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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독자 Oct 06. 2024

사이다 같은 MZ세대 회사후배


몇 년 전, 팀장급 이상 직원들 자리에 똑같은 책이 한 권씩 놓여 있었다. 제목은 <90년생이 온다>. 단체 공구는 아니었고, 회사에서 일괄로 나눠준 것이었다. 당시 재임 중인 대통령도 청와대 전 직원에게 이 책을 선물했다고 한다. 90년대생, 핫한 존재임은 분명했다.



MZ세대는 우리가 잡아야 하는 핵심고객이자, 함께 일해야 하는 예비 동료였다. 회사는 긴장한 걸까? 아니면 변화를 받아들이는 시늉인가? MZ에서 M을 맡고 있는 나는, Z인 그들이 궁금해졌다. 사회에서 10살 차이까지는 친구라는데, 고작 5~6살 어린 친구들이 얼마나 다르려나 싶었다. 이것은 경기도 오산이었다. (이런 아재개그가 그들과 멀어진 이유 중 하나다)




저는 무색무취의 물입니다

신입 시절, 나는 맹물 같은 직원이었다. 빨간색 잉크를 떨어트리면 빨간 물이 되고, 파란색 잉크 한 방울이면 파란 물이 됐다. 고유의 색도 특유의 향도 없는, 무색무취. 그것이 내가 조직에 적응하는 방식이었다. 온몸으로 새로운 문화와 업무방식을 받아들였다. 수용하는 과정에서 납득과 이해는 사치였다. 덕분에 빠르게 회사에 스며들 수 있었지만, 애석하게도 자아는 더 빠르게 사라졌다.

 

리얼 MZ, 그러니까 90년대 중반 이후에 태어난 세대를 만나기까지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내가 비교적 어린 나이에 취업을 했고, 첫 직장을 갖는 시기는 점점 늦어지는 추세였으며, 다른 회사에서 경력을 쌓고 입사하는 ‘중고신입’이 늘어나는 현상도 한몫했다.


그 사이에 나는 많은 변화를 거쳤다. 맑은 샘물에서 흙탕물이 되었다가, 다시 정화를 거쳐 수돗물이 되었다. 미네랄이 풍부했던 순수한 생수의 모습은 사라졌다. 오래 지속된 약품 처리로 은근한 소독약 냄새만 남아있을 뿐이다. 하지만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나는 맹물이었다.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 또래 직원들이 그랬다. 어느덧 우리는 중간관리자급 직원이 되었고, 드디어 그들이 사무실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MZ세대를 가까이 영접하는 순간이 다가온 것이다.




날 물로 보지 마

걱정과 다르게 MZ세대는 조직에 잘 융화되었다. 상향평준화 된 똘똘함, 주어진 일에 대한 책임감, 상사와 가벼운 농담도 가능한 유머러스함. 이것이 우리가 우려하던 리얼 MZ의 모습이란 말인가? 괜찮은 인재들만 선별한 건지, 매스컴에서 그들을 과장되게 표현한 건지 아리송했다.


MZ세대는 호불호가 확실해서 자기주장이 뚜렷하다던데. 색깔은커녕 그저 투명해 보였다. 나와 비슷한 맹물 같았다. 그들은 스스로 수긍되는 상황에서는 잔잔한 물처럼 보였지만, 그렇지 않은 때에는 본색이 드러났다.


평범한 어느 날, 퇴근시간이 임박한 무렵이었다. 갑자기 업무 시스템에 문제가 생겼다. 원인은 모르지만 해결은 해야 하는 다급한 상황. 담당자 혼자 대응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주변 직원들은 급히 자신들의 업무를 마무리한 후 문제가 생긴 담당자의 자리를 병풍처럼 에워쌌다. 웅성거리는 소음이 잠시 잦아든 그때, 신입 후배가 가까스로 입을 뗐다.


“죄송하지만, 저 먼저 퇴근해도 될까요?”


