 카페. 전쟁터에 나가기 위해 총알을 챙기듯, 나를 장전시킬 커피를 사러 간다. 메뉴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아침을 먹지 못했다면 라떼도 괜찮다. 우유가 들어간 커피는 점심 전까지 나의 배를 든든하게 채워줄 테니 말이다.
나 말고도 음료를 기다리는 회사원들이 빼곡하다. 역시 다들 이곳으로 모이는군! 지잉-. 울리는 진동벨을 내어주고 커피를 받아 든다. 컵홀더를 끼웠지만 손바닥에 냉기가 느껴진다. 싸늘하다. 잠들어있는 정신을 깨울 첫 번째 자극이 온다.
달그락달그락-. 컵 안에 든 얼음이 서로 부딪치며 소리를 낸다. 현악 3중주보다 맑고 청아한 음계가 들린다. BGM의 도움으로 정신을 환기시킨다. 이렇게 두 번째 자극을 고막으로 받아들인다. 커피와 얼음이 담긴 플라스틱컵을 살짝씩 흔들며 사무실로 걸어간다. 너무 시끄럽지 않게, 하지만 커피가 빨리 냉기를 품을 수 있게. 내 손목은 적절한 스냅을 알고 있다.
어느 정도 시원해진 커피를 들고 자리에 앉았다. 이제는 수혈할 차례. 빨대에 입을 대고 중력을 거슬러 커피를 끌어올린다. 입 안을 살짝 코팅한 차가운 커피가 식도를 타고 내려간다. 각성효과는 가장 먼저 안면으로 향한다. 풀렸던 눈이 살짝 또렷해진다. 이게 바로 세 번째 자극이다. 일어나라고 방문을 두들기는 엄마의 주먹처럼, 커피 한 모금이 혈관을 타고 내려가며 모든 장기들에게 노크를 한다. 우리 몸에는 헤모글로빈보다 카페인 수치가 더 높은 게 분명하다.
탕비실을 가득 채운 카누와 맥심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인스턴트커피는 찬밥신세다. 대신 그 자리는 커피머신이 대신한다. 부웅-. 커피를 뽑아내는 기계음이 이상하게 거슬리지 않는다. 이윽고 주변에 커피 향이 퍼진다. 향기를 내뿜는 기계라니.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카페에서 매일 사 먹는 한 잔의 커피. 맛과 향이 남다른 고급 커피캡슐. 이는 직장인에게 허용된 하루치 사치다. ‘커피값만 아껴도’라는 가정법은 직장인에게 언급금지. 그 마저도 허락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일할 수 없다. 커피는 낭만이 아니라 생존이다.
“자! 이제 업무를 시작하자”
오늘도 카페인이 명령한다. 컴퓨터의 전원은 내 손이, 나의 전원은 커피가 켠다.
담배는 들숨이 먼저다. 일단 빨아들여야 내뱉을 수 있다. 들어온 것을 내보내는 담배의 원리.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서 이 방식을 활용한다. 근무 중에 내 안을 침입한 걱정과 근심들을 한숨에 날려 보내기 위해 담배 한 개비를 손에 쥔다.
상사에게 꾸지람을 들었을 때,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개인적인 문제가 회사에서도 떠오를 때 등등. 마음을 해롭게 하는 것들을 내쫓기 위해, 몸에 해로운 담배를 받아들인다. 육체의 건강을 담보로 정신의 정화를 선택한다. 꽤나 아이러니하다.
부드러운 연기가 입술을 스친다. 입 밖으로 새어 나온 하얀 연기는 내가 받은 스트레스의 잔상이다. 이것들은 눈앞을 뿌옇게 만들다가 이내 곧 바람에 휩쓸려 사라진다. 잠시나마 머릿속이 비워진 것 같다. 담배를 피우는 시간 동안 마음을 다잡기도 하고, 생각지도 못한 묘책이 떠오르기도 한다.
특별한 이유 없이 습관적으로 담배를 피우는 직원들도 있다. 하지만 기분이 좋지 않을 때 담배를 더 찾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금연했다던 직원의 책상 위에 갑자기 라이터가 보인다면? 최근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그들을 의지박약이라 놀리진 말자.
"오늘 한 잔 해야지!!! 내가 쏠게!!!"
"오늘 한 잔 해야지... 내가 살게..."
참으로 희한하다. 회사원들은 기쁜날에도 슬픈날에도 술을 찾는다. 성혼선언문에 나오는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몸이 아플 때나 건강할 때나' 서로를 사랑하겠다는 문구는 술에도 해당하는 걸까. 알코올은 축하도 위로도 모두 해결가능한 2-way 아이템이다.
정체불명의 화학물질을 머금은 액체. 굳이 마셔보지 않아도 느낌이 온다. 이건 몸에 굉장히 해로울 것이다. 역시나 술병에 경고문구가 적혀있다. 과도한 음주는 간암을 유발하고 기형아 출산의 위험이 있다는 어마무시한 으름장. 하지만 이에 굴하지 않는다. 술은 취하려고 마시는 것처럼, 몸에 이로우려고 마시는 사람은 한 명도 없으니까.
식도로 소주 한 모금을 넘긴다. 즐거우면 즐거운 데로, 우울하면 우울한 데로 한 번에 털어낸다. 넘기는 순간 미간이 찌푸려진다. 하지만 괜찮다. 우리 앞에 놓인 각양각색의 안주들. 나는 안주를 먹으려고 술을 마시는 사람이다. 쓰디쓴 소주는 달콤한 안주를 먹기 위한 초석. 금세 입 안은 중화된다.
술은 참 희한하다. 평소에 하지 못했던 말과 행동을 가능하게 한다. 막았던 수문을 개방하듯 마음의 문이 스르륵 열린다. 그곳으로 여러 감정이 쏟아진다. 간지러워서 말하지 못했던 감사함, 소심하게 참아왔던 섭섭함, 억눌렀던 불만과 아쉬움. 망설임 없이 흘려보낸다. 술을 마시면 그럴 수 있다. 아니, 그래도 된다. 이미 상대방의 문도 열려있다. 기회는 지금 뿐이다.
커피 한 잔, 담배 한 대, 술 한 모금.
소리 없이 찾아와 어느새 우리 곁을 지키는 녀석들. 이 친구들은 생각지도 못한 존재가 된다. 업무를 도와주는 일손, 상처를 치료하는 주치의, 희로애락을 함께하는 동반자. 모습도 참 다양하다.
위염 증상이 있으니 커피를 멀리하라는 의사의 말을 듣고 디카페인을 찾아 마신다. 담뱃갑에 실린 경고사진에 뜨끔하여 전자담배로 갈아탄다. 간수치가 좋지 않다는 건강검진 결과에 실리마린(간 영양제)을 주문한다. 우리는 이들과 절교할 생각이 없다. 어떻게든 공생할 방법을 모색한다.
10년이 지나니 이제는 놓아줘야 하나 싶기도 하다. 몸 상태가 예전만 못하다. 호기롭게 영원히 같이 놀자고 하기엔 육체적인 위험부담이 너무 크다. 이 녀석들 없이도 기쁨을 만끽하고 슬픔을 털어낼 방법을 찾아야겠다. 그동안 고마웠다 애들아! 이제 우리 가끔씩만 만나자!
#이건 TIP인가 TMI인가
커피는 즐기지 않고, 담배는 싫어하고, 술은 멀리하는 직장인도 있다. 그게 바로 나다.
* 사진 출처 : 서울신문 나우뉴스, 파이낸셜뉴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