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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독자 Oct 13. 2024

계단으로 출근하는 직원을 보았다


띠익-.

사원증을 태깅하고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여섯 대의 엘리베이터 앞에 직원들이 빼곡하게 서있다. 누가 보면 여기에 흑백요리사 맛집이라도 있는 줄 알겠네. 출근시간이 임박할수록 사람은 많아지고, 로비는 점점 포화상태가 된다.


철컹-. 끼익-.

갑자기 구석에서 무거운 철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다름 아닌 비상구다. 저 안에는 비상계단뿐이다. 비상계단은 비상시에만 쓰는 계단이 아닌가(물론 개인적인 기준이다). 불이 나거나, 지진이 발생하거나, 엘리베이터가 말썽일 때만 이용하는 것. 그런데 저걸 출근계단으로 용도변경한 사람이 있다니. 심지어 그분의 근무지는 8층이었다.


같은 소속, 비슷한 업무, 고만고만한 월급. 회사원들의 삶은 거기서 거기라고 생각했다. 다들 나처럼 게으를 거라고. 다들 나처럼 의욕 따위는 잃어버린 지 오래라고. 남들도 그럴 거라는 위안을 핑계 삼아 당당한 귀차니즘 인간으로 살아왔다. 하지만 회사에는 부럽도록 부지런한 무서운 직장인들이 있었다.




출근 전, 운동하는 직장인

아직은 어두운 바깥세상. 지독하게 거슬리는 알람이 울린다. 6시 30분이 되었다는 소리다. 지금 일어나면 여유로운 아침을 맞이할 수 있다며 연신 울어댄다. 하지만 내 몸은 천근만근. 한가로움보다 한숨의 잠을 택한다. 눈을 뜨지도 않은 채 알람을 멈춘다. 좀만 더 자자. 이내 다시 눈을 감는다.


30분 뒤로 맞춰놨던 알람이 울린다. 3분밖에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믿을 수가 없다. 양심이 있으면 이제는 일어나야 한다. 지각을 면하기 위한 마지막 기회다. 그래, 일어나자! 대신 한 번에 일어나면 기립성 빈혈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천천히 일어나자. 몸을 이리저리 뒹굴거린다. 벌써 10분이 흘렀다. 당장 침대를 박차고 나와야 한다. 시원한 기지개가 아닌 애통한 한숨을 내뱉으며 터벅터벅 욕실로 걸어간다.


그런데, 모두가 나와 같은 아침을 보내는 건 아니었다. 어떤 직장인은 출근 전에 운동을 한다. 그러려면 최소 30분에서 1시간은 일찍 일어나야 한다. 이건 미라클모닝이 아닌가. 사실 그것만으로도 놀랍다. 그런데 새벽기상에 운동까지 한다? 이건 선을 넘었다. 열정의 단계가 마라맛이다. 이건 ‘마라’클모닝이다.


 



점심시간, 일하는 직장인

오전 근무시간에 꼭 해야 할 일이 있다. 점심메뉴를 정하는 것이다. 10시가 지나면 슬슬 머릿속에 음식들이 떠오른다. 아… 오늘 뭐 먹지? 이건 어제 먹어서 패스, 저건 저녁 회식 메뉴랑 겹치니까 패스. 옷을 사도 입을 게 없는 것처럼, 새로운 식당이 생겨도 마땅히 갈 곳이 없다. 회사 근처 식당은 항상 그 나물에 그 밥. 하지만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최선의 식사메뉴를 찾아낸다.


직장인에게 점심이란 그런 것이다. 오전을 견디게 하는 원동력이며, 오후를 버티게 하는 에너지원이다. 점심시간은 회사에서 유일하게 자유가 허락된 순간이다. 누군가는 밥을 먹고 산책을 하고, 누군가는 은행 업무를 보러 가고, 또 누군가는 아픈 몸을 이끌고 병원에 간다. 하루 중 같은 1시간이라도 중식시간의 가치는 그 농도가 다르다. 시간이 그냥 금이라면, 점심시간은 24K 순금이다.