죄송한 것 치고는 꽤나 당찬 신규직원의 패기에 주변 사람들은 모두 굳어버렸다. 단체 얼음땡 놀이가 시작된 셈이다. 누가 와서 땡-하고 등을 두드려야 될 것 같았다. 몰래 떡이라도 훔쳐먹은 듯, 아무도 입을 뻥긋하지 못했다.


곧이어 MZ직원이 말을 이어갔다. 오늘 테니스 수업을 예약해 두었는데, 변경 가능한 시간이 지나 취소가 불가하는 이유를 덧붙였다. 당당함의 배경에는 ‘나는 그 업무의 담당자가 아니니까 퇴근해도 괜찮지 않을까’라는 사고가 깔려있었다. 구구절절한 사연은 논리적으로 나를 설득시키기에 충분했지만, 이성의 끈을 놓게 만들었다.


너님 제정신이세요? 그쪽이 무슨 샤라포바 세요, 조코비치 세요, 페더러 세요? 당장 윔블던 대회라도 나가는 거세요? 선배들은 뭐, 저녁 없는 삶을 추구해서 이렇게 남아있는 줄 아세요? 눈치가 없는 거세요, 안 보는 거세요, 뭐세요!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 그래요. 먼저 들어가요”


결국 우리는 인자한 척을 하는 선배가 되었다. 애써 지은 미소를 느꼈는지 모르겠지만.



이미 알고 있다. 그 직원이 남아있어도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리를 지키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아까운 강습비를 날리더라도 수업을 빠지는 게 옳다고 여겼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금까지 그래왔고, 사람들은 자신이 걸어온 길을 정답으로 믿기 마련이니까.


뽀글-. 작고 동그란 공기방울이 보인다. 이제 보니 한두 개가 아니다. 물에 기포가 있을 리 없잖아! 그들은 확실한 탄산이었다. 톡 쏘는 공격력을 갖고 있는 사이다. 덕분에 목젖이 어리어리하다.




너희들... 흔들면 폭발할 것 같아

MZ의 당돌함에 가장 당황한 사람들은 상급자들이었다. ‘나한테 함부로 하는 부하직원은 네가 처음이야’. 이런 류의 느낌이랄까. 참지 않는 말티즈처럼 사소한 조언도 반박할 것 같은 아우라. 지금은 잔잔하지만 흔들었다간 펑-하고 터질 것 같은 두려움. 나의 윗사람이 나의 아랫사람을 두려워하는 모습은 진귀한 광경이었다.

 

상급자의 태도는 풍선효과를 일으켰고, 옆에 있던 중간관리자급 직원들이 피해를 입기 시작했다. 상사는 마음에 들지 않는 MZ직원의 행동을 바로잡기 위해 중간급 직원을 이용했다. ‘직속 부하직원 관리’라는 명목을 들이밀며 우리를 쪼아댔다. 똑 부러지는 MZ세대에게 직장 내 괴롭힘으로 신고당하는 건 무섭지만, 그들의 행동을 이해할 아량은 부족했다.


보수적인 조직에서는 내리 갈굼이 필연적이었다. 대대로 내려오던 고통 같은 전통(?)이 MZ세대에서 끊긴 셈이다. 충고 한 마디를 제대로 하기 힘들뿐더러, 들어도 별 타격이 없어 보였다. 최대한 둥글둥글 우회적으로 표현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MZ는 스스로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행동의 기준이 우리들과 다른 것 같았다. 또한 그런 대우를 참지 않는 모습도 생소했다. 언제 터지는 건지, 어디로 터지는 건지, 왜 터지는 건지, 아무것도 몰랐다. MZ에 대한 이론은 실전에서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들을 대하는 것은, 맨손으로 지뢰를 해체하는 것과 비슷했다. 쉽게 보고 덤벼들었다간 어떤 폭발이 일어날지 몰랐다.




