챕터 7. 영양 : 첫 칸과 절반 접시

by 박정효

토요일 늦은 오후, 온유는 편의점 과일 코너 앞에서 멈춰 섰다.

플라스틱 컵 속 딸기 몇 알이 6,900원. 바로 옆 냉장고에선 딸기 우유가 손짓했다—1,900원. 손이 두 칸 사이에서 오락가락했다. 머릿속에 짧은 줄이 그어졌다. 신선함 vs 가격, 지금의 배고픔 vs 내일의 몸.


잠깐 눈을 감고 몸의 느낌을 먼저 체크했다. 입 안이 자꾸 마르고, 피부에 작은 열감이 올라와 있던 한 주. 가공식품으로 얼렁뚱뚱 채운 저녁이 많았고, 밤마다 달달한 것을 찾았다. ‘말랐다’는 말을 자주 듣지만, 샤워 후 거울 속 옆구리의 붓기와 아침의 무거운 눈꺼풀은 다른 사실을 말했다.


온유는 결국 컵과 우유를 모두 내려놓았다. 대신 매대에서 귤 두 알과 바나나 하나, 그리고 플레인 요거트 작은 컵을 집었다. 계산대에 올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완벽은 아니어도, 내일의 나한테 면목이 있는 선택.


코워킹으로 돌아오자마자, 편의점 앞에서 ‘오늘의 색 체크인’으로 보낸 셀피에 대한 해원 선생의 답장이 도착했다.

— 얼굴에 열이 조금 올라와요. 물, 색, 따뜻함 하나만 챙겨요.


밤, 합창 연습을 마치고 선생과 김밥 집에 들렀다. 반찬이 내려오자 두 사람의 젓가락이 정반대로 움직였다. 온유는 소시지 볶음으로, 해원은 시금치 나물로.


“젊었을 땐 나도 아무거나 먹었지. 회의실에서 빵, 밤에 라면.” 해원이 웃었다가 잠시 멈췄다. “그러다 마흔다섯에 응급실을 갔어. 위가 타들어가듯 아파서. 그때 의사가 말하더라—‘선생님, 위는 말이 없지만 기록은 남깁니다.’ 그날 이후로 내 식단의 첫 칸을 바꿨지.”


해원은 손가락으로 빈 접시에 네모를 그렸다.

“이 칸은 씻어서 바로 먹을 수 있는 것들이 들어가. 방울토마토, 오이, 과일, 삶은 달걀. 그리고 한 칸은 따뜻함—국 한 그릇, 차 한 잔. 나머지는 색으로 채우고. 거창한 금지 규칙보다 먼저 닿게 하는 배치가 중요해.”


그 말이 유난히 또렷하게 들렸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냉장고 문을 열었다. 윗칸에 있던 소스 병과 오래된 잼을 내려놓고, 투명 용기에 방울토마토·오이 스틱·삶은 달걀을 채웠다. 현미밥 소포장 두 개를 쿠션처럼 옆에 끼웠다. 문을 닫자 ‘딸깍’ 하는 소리와 함께 마음 한 켠이 정리됐다.


일요일 오후, 온유는 스마트폰 메모를 열었다. ‘달달한 게 당길 때’라는 제목 아래 세 줄의 변주를 적었다.

1) 물 먼저 반 컵.

2) 색 두 가지—귤 한 조각, 오이 한 줄.

3) 그래도 허기가 남으면 요거트 + 바나나 반 개.

‘딸기 대신 딸기 우유’로 끝나던 선택지가, 다른 길을 갖게 되었다.



같은 무렵, 회사 근처 유명 삼계탕 집. 비에 김이 오른 유리창 너머로 사람들이 손바닥으로 동그라미를 그렸다. 뚝배기에서 팔팔 끓는 소리가 테이블마다 박동을 만들었다. 토요일 오후 4시 회식이라는 공지는 일주일 전 단톡방에 올라왔다. 바로 그 시간, ‘일·삶 균형’ 방에선 말 없는 이모티콘이 몇 개 떠올랐다.


“주말 회식이요…?”

지아가 낮은 톤으로 물었다. MZ 특유의 단호함과 예의가 섞인 목소리. “평일 대체 휴무가 있다면 괜찮고요.”


서진 팀장은 난감한 표정으로 웃었다.