그런데, 이 시간에 일을 한다고? 개인적인 내 일이 아니라, 회사에서 하는 내 일을 한다니. 이건 도를 넘는 행위다. 음식을 기만하고, 자유를 훼손하고, 동료를 무시하는 행동이다. 불 꺼진 사무실에서 환하게 빛나는 모니터 한 대. 타닥타닥-. 나지막이 울리는 키보드 소리. 공포스럽다. 불빛에 비친 직원의 얼굴이.





퇴근 후, 부업하는 직장인

얼마 전, 인사부에서 징계 관련 문서가 내려왔다. 어떤 직원이 개인 블로그에 회사 업무와 관련된 내용을 등재했고, 누군가의 신고로 적발됐다고 한다. 해당 직원에게 감봉 3개월의 견책 처분을 받았다.


내가 근무하는 곳은 부분적으로 겸직을 허용하고 있다. 회사의 이익에 반하지 않는다면 개인 활동은 제지하지 않는다. 사실 회사 업무로도 바쁘기에 겸업을 하는 직원 자체가 적은 편이다. 그래서인지 이번 징계는 직원들 사이에서 꽤나 이슈였다. 도대체 무슨 내용을 올렸길래 그럴까. 어떻게 회사를 다니면서 파워블로거까지 될 수 있었을까. 모두가 셜록 홈즈와 명탐정 코난이 되어 소문의 블로거를 찾기 시작했다.


해당 블로그에서 문제가 된 게시물은 지워진 상태였다.  그런데 나는 다른 부분에 놀라고 말았다. 생각보다 규모가 큰 인플루언서 블로거였기 때문이다. 거의 매일 올라오는 게시글들. 취업, 여행, 일상, 맛집 등의 장르를 가리지 않는 영역. 그 직원이 얼마나 바쁜 삶을 살고 있는지 느껴졌다.


물론 사내 기밀에 가까운 내용을 언급한 것은 매우 잘못된 행동이다. 징계를 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나는 견책의 정도보다 해당 직원의 에너지에 계속 놀라움을 느꼈다. 퇴근하고 이런 걸 할 기운이 있나? 다들 나처럼 누워만 있는 게 아니었구나. 이런 동력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업무 시간에 한 건 아니라고 생각하겠다)




비슷한 직장생활을 한다고 유사한 일상을 사는 건 아니었다. 내가 쉴 때, 내가 놀 때, 내가 잘 때, 누군가는 회사원이 아닌 다른 자신의 모습을 키워나갔다. 그들이 자신을 가꿀 때 나는 무얼 했나.


무서운 사람들이라 칭했지만 사실 그들의 행동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나빠지는 건강을 지키기 위해 운동을 하고,

야근을 피하기 위해 점심시간에도 업무를 붙들었고,

사라지는 자아를 찾기 위해 부캐를 만들었을 것이다.


평범하다고 생각하지만 비범한 사람들. 사실 저런 행동을 하지 않더라도 밥벌이를 하는 모든 직장인들은 대단한 사람들이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출근하고, 매일 주어진 임무를 완수하고, 매일 놀고 싶은 욕망을 억누른다. 나만 그저 그런 하루를 살고 있다며 자책하진 말자. 우리는 이미 많은 것을 해내고 있다.



#이건 TIP인가 TMI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갓생을 살고 싶은 마음은 항상 굴뚝같다. 몸과 마음이 따로 노는 이 생활을 언제 청산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어느 날 문득, 지금까지 직장생활을 정리해보고 싶어 졌습니다. 그렇게 <혼돈백서> 연재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세상에는 다양한 직장인들이 있습니다. 9 to 6를 지키며 사는 사람, 사무실이 아닌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 사장이면서 직원의 역할도 해야 하는 스타트업을 시작한 사람.


독자분들이 남겨주신 댓글을 항상 유심히 봅니다. 공감을 얻을 땐 희열을 느끼며 즐거웠지만, 가끔은 저의 편협한 시각과 경험에 부끄러움을 얻기도 했습니다. 댓글창은 철저히 여러분들의 공간이기에 저의 개인적인 생각을 남기는 행동은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항상 감사한 마음으로 정독하고 있다는 사실만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이 글을 마지막으로 <혼돈백서>를 마치려 합니다.

저를 포함한 세상의 모든 직장인 분들 파이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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