고구마를 먹을 땐 사이다가 필수

이런 MZ직원들에게도 선한 영향력이 있었으니, 자신의 소신을 당당하게 말할 줄 아는 당찬 자세였다. 따갑게만 느껴지던 기포는 때때로 갑갑함을 뚫어주는 기폭제처럼 느껴졌다. 내가 차마 꺼내지 못했던 말을 그들이 대신해 주었다.


"제가 술을 잘 못합니다"


팀 회식 자리에서 내뱉은 MZ직원의 한 마디. 놀라웠다. 공손함 뒤에 가려진 당돌함이라니. 소주병을 집은 차장님의 손이 순식간에 방향을 잃었다. 그와 다르게 MZ직원의 표정은 흔들림이 없다. 장난식으로 술을 강요했다간 큰 화가 닥칠 것 같다. 민망하니까 뭐라도 따라주긴 해야 될 텐데. 결국 차장님은 잔에 사이다를 채워준다. 유리 표면에 기포가 몽글몽글 맺혀있다.


 

한 순간에 기세가 꺾이는 상사를 보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니, 이렇게 순순히 물러난다고? 차장님 완전 푸딩 같은 사람이었잖아? 술을 못 마신다고 말하면, 주량은 마실수록 늘어난다는 기적의 논리를 펼쳤던 사람이다. 몸이 안 좋다고 말하면, 알코올로 소독하는 게 직방이라며 헛소리를 늘어놨던 인간이다. 그랬던 그가 리얼 MZ 앞에서는 이빨 빠진 호랑이다.

  

처음엔 통쾌했다. 본인보다 한참 어린 직원에게 한 방 먹은 모습이. 쌤통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감정의 화살은 나를 향했다.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나는 왜 그동안 저렇게 말하지 못했을까? 왜 주는 술을 꾸역꾸역 받아 마시고, 가기 싫은 회식에 끌려다니고, 2차도 모자라 3차까지 자리를 지켰을까. 왜 휘둘렸을까. 왜 의사표현을 하지 못했을까.


나의 속마음을 대변해 주는 MZ직원들. 덕분에 가끔은 속이 개운하다. 몸에 있는 모든 구멍으로 청량한 바람이 들어오는 듯하다.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지금은 그들을 방패 삼아 뒤에 서있었지만, 언젠가 나도 정당한 표현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용기가 생겼다.


MZ는 나를 당혹시키지만 동시에 나의 상사도 당황시킨다. 그들의 일관성 있는 태도. 너무 상쾌하다. 물론 가끔은 시원하다 못해 시릴정도지만… 뒤에서 궁시렁거리는 나보다, 앞에서 항변하는 그들이 나은 것 같기도 하다.

 



알파벳만 다를 뿐, 우리도 누군가의 MZ였다. 모두 자신들이 겪어온 시대를 기준으로 세우고, 올챙이였던 시절을 떠올리지 못할 뿐이다.


맹물을 보고, 누군가는 말했다.

"요즘 애들은 보리차 같은 구수함이 없어"


보리차를 보고, 또 누군가는 말했다.

"요즘 애들은 쌍화탕 같은 진득함이 없어"


쌍화탕을 보고, 아마 허준은 말했을 것이다.

"저것도 탕약이라고... 쯧쯧"


쌍화탕도, 보리차도, 맹물도, 사이다도. 모두 시대의 변화에 따라 적응한 인간의 모습이다. 틀린 오답도 없고, 기준이 되는 모범답안도 없다.


이제 곧 MZ를 잇는 알파, 잘파세대가 온다고 한다. 앞으로 생겨날 수많은 세대들. 우리는 변화를 받아들이고 공생을 준비해야 한다. 열린 마음을 기본값으로 설정하자. 윗 세대들이 우리를 받아줬던 것처럼.



#이건 TIP인가 TMI인가

요즘 애들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칭찬은?

정답 : “넌 참 요즘 애들 같지가 않아”


* 사진출처 : 연합뉴스, 게티이미지뱅크, 넷플릭스 <수리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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