“이번만—사장님 일정이 토요일밖에 안 되셔서.”


결국 팀은 모였다. 누군가는 ‘회사도 가족’이라는 농담을 던졌고, 누군가는 생색 없는 시간 비용을 속으로 계산했다. 이담은 숟가락을 들다 말고 국물 위 기름막을 한 번 걷어냈다. 달리기를 시작한 뒤로 늘 배가 고팠고, 어느 순간부터 몸이 무겁게 느껴졌다. 장난처럼 “건강한 돼지”라고 말했지만, 신발끈을 조일 때 눌리는 옆구리가 마음에 걸렸다.


“보양식이라고 하면 다 좋은 걸까요?” 지아가 물었다.


“예전엔 영양이 모자란 시대라 한 끼를 몰아 먹는 날이 필요했죠.” 이담이 답했다.


“지금은 매일이 이미 고영양이라… 진짜 보양은 덜 먹는 날을 설계하는 걸지도.”


테이블 끝에서 누군가 보신탕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 아버진 몸 보신한다고 여름마다 드셨다는데—이젠 시대가 바뀌었지.”

누군가는 윤리 이야기를 했고, 누군가는 지역의 문화사를 말했다. 의견은 갈렸지만, 대화는 싸움이 되지 않았다. 음식은 때로 의도와 맥락의 문제라는 걸 서로 알았기 때문이다.


이담은 밥을 반 공기만 퍼서 옆으로 밀었다. 맛이 옅어졌는데 이상하게 몸이 가벼워지는 맛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날 때, 배가 아니라 발목이 먼저 움직였다. 저녁 강변을 뛰면서 그는 속삭였다. 토요일은 가볍게. 접시는 절반만. 달리기를 위한 다이어트가 아니라, 달리기가 덜 불편해지는 식사를 위한 약속.


회식 뒤 팀 채팅방엔 이 말이 남았다.

— 주말 회식, 다음엔 평일 대체로 논의 부탁드립니다. (지아)

— 동의. 오늘은 고생 많았습니다. (이담)

— 확인했습니다. 다음엔 평일 저녁으로 잡겠습니다. (서진)


작은 합의가 팀의 소화를 도왔다. 이담은 지아의 메시지에 ‘엄지’를 눌렀다. 말의 톤이 불만에서 제안으로 이동하는 순간, 관계의 염증도 가라앉는다.



해가 기울고 부엌이 금빛으로 물들 무렵, 둘은 온유 집에서 하루 요리 시간을 열었다. 타이머 45분. 배경음은 유튜브 느린 요리 브이로그.


“오늘의 목표는 색 두 가지 + 따뜻함 한 가지.” 온유가 규칙을 말했다.

“설거지는 조리 중간에.”


온유는 단호박을 전자레인지 용기에 담아 6분을 눌렀다. 이담은 파프리카를 납작하게 썰어 에어프라이어에 올렸다. 냄비에서 물이 끓기 시작하자, 둘은 대화의 속도도 낮췄다.


“나, 요즘 딸기 대신 딸기 우유를 자꾸 집더라.” 온유가 웃었다.

“과일이 너무 비싸서 망설이다 보면, 달달한 게 빠르게 해결해 주는 느낌이라서.”


“난 반대.” 이담이 숟가락을 돌렸다.

“달리기 시작하고 식욕이 늘었거든. 기록 대신 ‘먹기’가 늘어. 그래서 오늘은 절반 접시.”


“그럼 오늘은 이렇게 하자.” 온유가 접시를 가리켰다.

“나는 첫 칸—손이 덜 가는 신선함을 먼저. 넌 절반 접시.”


상 위에 노랑·초록·흰색이 단정하게 놓였다. 단호박—오이—삶은 달걀, 그리고 현미밥 반 공기. 젓가락이 잠깐 멈췄다. 둘은 냄새를 먼저 맡고 한 박자 쉬었다. 급한 배고픔의 파도가 조금 물러났다. 창문을 한 뼘 열자 따뜻한 김이 빠져나가고 선선함이 들어왔다. 온유는 마음속으로 말했다. 의지가 아니라 순서.


식사를 마치고, 이담은 달력에 작은 점을 찍었다. 온유는 냉장고 첫 칸을 다시 확인했다. 둘의 접시는 다 비워지지 않았지만, 내일의 리듬을 준비하기엔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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